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6 (daily samsamyuk) RAW novel - Chapter 42
42화.
“아, 결국 비가 오네요. 어휴, 추워라.”
“우산 가져왔어 ”
“네. 원장님은요 ”
“깜빡했네. 앞에서 택시 타려고.”
현정은 정리해 둔 차트를 사희의 책상에 내려 두며 고개를 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희가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찰랑이는 단발이 딱 떨어지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켜 온 김택근 의원을 이어받은 후로 백사 의원은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다. 조금 냉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신뢰감을 주는 말투로 도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사희는 동네 주민들에게 제법 인기가 좋았다.
본래 이 동네에는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몇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인 동네다. 살가운 성격이 아님에도 그런 곳에 갑자기 나타나 자리를 잡은 것치고는 사희는 제법 빨리 적응을 하고 뿌리를 내린 편이었다.
사희는 입이 무겁고 사적인 얘기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소문만 몇 년째 무성했다. 공인된 사실은 결혼을 했고, 백희라는 딸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주말은 푹 쉬실 수 있겠네요. 토요일 오전 진료는 박 원장님이 보신다고 했으니까.”
“내일 강인숙 씨 검진 결과 나올 거야. 그거 오는 대로 나한테 메일로 좀 보내 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만 소등할까요 ”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사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을 벗자 몸에 붙는 아이보리색 터틀넥과 모직 스커트가 날씬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녀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체크 코트를 잡아당기는 것을 본 현정은 진료실을 나와 제자리로 돌아가 외투를 챙겼다.
“택시 잡아 드릴게요.”
“괜찮아. 바로 앞인데 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빗소리가 들린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곧 12월. 어느새 연말이 목전이다. 현정은 사희를 흘끔거렸다.
“연말에는 무슨 계획 있으세요 저희 마지막 주 쉬잖아요.”
“글쎄, 아직 정해 놓진 않았는데. 남편이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해서 가까운 데 나갈지도 모르겠고.”
덤덤하게 흘러나온 사희의 말에 현정의 눈이 반짝였다. 늘 궁금했지만 어쩐지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던 주제였다.
“저어, 원장님은 남편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저도 벌써 서른둘인데 올해도 그냥 이렇게 아무 성과 없이 가 버리는 것 같아서요.”
순간 바깥을 바라보던 사희의 옆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남편과 사이가 좋구나. 그걸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정이었다. 사희의 나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릴 때 잠깐 옆집에 살았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우연히 재회했어요.”
“최악의 상황요 ”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현정을 내려다본 사희가 빙긋 웃는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정은 수더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왠지 엄청 중후하고 멋있는 분이실 것 같아요. 원장님을 느긋하게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
“……한 팔로 날 안을 수 있을 만큼 덩치가 크긴 하지. 중후는 아직 멀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희의 입꼬리에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부러웠다. 저런 얼굴로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현정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 외롭네요. 겨울 되니까 더더욱. 원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집에 가면 남편분도 계실 테고, 귀여운 백희도 있고.”
“출장이라 일주일 동안 얼굴도 못 봤어요.”
“출장요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 봐도…….”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빌딩 입구에 선 현정은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유리문 밖으로 무의미하게 던진 그녀의 시선이 길가에 세워진 검은 SUV에서 막 우산을 펼치며 내리는 남자에게 꽂혔다.
몸에 잘 맞는 슈트를 걸친 남자는 언뜻 보기에도 키가 훌쩍 크고 체구가 떡 벌어져 시선을 끌었다. 남성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다. 남자는 분명 잘 차려 입었는데도 어쩐지 흙먼지 냄새가 풍기는 듯한 거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서른 좀 넘었을까. 차를 빙 돌아와 조수석에서 소담한 꽃다발을 꺼내는 남자를 본 순간 현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나 참. 왜 꼭 저런 남자는 완벽하게 꽃다발까지 챙기고 난리람.
차 문을 닫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남자의 얼굴에 일순 소년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 시선의 방향을 눈치챈 현정은 어머, 하고 외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설마 하는 그녀의 생각에 남자가 쐐기를 박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보. 사희야.”
“어떻게 빨라야 내일 온다더니.”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개를 한껏 젖혀야 될 만큼 키가 훤칠했다. 현정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악, 야, 잠깐!”
버튼을 눌러 접은 우산을 바닥에 적당히 던져두며 남자는 양손으로 선뜻 사희의 뺨을 감쌌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현정은 숨을 죽인 채 닿을 듯 말 듯한 남자와 사희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사희가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떠밀었다. 잘생긴 얼굴이 뭉개지는 게 안타까웠다.
“벼, 병원 식구!”
버둥거리며 사희가 외치는 말에 남자가 그제야 눈을 끔벅이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몸을 물렸다. 그런데도 이미 그의 두터운 팔은 사희의 허리를 당연한 듯 감싸고 있었다.
