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30
130. 제비골의 인연(3)
그 맑은 눈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소인이 있어 불편하시면 소인이 나리에게 청을 더 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하시면, 오늘 하루를 이곳에 머물고 내일 떠나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루 더 있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
이 아이는 조금 전에 아버지를 잃어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이 가슴에 내려앉아 있을 터인데, 매정하게 떠난다 말하기가 곤란해졌다.
“그래, 그리하자.”
잠시 생각을 해 보았지만, 사위가 제법 어두워지기도 했기에, 그것까지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
그걸 거절하면 아이가 너무 불쌍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도 아니 드셨는데, 먹을 것을 조금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래, 그리해라.”
태영의 말에 서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영은 아까 영상을 보기 위해 앉았던, 장작을 패기 위해 마련해 둔 듯한 나뭇등걸에 앉아 태블릿을 꺼내 정하연에게 이 상황을 알려 주었다.
잘했단다.
혼자 남게 된 아이가 얼마나 무서울 것이냐며, 아무리 걸음이 바빠도 그 상황에서는 아이를 위로해 주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를 걱정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예쁘다.
아이의 부름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어두워진 실내를 그을음이 많이 나는 종지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냄새와 연기로 보아 아무래도 기름이 아닌, 송진을 개고 다져서 거기에 심지를 끼워 넣고 불을 붙여 밝히는 모양이다.
이곳이 궁벽한 산골이긴 해도, 이 정도라면 가난에 짓눌려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거기에 비한다면 아이의 행동거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태영은 무심히 고개를 들어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서책?
이 산골 벽촌에 서책이라?
글을 안다는 소리다.
아이의 행동거지와 말투에서 배운 티가 났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다섯 권이 벽에 바짝 붙은 작은 탁자에 쌓여 있듯 가지런히 있었다.
그래도 떠나야 할 몸이니, 신경을 끄자 하고 고개를 돌렸다.
작은 소반 위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데, 불빛이 어둡다.
“춥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도록 하자.”
“네, 나리.”
아이를 따라 밖으로 나와서 아이가 들고 따라온 소반 위를 보니, 나무로 깎은 쟁반 위에 먹을 것이 있는데, 쌀이나 보리로 된 것이 아닌 듯 시커먼 모습으로 봐서 도토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은데, 도토리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봄인데 도토리가 있을 리가 없으니 지난해 가을에 주워다가 보관해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현대 사회에서야 도토리묵을 입맛으로 먹는 것인데, 이 아이의 집에서는 생계를 위해 먹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태영에게 감사를 표하며 내놓는 수준이 이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가난하게 살면 이렇게 살까 싶다.
그런데도 배상을 받아 주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했다. 대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저히 저것만으로는 먹지 못할 듯싶었다. 사포에서는 아무도 저렇게 먹고 살지 않는다.
아니, 저 밥상에 비교하면 초호화판 식단일 터였다.
“잠깐 기다리거라.”
아까, 이곳으로 올 때 순간적으로 건너긴 했지만, 강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보였었다.
민물 생선은 구워 먹기만 하면, 영양이 풍부한 양질의 단백질이다.
태영이 강가로 내려가 물고기들을 잡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죽옷을 벗고, 물고기를 잡은 후에 삼베옷을 입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이름은 모르지만 팔뚝만 한 물고기 열 마리쯤 잡아 강 옆의 수초에 꿰어서 집으로 와, 숯불을 만들려고 보니 장작더미가 쌓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 달랑 몇 개만 남아 있다.
저걸로는 생선을 다 구울 수도 없을 듯했다.
“나무를 좀 해 오마.”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몇 개 남아 있는 마른 장작 위에 생선을 얹어 두고는 산으로 올라갔다.
어둑어둑 했지만, 산에는 마른 나무들이 제법 있었다.
아직은 초봄인 데다, 여기는 산골이라서 밤에는 한기가 들 정도로 추우니, 당분간은 불을 지펴야 하는데, 집에 남자가 없어 여자의 몸인 저 아이가 나무를 하러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왕 준비하는 김에 땔감을 좀 여유 있게 준비해 주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지만, 이미 해가 넘어가서 제법 어두워지고 있으니 많이 해가지는 못할 것 같다.
