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42
142. 후쿠오카 가는 길(5)
이제 공터에 서 있는 사람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나마 있던 애들은 그사이에 대부분 여자들이 데리고 공터를 벗어났거나,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면서 오줌을 지리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태영이 화살촉을 던져서 죽어 나자빠진 왜구들의 옷을 벗겨 냈다. 그러곤 고려 여인들이 몸을 피해 있는 쪽으로 던졌다. 추가적인 옷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추울 테니, 이걸 걸쳐요.”
혹시 태영도 왜국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어 옷을 던지면서 일부러 말했다.
옷이 칼로 난자되어 발가벗고 있던 여인들에게 자신의 옷을 일부 벗어서 몸을 가리게 해 준 여인들까지 모두 옷이 얇다.
“가, 감사하옵니다. 나리.”
모두들 눈치만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보자 역시 열댓 살 되어 보이는 댕기머리 아이가 있는데, 때가 묻고 찢어지긴 해도 비단옷이다.
서 있는 자세나 태도가 나 좀 배웠소 하는 모습인 데다 입술이 터진 상처 자국이 보이고 얼굴도 한 대 맞은 듯 부어 있는데, 무엇보다 옷 위로 젖가슴의 위치에 피가 많이 배어난 흔적이 보였다.
주위로는 피가 굳었는데, 가운데로는 여전히 굳지 않은 모습인 것을 보니 아직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출혈이 있는 모양이었다.
피가 흐른 자국이 저 정도면 심하게 다친 건데?
거기다가 지금이 계절적으로 아직은 서늘해서 쉽게 곪지 않는다 해도, 주위에 피가 배어 나와 굳은 정도로 봐선 오늘 저녁에 난 상처가 아닌 듯하니, 소독을 하고 치료해야 한다.
고개를 돌려 다른 여인들을 찾아보니 그들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았다.
어깨에 핏자국이 있거나, 팔에 핏자국이 있거나, 종아리를 동여맸거나, 또 머리에 피딱지가 앉은 여인도 있었다.
모두 다 열 서너 살부터 시작해서 스물이 되지 않았을 나이의 어린 여인들이다.
“많이 다친 건가?”
“괜찮사옵니다. 고려 분이 맞으신지요?”
“맞다.”
“다시 한번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답을 하니 다시 감사를 표하면서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서 인사를 한다.
“괜찮다.”
“혹시 열셋쯤 먹은 아이 하나 보지 못하셨는지요?”
“소이?”
“아, 소이를 보셨사옵니까?”
“그래, 무사하니 걱정 말아라. 조금 있다가 네 상처도 좀 보고, 나머지는 그때 이야기하자.”
“네. 나리.”
“すべてきけ.(모두 들어라)”
태영은 일단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크게 소리쳤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주위를 둘러보니, 뭔 소리하느냐는 듯 쳐다보는 놈, 엉거주춤 무릎을 꿇을지 말지 주위의 눈치를 보는 놈, 눈에 독기를 품고 태영을 쳐다보는 놈 등으로 조금씩 다르지만, 절반 정도는 무릎을 꿇었다.
태영의 가까이에 무릎을 꿇지 않은 왜구 다섯, 그 중에 여자 한 명과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아이도 한 명 끼어 있었다.
대도를 꺼냈다. 월광의 빛을 받아 대도의 긴 날이 빛을 반사했다.
미안하지만, 여자와 아이도 시범 케이스에 들어와 있었다.
“즉시 말을 들어먹지 않으면, 바로 그 죄를 묻겠다.”
그 말과 동시에 가까이 있는 다섯의 목을 쳐 버렸다.
으악~ 아아아악~
비명이 난무했다.
“모두 꿇어라.”
고함을 지르고 나서 잠깐 기다렸다.
주춤거리던 대부분이 억지로 몸을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
태영이 난자하고 다녀서 서 있는 왜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없는 상태다.
“지금부터, 이 공터를 떠나는 자가 있으면, 도망친 사람의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은 공동 책임을 지고 같이 죽는다. 여자이건 아이이건 구분하지 않겠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을 도망치지 못하게 해라. 알았나?”
“…….”
당연히 대답이 없는 게 맞지.