어두워서 다행이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사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남자의 태도에 오히려 제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현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시야가 좁아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손을 마구 흔들어 보이자 남자가 웃으며 사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깊고 달콤해 현정은 왠지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어졌다. 눈 뜨고 이 사이에 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사희가 작게 물었다.
“갔던 일은. 잘된 거야 ”
“응. 관심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어. 의뢰서도 몇 건 받아 왔고. 내년 스케줄은 이미 다 찬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박람회가 꽤 성황이었나 보네.”
“그래서 사치품을 사 왔지.”
남자가 꽃다발을 가볍게 흔든다. 사희는 새치름하게 웃으며 그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녀의 표정에 눈을 깜빡이고 있던 현정은 제게로 돌아서는 남자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인상이 강렬한 남자가 금세 허물어진 표정으로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백사, 사희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성격이 많이 까다롭고 예민하죠 그래도 아주 못된 사람은 아니니까 예쁘게 봐 주세요.”
“아,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으세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거짓말이겠지만 별수 있겠는가. 현정은 사회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애써 태연하게 손을 내저어 보이자 슈트를 입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미간을 찌푸린 사희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 남편이에요. 철이 없어서 아들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날 아들 취급 할 수 있는 건 미자 아줌마뿐이지. 당신은 내 여보고. 맨날 까먹네, 이 사람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고개를 숙여 사희의 머리칼에 입술을 비빈다.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현정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남편 쪽이 연하인 건 알겠는데, 그 밸런스가 무척이나 편하고 잘 어울려 보였던 것이다.
“아, 그럼 얼른 들어가 보세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원장님.”
“그래요, 현정 씨. 조심해서 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우리 사희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제,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현정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주 인사를 한 남자가 자연스레 사희의 허리를 감고 우산을 펼쳤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가 금세 무어라 티격태격하며 차를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정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가슴 한구석이 어쩐지 황량했다.
“이런 날은 술이지, 술.”
휴대폰을 꺼내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며 현정은 고개를 들었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둑한 하늘이 한없이 무정하게만 보였다.
먼저 차에 탄 사희는 어깨를 가볍게 털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빗방울이 묻은 꽃다발에 코를 묻자 젖은 향기가 물씬 풍긴다. 하루 종일 환자들에게 시달려 예민해져 있는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가슴이 다독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고 백구가 차에 올라탔다. 사희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비에 젖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손등으로 뺨의 물기를 훔친 백구가 문을 닫으며 그녀 쪽으로 돌아앉았다.
“피곤할 텐데 집으로 바로 가지, 왜 병원으로 와 ”
“오늘 야간 진료 하는 날이잖아. 거기다 비까지 오니까.”
“어깨 다 젖었네. 또 우산 비딱하게 들었지 ”
나직하게 말하던 사희의 시선이 뒷좌석을 훑었다. 그녀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갈아입을 옷 있었네. 정장 차림으로 운전하기 불편하지 않았어 ”
“불편했지.”
덤덤한 대꾸에 사희는 눈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백구가 뚫어져라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썹 한 올 한 올부터 콧잔등과 입술까지, 뭔가 바뀌지 않았나, 잘못되지 않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다. 백구가 이런 눈을 하면 벌거벗고 그 앞에 선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눈을 또르르 굴리는 그녀를 응시하며 백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일주일 만에 보는 거고, 병원으로 데리러 갈 생각이기도 했고.”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무엇보다 당신이 나 슈트 입은 거 보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사실이지.”
순순히 수긍하며 사희가 흐흐, 웃었다. 비에 젖어 축축하지만 늘 그렇듯 뜨끈한 열기를 품고 있는 백구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올렸다. 씩 웃고 있던 백구가 쪽, 하고 입을 맞춰 왔다.
그의 가슴에 손을 기대며 입을 벌리자 백구가 능숙하게 고개를 비틀며 미끈한 혀를 밀어 넣는다. 부드럽게 입술을 몇 번 겹치던 키스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늘 이런 식이다. 백구는 정도를 몰랐다. 장난삼아서, 혹은 일상의 어느 순간 불쑥 넘쳐흐르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희가 가볍게 입을 맞추면 그 즉시 백구는 그녀를 덮쳐 왔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키스가 키스로 끝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단단하게 군살이 잡힌 손바닥이 사희의 귀와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코트 안을 파고든 손이 점점 아래로 타고 내려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스쳤다.
거칠게 사희의 입 안으로 숨을 내뱉은 백구의 손이 코트 단추를 풀고 스커트 안으로 집어넣은 터틀넥을 잡아당겼다. 사희는 그 안으로 태연하게 파고들어 와 맨살을 쓰다듬는 백구의 은근한 손길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여기 노상이다. 내 직장 앞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