죽어서 말라 있는 큰 나무 두 개를 잘라 냈다. 이 정도면 열흘은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양쪽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는 산을 내려가니, 아이는 생선 비늘을 쳐내고 내장을 꺼내 다듬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날씨가 싸늘해져서 생선을 다듬는 아이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둡고 냄새가 나긴 해도 실내가 한기가 덜한데, 괜히 밖으로 나오자고 한 것인가?
태영은 태블릿을 꺼내 켜고는, 스크린 사이즈를 키워서 백색의 밝은 배경으로 바꾼 뒤, 지게를 세우고 거기에 얹어 세웠다.
태블릿의 빛이 저 정도이면 전등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아이는 신기한 듯이 태블릿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태영을 잠깐 쳐다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는 않았다.
나무에 불을 붙이고 타오르기 시작하자, 추위로 인해 몸을 떨던 아이의 볼에 홍조가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태영은 숯불을 넓게 펴서 그 위에 물고기 네 마리를 올렸다. 그러곤 배낭을 열고, 아까 먹다 남겨 둔 육포 몇조각, 그리고 송편과 소금 통을 꺼냈다.
생선이 익어 가면서 고소한 냄새가 집 마당을 가득 채웠다.
꿀꺽.
아이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든 제대로 먹어 보지 못했다면 익어 가는 생선의 냄새가 얼마나 자극을 할까.
“이거…….”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단지 하나를 들고 나왔는데, 유약도 입히지 않은 작은 독처럼 생긴 질그릇 단지다.
“아버지 것인데, 이제 마실 사람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말을 끝까지 맺지 않는다.
***
밝은 빛이 유일하게 창호지가 발린 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나마 창호지가 발린 곳이어서 제법 환했다.
머리가 약간 멍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불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런데 품 안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반쯤 몸을 일으킨 서윤의 모습이 보였다.
“응?”
이불이 반쯤 벗겨진 아이의 어깨가 맨살이다. 그리고 왜 품 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거지?
이게 뭐야?
이거 꿈이 아니었다는, 정하연이 아니었다는 소리야?
어젯밤에 이 쪽구들에 이부자리를 펴 주고 나간 아이가, 어찌 지금 내 품에서 벗어나고 있는 거야?
고려 시대의 원룸인 움집이다 보니, 잠을 자는 곳이 쪽구들의 위치가 달라도 한 방에 놓인 다른 침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구조이다.
그래도 태영과 서윤의 쪽구들 자리는 솥단지를 걸어 둔 아궁이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정하연이 아닌, 저 아이가 태영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느냐고?
생선을 구워 먹을 때, 아버지가 종종 먹는다는 머루주를 단지째 들고 왔었다.
이제 아버지가 안 계셔서 먹을 사람이 없으니 은인께서 드시고 가시면 좋겠다고 했었고, 머루주는 생각보다 괜찮았었다.
의도치 않게 하루의 일과가 참으로 다사다난하기도 했고, 마음도 그래서 꽤 여러 잔을 마시긴 했다.
사포에서 종종 막걸리는 마시고 있지만, 이렇게 제대로 맛을 내는 과일주는 이 시대로 와서는 처음이이기도 했다.
약간의 술기운은 느꼈지만, 잠결에 품 안을 파고들어 온 정하연의 매끈하고 부드러운 어깨가 만져졌었다.
자리는 따뜻했고, 정하연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가 태영의 코를 자극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이 태영의 촉각을 자극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랑해, 사랑해 그렇게 속삭이며, 정하연과 뜨거운 격정의 밤을 보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기운은 맞다. 머루주가 제법 사람을 취하게 만든 것 같다.
그렇지만, 태영의 기억 속에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사람은 분명 정하연이었다.
그런데? 서윤이 태영의 품에서 벗어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불을 빠져나가려는 서윤을 보며 이불을 조금, 아주 조금 끌어내렸다.
그 움직임에 드러나는 작은 어깨.
