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18
118. 미래에서 왔소(1)
“록셀란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록셀란을 알아요?”
태영의 질문에 아나이스가 반문했다.
태영과 아나이스가 마주한 장소는 사포의 병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큰 식당이 아닌, 그곳에서 문 2개를 더 지난 곳이다.
통로가 나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다른 공간이라고 봐야 할 정도이다.
아나이스와 태영의 사이에는 3미터가 좀 넘을 것 같은 식탁이 가로막고 있다.
이토록 긴 식탁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그나마도 의자를 식탁에 바짝 붙여 앉지 않으니 4미터는 충분히 떨어진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고, 하렘의 오달리스크에서 정식으로 쉴레이만 황제의 아내가 된 여인, 그 정도.”
“……왜 황후라 부르지 않죠?”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정말 궁금한 것인가?
“후세의 사람들이 황후라 불렀지만, 당대에는 황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아는 것이 조금 더 있구나. 로하틴이 고향이고 사제의 딸, 타타르족에게 포로로 붙잡혀 노예 신분이 되었고, 거기서 크림 칸에 보내진 후, 다시 오스만에 바치는 조공으로 코스탄티니예의 하렘에 보내진 여인.”
Binesper에서 링크를 하기 위해 요약된 정보의 내용으로 읽은 것을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하, 나도 거기까지는 몰랐는데.”
아나이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은 나도 모르오. 그 정도만 해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여인으로 보이는데, 짐작 이긴 하지만, 아나이스 또한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나에 대한 이야기는 아는 게 없나요?”
“후세에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기록은 항상 승자의 편이죠. 그런 기록은 결국 유명인이나 세상의 일부를 지배한 사람들, 또는 비상식적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의 차지이니까요.”
“…….”
웃는 느낌이었다.
면사는 모든 것을 감추고 오직 눈만을 내보이고 있으니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나이스의 대답에 차를 든 하녀가 들어왔다.
차를 마시려면, 면사를 벗으려나?”
면사를 한 채로 차를 마시려면,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할 테니 아마도 벗지 않을까?
아나이스와 태영에게 각각 한 명씩 차 주전자와 찻잔을 받친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는데, 뒤따라 한 사람이 더 들어오더니, 아나이스가 앉은 자리의 앞쪽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돌리자 천정에서 가림막이 하나 긴 테이블의 중간 지점의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아까부터 천정에 뭐가 달려 있나 했더니 가림막이었다.
저 높이라면 완벽하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위치이다.
누군가가 일어서서 가까이 간다면 얼굴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지만.
“부를 때까지 출입을 삼가도록.”
차를 내려놓고 벽에 서서 대기하던 하녀들에게 지시를 한다.
하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뒷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건 매너가 아닌데.”
하녀들이 물러난 것을 확인하자 태영이 볼멘소리를 했다.
“알아요.”
어, 그런데 매너라는 단어를 알아듣는다는 말이야?
일부러 반응을 떠보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는데.
“매너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훗.”
대답은 하지 않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내는 소리만 들렸는데, 느낌상으로는 분명히 안다는 의미였다.
면사로 눈만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림막으로 가렸으니 뭐 하자는 것인지.
아나이스가 손잡이를 돌리는지 가림막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태영의 시선에 아나이스의 가슴을 지나 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면사가 없다.
그리고 입술과 코를 지나고 잠깐 멈춘 듯하더니 드디어 눈과 눈썹, 이마가 드러났다. 아마, 이 여자는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데는 선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렘의 오달리스크 출신이라서 그런가?
물론, 그렇다고 태영이 상대가 여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궁금함 같은 것으로 애간장이 타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눈빛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
매혹적이고 요염해 보이는, 선명한 입술.
서양인 특유의 오뚝한 코.
그리고 하얀 피부 톤.
아마도 언제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탓에 햇빛을 받지 못해 더욱더 하얀 피부인 듯하다.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면 헉 소리가 나올 만큼 미인이었다.
태영이 서양인을 특별히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다.
어째 라일리도 그렇고, 아나이스 이 여인도 그렇고, 이 시대보다 미래에서 온 여인들은 어떻게 둘 다 저렇게 예쁠까?
그 때문인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맞을까?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분이군요.”
“예상보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 태영의 단어 선택과 달리, 아나이스의 반문에 기분 나쁜 느낌은 없었다.
“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소 짓는데,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저 미소에 녹아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말없이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입술을 축인다.
눈짓 하나, 행동 하나, 찻잔을 드는 모습과 찻잔에 가져다 대고 입술을 축이는 행동까지, 저 모습은 남자를 유혹하는데 최적화된 행동이다.
