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23
123. 제주의 왜적(1)
함교에 있던 신도익이 다다닥 발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고, 뒤이어 누군가가 힘차게 대답하더니, 돛대에 만들어진 관측소를 오르고 있었다.
“대장님, 아무래도 전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네, 쌍안경으로 살펴본 바로는 산불이 아니고, 봄철에 들을 태우는 불도 아닙니다.”
“혹시 또 왜구 놈들 아냐?”
“내전이 아니라면,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주에서 내전이 일어날 일이 없잖아? 전투 준비시켜. 그리고 다 죽이지 말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은 가능하면 사로잡아.”
“네, 잡아서 어디에서 공격해 온 놈들인지 꼭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처절하게 복수해 줘야지.”
“알겠습니다. 충성!”
신도익이 경례를 하고는 돌아서서 갑판을 달리며 호각을 불어 병사들을 불렀다.
“대장님, 저기 위치는 표선입니다. 서귀포의 동쪽인데 사람이 아주 많이 사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때, 눈이가 함교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신도익의 호각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시대에도 서귀포와 표선이라는 지명을 사용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이는 21세기에서 가져온 지도를 기준으로 지명을 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어차피 눈이가 현지의 지명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제주 하면 한라산과 백록담, 제주시와 서귀포, 성산 일출봉 그리고 중문 관광 단지 같은 지명은 기억이 나는데 표선이라는 지명은 기억이 안 난다.
한 번도 제주를 가 본 적이 없으니 뭐 당연하지만, 그리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관찰을 좀 해 보자고.”
“네.”
“신 대위는 전투 준비시키고 함교로 올라와.”
“네, 대장님.”
태영은 대장 1호 선실로 정하연과 함께 올라가서는 테르를 들고 함교로 이동하여 상황판 위에 테르를 펼쳤다.
니펜트와 드론 4기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테르의 3차원 영상을 띄우고는 니펜트와 연결했다.
니펜트의 이동 속도가 드론보다 훨씬 빠르기에 니펜트가 먼저 육지에 도착했다.
바다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고 항아리처럼 들어간 백사장의 뒤편인 서쪽으로 마을이 무척이나 크게 형성되어 있고, 마을 주변으로 넓게 들판이 형성되어 있는데, 연기는 그 마을의 여러 곳에서 나고 있었다.
지리상으로 보면 바다를 끼고 있고, 넓은 농토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인데, 태영이 알기로는 벼농사가 안 된다.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배웠다.
니펜트와 드론이 보내 주는 지상의 상황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수백 명은 되어 보일 정도로 많은 왜군들이 온 마을에 펴져서 양민들을 산발적으로 공격하고 있었고, 수많은 제주 사람들의 시신이 마을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시피 했다.
한쪽에서는 관군들로 보이는 복장의 병사들과 왜군들이 대치한 상태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충 보기에 개개인의 무력은 양측이 비슷해 보이지만, 숫자가 왜구들이 훨씬 더 많았기에 관군들이 밀리고 있었다.
영상이 보여 주는 중에도 관군들이 왜군의 칼에 찔려 넘어지고 있었고, 칼에 찔려 넘어진 관군의 몸에 계속해서 칼과 창이 박히고 있었다.
참혹하다.
“저, 개놈들이.”
잔디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분노에 찬 욕을 내뱉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고, 당장 바다를 가로질러 뛰어갈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니펜트의 무기가 고장 나지 않아서 이런 때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번의 전투에서도 그 생각을 했지만, 아마 앞으로도 이 부분은 계속해서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함장님, 저기까지 남은 거리가 12킬로입니다. 저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정하연이 태블릿을 쳐다보고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송복기에게 물었다.
송복기는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어찌 아세요, 하는 표정이 잠시 있었지만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지금이 시속 20킬로로 가고 있어서, 남은 거리가 12킬로이면 40분쯤 걸립니다.”
“조금 더 빨리 갈 수 없나요?”
“속도를 높여 보겠습니다만, 해룡호에 실린 짐의 무게 때문에 속도를 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송복기는 대답을 하면서 기관실로 연결된 파이프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비서실 직원들, 송복기를 비롯해서 항해사까지 테르에서 보여 주는 영상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숫자가 많지 않은 관군과 대치중인 왜구들이 보였다.