그리고 그 아래로 눈에 들어오는 저 모습은 분명 벗은 서윤의 가슴이었다.
봄 햇살 때문인지, 산에서 부는 바람 때문인지 아이의 얼굴은 햇볕에 탄 모습이었지만, 이불 사이로 살짝 드러나 태영의 눈에 보이는 아이의 몸은 백옥처럼 희었다.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꿈속 같은 그 기억이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손을 이불 아래로 집어넣고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아이는 마치 동작 그만 소리를 외친 듯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하는 듯 가만히 있지만, 몸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허리, 엉덩이까지 분명히 맨살이었다.
태영의 손이 지나갈 때, 깜짝 놀란 듯 몸이 파닥거리는 느낌으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 같다.
엉덩이 아래 허벅지까지 손이 내려갔는데, 계속해서 맨살이 손끝에 잡히니 태영이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었다.
이불을 살짝 들치고 보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태영의 몸이,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하얗게 빛이 나는 서윤의 몸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보니, 여전히 동작 그만의 자세를 하고 있는 서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모습이었지만, 태영의 얼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아이, 서윤이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태영이 잠을 깬 모양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 아이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분명히 정하연이었는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태영이 몸을 일으키자 서윤이 먼저 몸을 빼내어서 이불 저쪽으로 몸을 기울여 옷을 찾아왔고, 몸에 걸쳤다.
어제 입었던 다 해진 옷 대신에 조금은 깨끗한 옷이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태영의 옷을 찾아 아무 말 없이 넘겨주었다.
그러곤 아이는 앉은 채로 몸을 옆으로 돌려 고개를 깊이 숙인 후 쪽구들을 내려서더니 그 위를 가리는 가리개로 가려 주었다.
하. 대체 왜?
태영은 아이, 서윤이 넘겨주었던 옷을 입기 위해 이불을 좀 더 걷어 내었다.
그렇게 걷어 내진 이부자리 위에 남겨진 선명한 흔적.
그리도 많은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 못된 놈들에게 몸을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여인의 정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조선 시대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태영은 재빨리 이불을 다시 덮었다.
그리고 멍하니, 아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정하연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지?
그리고 저 아이에게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온다.
정하연이 비록 이 부인을 들이세요, 까지 말을 했지만, 그 대상이 분명하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1세기를 살아온 태영의 기준으론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태영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러고 있을 수가 없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쪽구들 아래로 발을 내렸다.
쪽구들 아래에는 태영의 신발인 가죽 군화가 가지런히 놓였다.
아까 내려갈 때 정돈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어젯밤에 저렇게 놓았다는 말인데, 아까 옷을 건네줄 때 보니 옷 또한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던 것 같다.
문이 열리더니 어제 보았던, 통나무를 깎아서 속을 파낸 작은 통을 들고 들어오는데 물이 찰랑찰랑거린다.
그 모습이 꼭 쏟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세면 물이옵니다.”
쪽구들에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될 만한 거리에 물통을 놓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하는 말이다.
어제, 저 아이가 수발을 하겠다 하였지만, 분명 거절하였는데.
열어 둔 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아이의 몸을 비추고 있는데, 그 햇살에 비친 얼굴이 깨끗했다. 땟국이 흘러내리던 어제와는 판이한, 마치 사람을 홀릴 것같이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렇지만, 서윤이 예쁘다, 아니다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제, 남자들이 겁탈하려는 와중에 그것을 막으려 하다가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무리 자신을 구해 주었지만, 이럴 수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여자의 심정은, 아니 이 아이의 심정을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묻는 것이 맞지 않음은 알고 있다. 그래도 연유는 들어 보고 싶다.”
태영은 쪽구들에서 발을 내린 상태이지만, 아직은 가죽 신발에 발도 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리께서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셨고, 소인이 나리를 따라 수발하는 것 또한 아니 된다 하오시니, 달리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이것이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님은 아오나, 소인이 가진 것 중에 유일한 것, 그리고 전부인 것을 대신 드렸사옵니다. 비록 나리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다 하나, 너무 노여워 마옵소서.”