황제의 눈에 들어야 존재의 이유가 있는 오달리스크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놀라지도 않고, 나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서의 호기심과 욕망이 얼굴에 나타나지도 않고, 최 단주님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그럼, 조금 전까지 보여 준 일련의 행동들이 떠보기 위함이었다는 소리인가?
아나이스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나, 예쁘지 않아요?”
“예뻐요. 심장을 쥐어짜고 싶을 만큼.”
“그런데?”
가벼운 미소와 함께 반문하는데, 그 표정과 어투 또한 가슴속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저런 모습을 계속 보이면 심장이 견뎌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아내가 있고, 아내도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오.”
“아내분이 참으로 부럽군요.”
“……?”
“아내가 있고, 또 아내가 아름답다고 모두 최 단주님 같지 않아요.”
하긴 그럴지도.
이 시대에는 부자이거나 권력자들이라면 대개 다 후처라 불리는 젊고 예쁜 여인들 여럿을 아내로 두고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거든요.”
“역시 부러운 말씀만 하시는군요.”
그 말에 따라 나온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보여 주는 묘한 느낌은, 자신의 남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쉴레이만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때를 떠올린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날 유혹한 거요?”
“유혹한 것을 알긴 하는군요.”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냥, 궁금했어요. 1천 년 후의 세상에서 온 사람은 어떨까 하고.”
1천 년 후의 이야기는 서로 간에 비밀이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안 되요, 하는 따위의 사족은 이미 필요 없었다. 그런 과정은 명주에서 처음 봤을 때, 이미 지나간 것이다.
“어때요?”
“생각보다 대단하군요.”
“잘 보았소. 떠본 것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결과가 그리되었네요, 사과할게요.”
눈빛은 여전히 매혹적이고, 말을 할 때의 표정과 입술의 움직임은 남자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유혹적인데, 말의 내용에서는 그런 것이 사라졌다.
요물은 요물이다.
멋모르고 남자의 본능과 호기가 발동해서 저기에 걸려들었다가는 어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자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사과, 받아들이지요.”
“흠, 그쪽 세상 이야기를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만든 것이오?”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세 가지?”
“네.”
“말해 보시오.”
“아까 말씀드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이고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나는 나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최 단주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최 단주님 상단의 모든 분들에게 얼굴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그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지요.”
궁금증을 유발시키는데도 선수인가?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오만. 내가 이곳에 오래 있지는 않아도 아라비아 색목인도 보았고, 잉글랜드 사람을 본 적도 있는데.”
살짝 얼굴에 맺히는 웃음. 그리고 입을 열어 물었다.
“조나단 스미스?”
잉글랜드 동부의 케임브리지 지역에 위치한 작은 영지의 자작이라고 했었다.
“만난 적 있는 모양이군요?”
“예상 못 한 만남이었는데, 만났을 때 최 단주님 이야기를 하더군요.”
조나단 스미스와의 대화에서 태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아나이스가 영어를 할 줄 알거나, 조나단 스미스가 아나이스가 했던 이상한 말을 할 줄 알거나 둘 중 하나이다.
결론은 아나이스가 영어를 한다는 말이다.
매너 이야기를 했을 때 눈치를 채기는 했다.
“나와는 지난해 초여름에 만났지요. 오래 머물지 않고 출발했으면 지금쯤 자신의 성에 도착했겠군요.”
“네, 아마도.”
“아나이스가 처음 나와 만났을 때 역시, 라고 말한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해 봤는데, 혹시 유리와 거울 때문인가요?”
태영이 첫 만남에서의 이야기를 꺼냈다.
“맞아요. 내가 살던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물건이었거든요.”
“흠, 그것으로 짐작을 할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
태영의 말에 싱긋 웃기만 한다.
“그런데, 아나이스는 나와 달리 송나라 말이 매우 유창한 것을 보니 이곳에 온 지 오래된 모양입니다.”
“내가 몇 살 정도 되었을 것 같아요?”
태영의 의문에 아나이스가 도리어 질문을 했다.
“스물여섯?”
태영은 추정하는 나이가 맞느냐는 의미로 물었다.
“거기에 40을 더하면 거의 맞아요.”
“하.”
혹시, 라일리처럼 평행 우주로의 차원 이동에 따른 비정상적인 변화?
“그러면, 왜 내가 면사를 벗지 않는지 이해하나요?”
이해하고말고.
사람이 얼굴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의 놀라움은 어떨까?