니펜트가 그곳을 떠나 이동한 곳에 왜구가 양민의 집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꺼내 가려는 것을 막는 집 주인을 칼로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너덧 살로 보이는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음을 토해 냈고, 왜구가 아이의 머리를 발로 차는 모습이 이어졌다.
“저, 저, 개새끼들은 그냥.”
잔디가 총을 들어 올리며 장전을 했다.
그러나 이곳은 해룡호의 함교이고 아직도 해안까지는 30분 이상을 가야 한다.
거기다가, 육지에 상륙하기 위해 전마선에 옮겨 타서 노를 저어 가야 하고, 다시 해안에서 1Km 이상 떨어진 저 현장까지 달려가야 한다.
아무리 빨리 가도 1시간 이상 걸릴 텐데, 테르의 영상은 무정하게도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 계속해서 보이고 있었다.
“흐윽, 함장님 빨리 좀 가요, 제발, 흐으윽, 저러다 다 죽겠어요.”
발을 동동 구르던 눈이가 결국 눈물과 함께 울음을 토해 냈다.
“그래, 그래, 나도 빨리 가고 싶다. 눈아.”
송복기마저 눈을 훔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림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더니, 결국은 테르의 영상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잔디가 함교를 빠져나갔다.
타다다당~
탕, 타당~
총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화를 못 이겨서 허공에다 대고 쏜 것 같다.
경련처럼 팔딱거리던 아이의 모습은 이제 그런 팔딱거리는 모습조차 없는 걸 보니 죽은 듯하다.
어른들이 힘이 없어 지켜 주지 못한 또 하나의 어린 생명이 그렇게 갔다.
아이의 죽음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빨을 앙다물고 주먹을 쥔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몇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울음을 참고 있는데, 3차원 영상으로 보여준 그 모습은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다.
안 보여 주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을.
태영은 괜히 자책하며 고개를 돌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주로 시선을 주었다. 몸에서 열이 확 끓어올랐다.
“이, 개새끼들, 이이이 개새끼들, 이 개새끼들.”
태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 번을 중얼거렸다.
갑판으로 시선을 돌리자 태영의 눈에, 신도익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두고 대응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고, 병사 두 명과 정규하가 대차에서 총탄과 탄창을 꺼내 지급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규하의 어깨에도 기관단총 한 정이 걸려 있었다.
대산도에 머무는 기간 중에 신도익에게 총기 사용 훈련을 받으라고 했기에 지금은 총기 사용에 익숙해졌다.
한쪽에서는 전마선을 내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등에 정하연의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 돌려 바라본 정하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기줄기 흘러 온 얼굴을 적시고 있고 입은 앙다물고 있었다.
태영도 안다. 그 아픔을.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비서실 여군들.
사포와 율촌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들에게 잡혀서 손을 묶인 채 끌려가던 스물여섯 명의 여인들 중에 있었다.
그 여인들의 대부분은 부모 형제들 중에 일부를 왜구에게 잃었고, 지금 비서실의 셋은 그때, 고아가 되어 버린 여인들이다.
그때 잡혀가던 스물여섯 중에 한 명을 제외하고 스물다섯이 모두 여군이 되었다.
그만큼 왜구와 왜국에 대한 원한이 높은 여인들인데, 그 중에서도 저 셋은 친자매처럼 지내지만, 왜구와 왜국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다.
비서실 병사들은 전투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보조 전투원으로서 지원을 위주로 하지만, 이 셋은 돌개몰이나 달구곶에 갔을 때도 와카마쓰나 후쿠오카에 갔을 때도, 정말 극악스럽게 왜병들을 죽이고 다녔다.
“그래, 그래. 모조리 죽여 주마, 모조리.”
다시 함교에 들어온 잔디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목소리에 들어 있는 분노는 왜구들을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다.
대체 왜구들은 왜 저리도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역사를 배웠고, 배운 역사 속에 왜구에 대한 부분이 꽤 많이 언급되었어도 이런 처절한 이야기는 없었다.
