100-Year-Old Top Chef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더 파워풀 하게 (1)
내가 속해있는 레스토랑의 주방은 점점 안정화가 되었고, 이 몸으로 환생한 지 5개월이 넘었을 때였다.
“셰프님! 미국에서 택배가 왔습니다.”
주방의 한 직원이 내게 거대한 박스를 가져왔다.
“협찬제의야? 앞으로 그런 건 묻지 말고 창고에 넣어둬.”
이 도시 내에서 ‘레드 테이블-더 파스타’라는 식당의 유명세는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기업들은 이 주방의 지휘자인 나에게 각종 선물 공세를 펼쳤었다.
물론, 말이 선물이지 믹서기나, 접시나, 칼 같은 자신들의 제품을 사용해 달라는 구애 행위였다.
현지에서 ‘레드테이블 – 더 파스타’의 유명세를 고려했을 때, 내가 방송이나 언론에 비춰지리라 예상한 것이다.
“협찬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뭔데.”
직원의 목소리에 나는 박스에 적힌 글씨들을 읽었다.
-펠리지오 호텔 총주방장. A.톰슨
라스베이거스 5성급 호텔, 펠리지오의 헤드 셰프인 톰슨.
현재 미슐랭 스타를 보유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스타 셰프들을 배출시킨 미국 명문 요리학교 CIA의 교수 출신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약 한 달 전, 그랜드 오프닝이 끝난 직후에 나에게 명함을 건넸던 그가 나에게 또다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와……. 이 칼은……. 독일제 명품 칼 아니에요?”
명품 칼이 종류별로 8자루가 담긴, 선물 세트와 함께 말이다.
‘마음을 과감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군.’
펠리지오 호텔이 톰슨을 총주방장으로 섭외한 가장 큰 이유는, 명문 요리학교의 교수 출신인 그가 가진 인맥을 이용해 강력한 셰프 군단을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명품 칼을 선물해주면서까지,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나 또한 그의 레이더에 걸린 것일 테고.
나는 택배 안에 들어있던 칼자루를 꺼냈고, 그 바닥에 있는 편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비행기 표와 편지가 담겨져 있었다.
비행기 표는 라스베이거스 행이었고,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생략… 세계 최대의 미식 축제라고도 불리는, ‘베이거스 언코크드(Vegas Uncork’d)’에 반유현 셰프님을 초대합니다. 한 달 전 먹었던 그 파스타의 맛을, 이곳에 있는 셰프들에게도 전하고 싶군요. 행복했던 기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 작은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셰프, 톰슨.-
베이거스 언코크드(Vegas Uncork’d).
라스베이거스 관광청이 주최하고, 그곳에 있는 수많은 호텔들이 후원하며, 1년에 한 번씩, 총 11번 개최된 이 행사는 라스베이거스를 미식의 도시로 입지를 굳히는 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들의 요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못지않은 수많은 먹거리와 볼거리를 볼 수 있는 행사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가장 큰 축제야.”
“거, 거기에 셰프로 초대되신……”
때마침 루시앙과 올리버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뭐해?”
멍 때리고 있는 직원과, 가만히 편지를 읽고 있는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듯이, 내 옆으로 와 편지를 함께 읽었다.
“흠……. 가는 게 당연히 좋지. 전 세계 수많은 미식가들과 유명한 셰프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네의 요리를 선보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런데, 크흠!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나는구만.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셰프를 여럿 봤거든. 그곳엔 셰프를 홀릴 요소들이 너무 많아.”
“이 레스토랑이 미슐랭 스타를 받을 때까지는 자리를 지킬 생각입니다. 제가 이곳을 떠날 만큼 이곳의 주방이, 아직 제 성에 차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오너 셰프로서 가장 가슴 뭉클한 말이야! 더군다나 자네가 그런 말을 해주니, 아주 든든해!”
루시앙이 나의 대답에 호탕하게 웃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미슐랭 스타를 받는다면?”
“더 큰물로 가야죠.”
“흠. 천재 셰프들이 가진 양날의 검인가, 영원히 가둬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거? 하하하! 지금부터 자네를 놓치지 않을 방법을 지금부터 생각해야겠구만. 혹시나 베가스에서 어떤 제안을 듣더라도 내 제안을 한 번 더 들어주게.”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라스베이거스 행, 비행기에 앉아 지난 삶들을 되돌아봤다.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100년의 삶을 살며 얻은 경험 덕에, 여태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셰프로서 입지를 올리고 있지만, 입지를 얻으면서 챙겨야 할 진정한 알맹이는 따로 있다.
‘지금부터 쌓아놔야 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라도,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같이 마구잡이로 가맹점을 늘리지 못하는 이유는 인맥, 정확히는 ‘사람’이었다.
미슐랭 스타를 한 개, 두 개가 아닌 서른 개를 얻으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상,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동시에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레스토랑을 매번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에겐 매번의 삶 동안 검증된 ‘내 사람’이 필요했다.
나의 요리 의도를 구현하며, 각 레스토랑의 수많은 인력과 식재료를 관리하고, 내 이름값을 떨어뜨릴 염려가 없는, 그런 사람.
곳곳에 퍼진 레스토랑에서 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나의 분신과도 같은 사람들 말이다.
문제는, 나의 분신들은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매번 다른 국적의 다른 몸으로 환생하는 나는, 전생에 쌓았던 인연들을 모두 잃게 되므로, 매 삶에서 인간관계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었다.
‘환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 행사에 갈 수 있다니.’
그런데, 내가 초대받은 이 행사는, 그런 시간들을 효과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행사였다.
행사에 참여하는 셰계적인 명성의 셰프들,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거나 따르는 셰프들.