“모두 도망친다면, 설마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나 혼자서 여기 모두를 죽였다는 것을 명심해라. 난 너희들이 세상 어디까지 도망가더라도 따라가서 모두 죽일 것이다. 그리고 도망자는 내일 아침 해 뜨기 전에 모두 죽는다.”
“…….”
대부분 공포에 젖어 들었지만, 개중에는 아닌 놈도 있었다.
“얼마든지 도망가도 좋다. 죽고 싶으면.”
이런 경우, 극한의 공포가 사람들을 조여 온다.
태영은 주머니에서 다시 태블릿을 꺼냈다.
그래, 맞아. 그게 그리된 셈이네.
명주와 임안에서의 사건으로 그곳에 동행했던 병사들은 다들 조금씩 알고 있지만, 후쿠오카에 있는 병사들은 본 적이 없다.
3중대이면 신도익 중대다.
“거기.”
태영은 태블릿을 끄고, 비단옷 입은 이를 불렀다.
고려의 여인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서 서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중심에 비단옷 입은 여인이 있었다.
“네, 나리.”
“이름이 뭔가?”
“미설이라 하옵니다.”
“성은?”
“이미설이옵니다.”
역시 이 시대이다 보니, 양반 행세하는 사람은 대부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이다.
“모두 몇 명인가?”
“소이까지 합쳐서 서른둘이옵니다.”
“모두들 고생했다. 그리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어허으으응~ 흐응
태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통곡이 흘러나왔다.
태영은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미설, 네가 앞장서서 대답하는 것을 보니, 네 신분이 여기서 가장 높은 모양이지?”
비단옷 입은 아이가 2명 더 있었다.
그런데 대답은 항상 이미설이 했기에 물었다.
“…….”
이미설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였다.
“모두들 들어라.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울지도 마라. 우리 배가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연락해서 너희를 태우러 배를 한 척 보내라고 했으니, 내일 새벽 동틀 때쯤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아~
다들 입에서 감탄사 비슷하게 나온다.
“보아하니 다들 조금씩의 상처가 있어 보이는데, 의원들도 함께 보내라 했으니 상처 치료는 그때 하도록 하자. 대충 보니 상처가 심한 사람이 세 명쯤 보이는데, 세 사람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으니 잠시 후에 내가 먼저 좀 보기로 하자.”
“…….”
이미설이 뒤를 돌아보는데, 아주 심하게 다친 여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소이 말로는 어제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던데, 여기 이놈들이 먹던 것이라도 먹어서 배를 채워야 몸이 견딜 수 있을 테니, 이제부터 저기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도록 해라.”
공터에는 왜구들이 잔치를 벌이느라 준비된 음식이 넘쳐났다. 하지만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음식이 넘어갈까?
최소한 저 시체들과 무릎 꿇고 앉은 왜구들과 고려 여인들 사이는 무언가로 가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네, 나리. 그리하겠습니다.”
역시 대답은 이미설이 먼저 한다.
“너희들 셋.”
태영은 왜인들 중에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셋을 불러냈다.
“하이.”
“너희는 저기부터 이곳까지 가림막을 치도록.”
왜구의 여인 셋이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 한두 명씩 손을 잡고 움직였는데, 십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들은 공터에 인접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이불이나 옷들을 들고 나왔다.
새끼줄을 치고, 옷을 걸어 고려 여인들과 자신들의 사이에 가림막을 만들었다.
고려 여인들의 얼굴이 조금씩 평안해졌다.
그리고 그들 옆쪽의 탁자들 위에 어지럽게 올려 있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소이는 저기 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가서 데려오마.”
“네, 나리.”
태영은 이미설에게 말하고 대답을 듣기 전에 몸을 일으켜 바로 해안으로 달려갔다.
작은 전마선을 밀어 소이가 남아 있는 배에 도착하자, 아까 그 선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 저기 있던 사람들 다 구했고, 거기서 저녁을 먹고 있으니 너도 가자.”
“나, 나리.”
“왜?”
“소, 소인은 아니 가면 안 되는지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대충 느낌에 왜구 꼬마에게 강간당한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너는 왜구에게서 너를 지키려고 왜구의 목을 조른 것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네, 네.”
깜짝 놀란 얼굴로 태영을 바라보았다.
그게 맞네.
이 시대가 조선 시대가 아니라서 정조는 목숨과도 같이 지켜야 한다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는 사포에서도 율촌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강간당한 것에 대한 자책인 듯했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라. 그리고 내가 너를 제일 먼저 구했지 않느냐? 그렇지?”