대학 입시를 위한 역사 공부 정도에서 왜구들의 침략과 약탈에 대해 그리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이라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영상은 현실이다. 그에 반해 역사 속에 기록된 내용, 그것은 기록이며 활자일 뿐이다.
현실과 기록 상의 차이가 주는 감정의 괴리감이 너무 크다.
그러고 보니,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이유 중에 왜구의 침략도 한몫을 했다는 부분은, 교과서가 아니라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있다.
사포에 도착하면, 비록 테르가 링크를 위한 많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지만, 그것들을 종합해서 왜구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을 종합해 보고 일본에 대한 대응 방향을 달리한다.
불과 얼마 전에 정했던 생각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 그 정도의 대응을 하는 것은 너무 안일하다.
“그래 그게 맞아.”
“네?”
입을 앙다물었는데 태영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정하연이 물었다.
“아니, 아니야. 생각할 게 있어서.”
태영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제주 땅을 바라보았다.
표선의 상황이 아주 나쁜데도 불구하고, 바다 위에서 보는 제주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공해가 거의 없는 이 시대의 청명한 날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한라산 주변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린 제주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고, 저놈들을 해치우러 가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느긋하게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면서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초조하다.
해룡호가 차츰차츰 해안과 가까워지면서 우측으로는 아주 낮은 언덕이 있고, 좌측에는 들판을 건너 마을이 보이는데, 들판 너머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언덕 우측으로 돌면 백사장이 있어. 그쪽으로 가야 전마선에서 육지로 상륙이 쉬울 테니 그쪽으로 돌려.”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태영의 말에 송복기가 방향을 틀었다.
태영이 갑판으로 내려가자 비서실 병사들이 우르르 따라 내려왔고, 신도익은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가서 정리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병사들 데리고 오도록 해.”
해룡호가 정선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 나갈 때 태영은 신도익에게 지시했다.
“네, 대장님.”
“내 움직임을 보면서 상황 전달 해 주고.”
태영은 고개를 돌려 정하연에게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다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 태블릿은 눈이와 정규하가 들었지?”
“네.”
태영도 주머니에 태블릿을 하나 넣었다.
태블릿은 이미 각각의 드론이 연결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눈이는 정하연의 옆에서, 정규하는 신도익의 옆에서 태블릿을 보며 상황과 정보 전달을 할 것이다.
해안의 백사장에는 무려 여덟 척이나 되는 왜선이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들도 배가 정박하기 쉬운 쪽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왜선에는 왜구들 중에 일부가 남아 있는 듯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놈들부터 잡아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전마선이 내려지자 태영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1소대의 병사 한 명만 태우고는 노를 저어 갔다.
전마선이 많지 않기에 병사들을 싣고 오기 위해 다시 해룡호로 노를 저어갈 사람이 필요해서 그나마 태운 것이다.
“왜선이 있는 곳으로 가자.”
“네, 대장님.”
전마선은 빠르게 해안으로 나아갔고, 왜선과의 거리가 20미터쯤 남았을 때 몸을 일으켰다.
“대장님,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돌아가서 다른 사람 태우고 오는데 집중해.”
“네, 알겠습니다.”
“꽉 잡아. 내가 뛰면 전마선이 많이 출렁거리면서 뒤로 확 밀릴 거야.”
태영은 병사가 전마선의 좌우 뱃전을 연결하는 받침을 꽉 붙잡는 것을 보고, 왜선과 10미터쯤 남은 상태에서 몸을 날렸다.
세상이 느려지고 전마선이 거세게 출렁거리며 뒤로 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쿵~
왜선의 갑판에 착지하여 돌아보니 병사의 느려진 놀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으나, 전마선이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흔들리는 정도에서 안전한 것을 보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소도를 뽑아 들었다.
태영의 속도가 워낙 빠르기에, 혼자 움직일 때는 굳이 총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8척의 왜선을 뒤지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 왜선마다 두세 명의 왜구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방비도 없었지만, 방비가 있다고 한들 태영의 공격을 막을 수도 없고, 속도를 줄이지 못한다.
왜선 모두를 돌면서 왜구들의 목을 잘랐다.