셀 수 없이 많은 셰프들이 모인 그 자리엔, 내가 전생 동안 검증했던 셰프들이 있을 확률이 높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전생을 함께한 내 ‘옛 동료’들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한 명만 만날 수 있더라도.’
여러 번의 생을 거듭하면서 만났던 수십 명의 옛 동료들 중 단 한 명, 한 명과 커넥션을 만들 수 있기만 해도 내가 한 이 발걸음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나의 동료들은 내가 목표를 이루는 것에 강력한 힘을 보탰다.
***
공항에 내리자마자,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나를 차로 안내했다.
톰슨이 나에게 명함을 줄 때, 언질을 했듯이 롤스로이스 차량에 특별 의전을 추가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각종 조형물과, 조명, 그리고 분수가 펼쳐지는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를 보며, 성공의 상징인 세계적인 명차의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고 가는 이 느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실 줄 알았다면, 통역사를 데려오지 않을 걸 그랬습니다. 하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환생한 지 1년이 채 안 됐으니까, 이 느낌을 느낀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전생엔 슈퍼스타이자, 특급 셰프로 롤스로이스를 탔다면, 지금은 그저 실력과 잠재력으로만 이 차를 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편안히 쉬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정이 잡히는 대로, 저희가 직접 올라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검은 정장의 사내들은 나를 펠리지오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안내했다.
혼자 있으면 공포감이 생길 정도로 넓고 조용한 객실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나. 고급 쇼파에 누워 창밖으로 라스베이거스의 전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 누군가 객실을 노크했다.
“반 셰프, 톰슨입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곧장 문을 열었다.
나를 이곳에 초대한, 이 호텔 메인 레스토랑의 총주방장 톰슨이었다.
“죄송합니다. 더 오래 쉬셨어야 할 텐데. 제가 너무 뵙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자하고, 자상하게 생긴 생김새와 달리 감정표현이 꽤나 저돌적이었다.
“영광입니다. 톰슨 셰프님.”
“제가 영광이지요. 반 셰프에 대해 조사를 좀 했는데,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는 걸 싫어하신다고……. 하하. 자리에 앉으시죠,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톰슨은 준비한 말을 하듯이,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했고, 우리는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편지에 쓴 내용이 모두 사실입니다. 단, 하나도 거짓이 없습니다. 반 셰프의 파스타, 기계가 만든 것 같은 정교한 파스타를 저희 직원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주방의 일일 강사로 초대를 한 것이고요. 그에 따라,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의 비용은 저희 펠리지오 호텔에서 부담합니다. 그리고 반 셰프보다 셰프로서의 생활을 오래 한 선배로서, 이런 특별한 행사에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크흠! 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여서 당황한 것인지, 톰슨은 연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행사는 4일 동안 진행되는데, 둘째 날 밤. ‘그랜드 테이스팅’이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이곳에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세계 정상급 셰프들의 요리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행사지요. 각 셰프들마다 부스가 정해져 있는데, 제 부스에서 그 파스타를 만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외식업계에 수많은 인맥들을 가진 톰슨, 그는 프랑스에서 먹었던 내 파스타에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 연신 파스타를 말했다.
“저희 직원들에게 파스타를 맛보여주시고, 제게 마련된 부스에서도 파스타를 만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파스타 말고도 보여줄 수 있는 요리가 수천만 가지인데 말이다.
***
“그랜드 테이스팅이 낼모레이니, 내일 그…… 파스타 강의가 가능하시겠습니까?”
톰슨은 내일 강의를 위해, 주방에서 내게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라고 했다.
파스타 강의를 할 때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구비해, 내 편의를 봐주겠다는 의도였다.
“제가 강의라고 말하긴 했지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반유현 셰프가 가진 기술을 선보이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 직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에 따라 우리는 펠라지오의 레스토랑인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방엔 다섯 명의 사내들이 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쉬는 날에도 나와서, 요리 연습을 하는 거야?”
“예! 셰프! 오셨습니까.”
“여기, 프랑스에서 온 반유현 셰프. 내가 많이 얘기했지, 한번 주방에 모실 거라고.”
“아…….”
톰슨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이름을 들어봤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내 나이가 저들의 생각보다 훨씬 어려서 그랬는지, 내가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반유현’일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톰슨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머릿속에서 나를 엄청난 베테랑 셰프로 그려 놓았을 테니 말이다.
나를 행사관계자쯤으로 봤던 모양인데, 나를 보는 저들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내일 우리 셰프들 전부 모아서, 반유현 셰프의 파스타를 맛볼 거라네. 내가 받았던 영감을 자네들한테도 주려고. 하하! 그래서 반유현 셰프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구비해주려고 잠시 주방에 내려온 거야.”
“아, 그럼 편하게 주방 이용하시라고 저희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톰슨은 주방을 비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사내들은 자리를 내주려 했다.
“아니, 됐습니다. 무슨 요리입니까?”
나는 괜찮다는 표시를 한 뒤에 그 사내들이 만든 요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쉬는 날에도 주방에서 요리 연습을 하는 사내들을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요리 업계의 ‘고인물’로서, ‘뉴비’들의 열정을 보면 저절로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아, 갈비찜입니다. 한국에서 오셨으니까. 잘 아실 테죠.”
“하하! 그러고 보니, 반유현 셰프가 한국 사람이구나! 맛 한번 봐줄래요? 고향의 맛이 느껴지는지. 이 친구들 우리 주방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막내들이거든요.”
내가 포크를 들어, 잘게 부스러진 고기 중 한 점을 찍어 먹었다.
“뭐, 맛있네요. 근데…….”
나도 모르게 시식 평을 하려던 그때, 이들은 나의 평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꿀꺽.
저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아무래도, 톰슨이 내 얘기를 입이 닳도록 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