그런 후 서윤은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하. 할 말 없게 만든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신이 가진 전부라는 말이 가슴에 쿵 하는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이러려고 머루주를 먹인 것인가 싶었다.
태영은 신발을 챙겨 신고, 주섬주섬 소지품들을 챙겼다.
그러는 사이에 소반에 먹을 것을 받쳐 든 서윤이 다가왔다.
“아니다. 그냥 가마. 그리고 이것은 너를 줄 테이니 생활에 보태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배낭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은자를 꺼내 소반 위에 얹었다.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해도,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떠나면서 하는 말로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그러나 어찌 데리고 간단 말인가?
은자를 세어서 꺼낸 것이 아니기에 개수가 몇 개나 될지는 모르지만, 대충 사오십 개는 될 것 같다.
이 산골에서 은자로 무언가를 바꿔 쓸 수 있을까, 소용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다. 그런데 줄 것이 은자밖에 없다.
태영의 말을 조금 멍하게 듣고 있던 서윤이 소반을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네, 나리.”
태영이 걸음을 재촉하여 마당을 벗어나려 하자, 서윤이 다가왔다.
“존함만이라도 알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없구나.
하룻밤 풋사랑도 사랑인데,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최태영.”
그렇게만 말하고 마당을 벗어났다.
서윤이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느껴졌고, 무언가 말을 하였는데 마음이 복잡하여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
마을이 자꾸 뒤로 밀려났지만, 마음은 그곳에 두고 온 듯 자꾸 돌아보게 된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함께 가자고 할까?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된다.
데리고 가면 이 사실을 정하연에게 어떻게 말해?
두 아내가 아니라 삼처사첩도 이 시대에서 흉은 아니지만, 태영은 21세기를 살다 온 사람이기에 그것이 정서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
“허.”
탄식 같은 숨이 입에서 배어 나왔다.
저 아이와의 하룻밤이 머루주가 원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이 다였을까?
“목소리.”
다시한번 생각해 봤다.
“그래, 그 목소리 때문이었어. 하아, 바보같이.”
얼굴이 다시 본 적이 없을 만큼 예쁘긴 했어도, 그보다는 그 목소리에 완전히 풀어져서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서시나 양귀비가 얼마나 예쁜지는 모르지만, 이 시대를 기준으로 그 아이가 대륙의 황제들 중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면, 그 아이 또한 한 나라를 흔들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태영이 넘어간 것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도 기억에서 지워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힘없는 발을 터벅터벅 움직이며, 어느 쪽이 개경일까 생각하고는 먼 하늘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으니 가죽옷으로 갈아입고 개경으로 달려야 하는데, 마음 한 자락이 그 아이 곁에 남아 떠날 생각을 않는다.
“그래도 가야지.”
가죽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배낭을 끌러 내리다가 이름을 묻던 모습이 생각났다.
태영이 떠날 때,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서윤의 말과 태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말을 잘 못 들었지만, 그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에서 초탈한 듯한 표정.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
모든 것을 내려놓아?
그리고.
소인이 가진 것 중에 유일한 것, 그리고 전부인 것을 줘?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돌아가야 한다.
시계를 보자 떠나온지 10분이 흘러 있었다.
지금까지는 걸어왔지만, 달려서 되돌아가면 몇십 초도 걸리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자마자 발길을 돌려 달렸다.
파아아아아앙~
가죽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도 무시하고 최대 속도로 달렸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뒤로 밀려나며, 태영이 달려가는 주위로 돌과 흙이 날렸다.
바람에 옷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태영을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서윤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런.”
서윤의 집 옆에 있던 큰 나무의 가지에 줄이 걸려 있고, 그 줄에 목을 건 서윤이 축 늘어진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태영의 눈에 들어왔다.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모습이지만 어찌 모르랴.
이 모든 것이 결국 저런 결정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달리는 중임에도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죽지 말아라.
제발.
너를 데려가지 못해서 미안했다.
비록 몸은 떠나려고 했지만 마음 한 자락이 떠나지 못하고 네게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라도 너를 이곳에 두고 가지 않을 테니, 제발 죽지 말아라.
서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