비명은 없었고, 쇳소리도 없다. 간혹 태영이 붙잡고 도는 빠른 속도로 인한 힘을 이기지 못해, 배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의 나무들이 뿌지직 소리를 내며 뜯어졌지만 그것뿐이었다.
태영이 마무리를 하고 갑판 위로 올라서면서 해룡호를 쳐다봤을 때도 태영을 태우고 온 전마선은 해룡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왜선의 뱃머리에서 백사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이 백사장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발을 부지런히 놀렸지만, 착지할 때는 발목이 쑥 들어갔다.
태영은 그대로 마을을 향해 달렸다.
파바바박~
태영이 달려가자 돌을 주워다 쌓은 담벼락 위에 얹힌 작은 돌들이 태영이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는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담 너머로 날렸다.
백사장에서 마을까지는 밭의 가장자리에 돌담이 낮게 쌓여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마을에서 그렇게 달리자 집 안으로 돌이 날려갔다.
왜구들이 들어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서 입은 피해도 있는데, 태영이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 같아 속도를 낮추면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장난하듯 느릿느릿 칼을 돌리며 움직이는 왜구의 목을 날리면서 다음 집, 다음 집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집집을 지나며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처참했다.
“이 개새끼들.”
욕이 절로 나왔다.
“이 개놈들은 하나같이 다 왜 이럴까?”
벌건 대낮이건 아니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틈만 나면 여자를 겁탈하려는 이놈들의 머릿속을 정말 해부해 보고 싶다.
태영은 그대로 발길을 멈추고 담을 넘어서 그 남자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な…….”
뭐라고 고함을 치려고 하는데 소도로 입의 좌우를 꿰뚫어 버렸다.
죽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손을 잘랐다.
양쪽 발목의 아킬레스를 자르는 사이에 잘린 손목에서 피가 튀어 옷에 뿌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놈의 몸을 뒤집으며, 여전히 힘을 받아 발딱 서 있는 양물을 소도로 날려 버렸다. 쉽게 죽여 버리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크다.
이 정도 상처라면 과출혈로 빨리 죽지는 않을 것이고, 전혀 힘을 쓸 수도 없다.
“으아아.”
볼이 찢어졌으니 말이 나오지 못한다.
“이놈을 곱게 죽이지는 말고, 알아서 하세요.”
말하면서 바라보니, 주먹에 맞은 얼굴 한쪽이 퉁퉁 부어 있기는 해도 예쁜 얼굴이다. 그러니 이렇게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리라.
고개를 돌려보니 담벼락과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아이 둘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흙먼지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 있다.
하나, 저들을 위로하고 달래 줄 시간은 없다. 또 어느 곳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니.
생각은 관군들과 왜군이 대치 중인 곳으로 먼저 가야 하는 것이 맞는데, 비정하긴 해도 그들은 양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생각이 되지만, 양민들은 왜군에게 대항할 능력조차 없으니 양민들이 우선이었다.
그 집을 벗어나면서 주머니의 태블릿을 꺼내 켰다. 무언가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눈이에게서 온 메시지다.
“이런 상종 못 할 새끼들.”
태블릿을 집어넣으며 바로 눈이가 알려 준 집으로 내달렸고, 몇 초 걸리지 않아서 그 집에 당도했다.
제주의 전형적인 형태의 집이지만, 제법 잘사는 집인지 마당도 넓고, 담으로 둘러쳐진 안쪽에 꽤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
아직 초봄이어서 제주의 칼바람에 살이 떨리게 추운데, 발가벗겨져서 서 있는 여인 일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왜구 한 놈이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을 들고 한 여인의 가슴에 칼끝을 대고 있었다.
둘이 마당에 쓰러져 있는데 주위로 피가 흥건하게 흐른 것으로 보아 과다출혈로 곧 사망할 것 같은 상태다. 의무병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도 살려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뒤쪽에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 여섯이 더 보였다.
모두 다 서 있는 여인들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 그들 중의 몇은 이미 절명한 듯하고, 일부는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봐서 아직은 살아 있었다.
다른 한쪽에 남자들 십여 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이 꿇려져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고, 그 뒤쪽과 좌우로 왜구 열 명이 칼을 들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