태영이 아나이스를 만난 것처럼 처음이라면 아무 상관없지만, 종종 만나지는 관계라면 나이 들지 않는 것을 그냥 부러워만 할까?
이 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살고 있기에 무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혹세무민에 잘 넘어가서 휩쓸리고, 이상한 미신과 주술을 진실이라 믿는다. 그런 그들이, 나이 들지 않는 아나이스를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14세기의 유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녀사냥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오죽하면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인 잔 다르크도 마녀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을 정도이니.
“전혀 놀라지 않는군요?”
“놀라야 하는 거요?”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놀라움을 밖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라서.”
태영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죠.”
어떻게 그 나이에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지.
“미안하게도, 그 궁금함을 풀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나도 모르니까.”
라일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제는 다시 돌려 볼 수도 없는 영상이다. 지워져 버렸으니.
휴지통까지 빠짐없이 찾아봤지만, 사진 같은 것은 물론이고, 라일리와 관련된 것은 흔적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태영이 컴퓨터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컴맹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정도인데 태영의 지식을 총동원해도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최 단주님은?”
“나는 올해 스물넷, 봄이 되면 이 시대로 온 지 3년이 됩니다.”
우리식으로 보면, 새해가 되었으니 스물여섯이지만, 만 나이로 따지면 아직도 스물네 살이다.
“이쯤에서 세 번째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아나이스가 태영에게 물었다.
“네, 말씀하시지요.”
“세 번째 이유는 한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데 괜찮으시죠?”
“네, 상관없습니다.”
태영의 대답을 들은 아나이스는 자신의 우측에 천정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끝에 수실로 장식된 다섯 개의 줄 중의 노란 수실로 끝이 장식된 줄을 당겼다.
저 줄들이 밖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줄일 거라 짐작은 했었다.
잠시 후, 한쪽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50대로 보이는 서양인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약간 탈색된 노란 머리, 연한 푸른색의 눈.
혹시 남편인가?
“I’m Kenneth Nicholson.”
그 사람은 태영에게 영어로 말했다.
통상적으로 붙이는 Nice to meet you 같은 인사말은 하지 않았다. 발음으로 보건대, 이 사람은 토종 영국 사람이다.
“케네스 씨는 송나라 말을 하지 못해요.”
이때부터 세 사람은 영어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나이스의 영어가 태영보다 조금 부족하긴 해도 대화는 문제가 없었다.
케네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태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당시에 프랑스의 알베르트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케네스의 이야기.
1916년 여름, 프랑스 알베흐(Albert) 지방, 영어로 읽으면 알베르트라고 하는 지방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 작전으로 전투에 참여했단다.
어마어마한 병력이 전투에 동원되었고, 케네스 역시 그 전투에 차출되었는데, 자신이 이곳으로 날아오기 전에 있던 곳은 지도상의 표기로 알베흐와 보몽 아멜(Beaumont-Hamel)의 중간 지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케네스의 이야기 중에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솜 강 전투.
세계 1차 대전 기간 중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사상자는 대략 3천만이 넘고, 확인된 사망자의 수만 1천만에 근접한다.
그 1차 대전 중의 대규모 전투였던 솜 강 전투에서 총 사상자가 120만이 넘고, 확인된 사망자가 30만 명이 넘는다.
2차 대전 중에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4,700만 명이 넘으니 거기에 비한다면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케네스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밤에 몸을 벌떡벌떡 일으키는 일이 잦고, 깊이 잠들지 못한단다.
“아나이스에게 듣기로 지금으로부터 1천 년 후의 세계에서 오신 것으로 들었는데, 혹시 그 전투의 결과를 알고 계십니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케네스가 물었다.
“자세한 것은 기억에 없지만, 그해 겨울 유난히 폭설이 심하여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전투가 중단되었고, 연합군과 독일 제국을 합쳐 12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 전투에서 발생한 영국군의 사상자는 대략 36만 명 정도.”
말이 36만이지, 한 전투에서 그 정도이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다.
정말 시체가 산을 만들고 핏물이 강을 이루고도 남을 정도의 처참하고도 끔찍한 상황일 것이다.
“정말 많이 죽고, 많이 다쳤군요.”
케네스는 그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듯 잠시 눈을 감았는데, 눈가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전쟁을 1차 세계 대전이라 불렀고, 민간인을 제외한 군인의 숫자만 3,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94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
아나이스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그럼 2차 세계 대전도 있었습니까?”
“네.”
“영국도 참전했습니까?”
“네, 참전했고, 그 전쟁에서 50만 명의 영국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1차 세계대전에서 100만 명의 군인이 죽은 것에 비하면 영국군 사망자는 적은 편이지요.”