“네, 네. 나리.”
“자, 가자.”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나오긴 하는데, 그래도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자, 소이 왔다. 소이는 그 배에 남아 있던 왜구 꼬마 놈 목을 조르고 둘이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옷이 다 찢겨서 급한 대로 이것을 입혔으니까, 제대로 맞는 옷을 다시 좀 찾아 줘.”
미설이 옆에 있는 다른 아이에게 소이를 넘겨주자, 아이 둘이 소이를 당기며 ‘고생했다’, ‘잘 했다’, ‘너는 겁도 없이 왜구와 멱살잡이를 했느냐? 저분 나리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면서 서로서로 걱정 반 책망 반의 말을 하고, 소이는 한참을 서럽게 울다가 눈물을 닦으며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며 말을 받는다.
그래,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사포에서 살겠다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도록 도와주마.
그리고 왜구들에게 마음껏 복수하도록 해 주마.
“소이 말로는 안새미골이 집이라고 하던데, 거긴 어디인가?”
“영선, 영선현이옵니다.”
태영이 질문해 놓고 말이 안 되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솔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한다.
“영선현?”
그런데 영선이 대체 어디야?
지도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지명이 귀에 익숙하지 않으니, 유명한 관광지가 없는 곳인 모양이다.
“네, 나리.”
태영은 태블릿을 꺼내 지도를 연결했다.
톡이 몇 개 와 있었다.
태블릿을 태영이 하나, 김태연이 하나, 해룡호에 대기 중인 유시완이 하나이니 김태연은 거기 남아 있어야 김웅겸과 연락이 가능해진다.
태영은 정하연에게서 온 톡 창을 열었다.
요기까지, 세 줄이 찍혀 있었다.
서윤이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구만.
태영이 답을 하자마자 바로 답신이 날아왔다. 하긴 아직 잘 시간은 아니지.
이런 때를 위해서 영상 채팅을 가르쳐 주었어야 하는데, 사실 그건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다.
서윤이라는 꼬리가 붙은 톡이 날아왔다.
하 참.
두 사람에게 함께 사랑한다고 보내 놓고도 약간은 계면쩍다.
두 여자에게 심장의 반쪽씩 나누어 준 느낌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여태까지는 가슴속에 한 사람만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두 사람이 함께 들어와 있고, 가슴속에 자리한 두 사람의 크기가 각각 전보다 더 커진 것 같다.
마지막 글은 정하연이 쓴 글이다.
그런데 한서윤, 쟤는 왜 서방님이라는 표현을 간혹 써서 사람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드나?
저 말에 묘한 매력이 있는 줄 전에는 몰랐는데, 상당히 매력 있네.
지도를 보려고 태블릿을 꺼냈다가 두 사람과 채팅을 하게 되어 기분이 꽤 나아졌다.
태영은 채팅을 종료하고 지도를 연결해서 안새미골과 외물배미, 그리고 영선을 찾아보았다.
경남 고성. 고성이 이 시절에는 이름이 영선이었구나.
“음, 여기구나.”
혼잣말을 하고는 태블릿을 끄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닥불이 있어도 추울 테니 오늘 밤을 보낼 집이 있어야 하는데, 왜구들의 집은 다들 고만고만해서 한 집에 다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분산시켜 놓을 수도 없고, 한 척 남아 있는 배에 데리고 가기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동트기 전에 배가 올 텐데, 그냥 여기서 시간을 때워?
혼자서 움직였을 때는 이런 문제가 있네.
1개 중대라도 데려왔으면, 일부는 이쪽을 지키고 일부는 수색을 하고 따로 움직여서 대안을 찾으면 되는데, 태영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런 문제만큼은 불편했다.
“이미설.”
“네, 나리.”
“혹시, 사포에 대한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포, 사포. 들어 본 적 없사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는 배가 부른 듯 음식을 깨작거리며 서로 간에 속닥거리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물었다.
“…….”
서로 눈치만 보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모르는 듯하다.
“지난해 봄에, 여기서 오십 리 떨어진 곳에서 고려 여인 예순둘을 구한 적이 있었다.”
모닥불에 사용할 장작과 나무들을 쌓아 둔 곳에서 나무를 집어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