“그럼, 그 많은 사상자는 대체 어디에서?”
“소비에트, 700만 명.”
태영의 시대에는 러시아라 불렀지만, 그 이전에 소련이라 불렸고, 1차 대전 당시에는 소비에트 공화국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소비에트. 그렇군요. 그런데 독일과 프랑스는요? 제가 이곳으로 날아온 곳은 프랑스 땅이었고, 독일의 진격을 막기 위해 들어간 전투였는데요?”
“그 전투에서 독일은 6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생겼고, 프랑스도 20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후…….”
계속 사람 죽은 이야기만 하다 보니 분위기가 무겁다. 그렇다고 갑자기 대화를 전환시키기도 어렵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대체 얼마나 죽었나요?”
그냥 자조적 느낌으로 묻는 것 같았다.
“4,700만 명, 다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고, 소비에트, 아니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이라 불렸는데, 3,000만이 죽었지요.”
“하…….”
이번에는 아나이스와 케네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탄식을 뱉어 냈다.
세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코 입에 올려서 전혀 기쁠 것이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참전했던, 1차 세계 대전은 언제 끝났습니까?”
한참을 눈물 흘리던 케네스가 소매로 눈물을 닦고 물었다.
“1918년 11월에 끝났습니다.”
“불과 4년 반의 전쟁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군요.”
“네.”
“…….”
또 세 사람 다 말을 잃었다.
“아, 아나이스가 살았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4년 후인 1922년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아.”
“아무래도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인 듯 생각됩니다.”
“혹시 지금, 몇 년인지 알고 계십니까?”
케네스가 물었다.
그렇지. 지금이 몇 년도인지 이들은 모르는 것이 정상이리라.
“올해는 1220년입니다.”
태영의 대답에 케네스도, 아나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스는 연도 기준을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데, 아나이스도 그것에 대해 아무 질문이 없는 게 케네스에게 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혹시, 내가 살던 때는, 지금 그런 서기 방식으로 하면 언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나이스가 물었다.
“아나이스 시대의 쉴레이만 대제는 1520년에 황제가 되었으니, 황제가 되고 몇 년 후에 아나이스가 그곳에 있었는지 알면 계산이 될 것입니다.”
태영은 쉴레이만을 검색하면서 두세 문장으로 남아 있던 링크 정보에서 읽은 내용을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
“…….”
“그럼, 여기 와서 40년을 살았으니 270년 정도를 거꾸로 거슬러 온 셈이군요. 혹시 테살로니키는 어떤가요?”
자신의 고향이라 했는데, 말속에 여러 가지 함축된 질문이 들어 있겠지.
그런데 270년을 거슬러 왔다면, 1,530년에서 이 시대로 날아왔다는 말이네.
“그리스의 도시이고,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꽤 잘사는, 그리고 평화로운 곳이오.”
“최 단주가 살던 그 시대의 테살로니키, 갈 수만 있다면 한번 가 보고 싶군요.”
나도 못 가 봤는데.
태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나이스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흘렀다.
아나이스의 주장대로라면, 그녀의 나이는 이제 66세쯤 되었을 것이다.
얼굴과 신체는 20대 중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라일리와 같은 운명으로 본다면 아무리 젊음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그녀 역시 생존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다만, 라일리는 평균 수명이 거의 1백 세에 근접한 시대에 살았고, 첨단의 선진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나이스는 평균 수명이 60을 넘기지 못하던 시대에 살았으니, 그 기준이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그 시대의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살았다.
그러니, 그녀는 이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나이였다.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혼자, 이곳으로 온 것입니까?”
한참의 침묵, 그리고 조금씩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에 태영이 케네스에게 물었다.
“세 사람이 왔습니다. 도착 하자마자 과다 출혈로 동료 한 명이 숨을 거두었고, 한 달 전에 내 상관이 죽었습니다.”
이쪽으로 오기 전, 쫓기는 중이었다고 했다.
탄약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졌고, 몸은 기진맥진해서 탄약이 떨어지자 총도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치고 있었다고 했다.
“부상이 심했던 모양이군요.”
“그것도 있지만…….”
말을 맺지 않고 아나이스를 쳐다보았다.
아나이스가 케네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영을 향했다.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이 있어서, 혹시 최 단주께서 도움을 줄 수 있으신지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케네스 씨는 올해 22세입니다.”
아나이스가 케네스의 나이를 대신 말했다.
“네?”
태영은 케네스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저 모습이 22세라고?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