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5
015. 사포의 새 관리(3)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니 꽤 자란 수염이 거칠게 손에 잡혔다.
비누는 다들 쓰던 것이라 비눗갑에 들어 있으니 사용이 편해, 비누를 물에 묻혀 수염을 깎을 부위에 문지르자 또다시 정하연과 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하얀 거품이 나서 그러려니 하고 면도칼을 집어 들고, 면도날이 턱선을 따라 움직이며 사르륵 사르륵 소리를 낸다.
“나, 나리.”
들릴 듯 말 듯, 그러나 조금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 그게.”
“너는 왜 또 그렇게 놀라느냐?”
“아, 아닙니다요.”
“놀라지 말거라. 매일 아침 하던 일이니.”
“그래서 수염이 짧으셨던 모양입니다요.”
“응, 며칠간 못 깎아서 많이 자랐었거든.”
“잠시 동안은 머리가 짧고, 수염이 짧아서 죄를 짓고 잡혀가다가 도망 중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정하연의 말이다.
“그래요? 죄인은 머리를 자르는 모양이지요?”
“네, 중죄인은 머리를 자르게 하옵니다.”
“그럼 중죄인으로 보였을 텐데, 무섭지 않았나요?”
여전히 면도를 하면서 정하연에게 물었다.
“…….”
“그런데, 왜 한때라고 생각했는데요?”
별이는 태영이 들고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작은 손거울을 신기한 물건 보듯이 계속 쳐다보았고, 태영은 별이를 힐끗 보다가 정하연이 대답하기 전에 다시 물었다.
거울이 이 시대에 있었던가, 없었던가?
저 아이가 저렇게 신기해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면도하는 모습은 상당히 흉한데.
입을 이리저리 돌리고 입술을 아래로 위로 움직이면 거울을 쳐다보는 본인도 흉해 보인다.
“소녀들을 구해 주신 분이 나뿐 분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인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는데?”
태영의 대답에 정하연이 미소를 지었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 같았다.
“나리께서 쓰시는 물건들은 모두 다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입니다요.”
태영이 정하연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태영의 가까이에 와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별이의 말이다.
신기하겠지. 이 시대에는 볼 수 없는 물건들인데.
태영이 비누를 손에 비벼 얼굴을 문지르고는 머리까지 감았다.
군에 입대한 후, 머리를 감을 때마다 짧은 머리가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는데, 멋대가리는 없지만 역시 머리 감을 때는 군바리 머리가 최고다.
물로 깨끗이 헹궈 내고 어깨에 걸쳤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사이에 두 사람의 표정 변화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손으로 턱을 만져 보니 역시 매끈한 턱이 만져진다.
이 시대에 왔으니, 신분의 고저를 막론하고 모두 다 수염을 기르기 때문에 태영이 수염을 깎지 않고 그냥 길러도 누가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고, 면도를 하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수염을 기르면 무척이나 번거롭다.
역시 면도하길 잘했어. 다시 가방을 뒤져서 트럭에서 가지고 온 애프터세이브 스킨과 로션을 꺼내 얼굴에 발랐다. 이것을 발라야 면도 후의 얼굴 쪼임이 사라진단 말이지.
“나리, 이게 무슨 냄새인지요?”
별이가 얼굴을 찡그린다.
“별아, 나는 너무 좋은데.”
“아씨 정말요? 소인은 전혀 좋은 줄 모르겠는데요?”
정하연, 넌 뭐니? 수컷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해 주는 현대의 애프터세이브인데 이 냄새가 좋다고?
“이리 주십시오.”
태영이 들고 있는 수건을 향해 정하연이 손을 뻗기에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정하연이 만지작거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별이를 툭 쳤다.
“별아, 이거 만져 봐.”
별이가 태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정하연이 내민 수건을 만져 보는데, 짧은 순간에 표정이 여러 가지로 변한다.
“음메, 뭐가 이리 부드러운 것이 있대요? 이게 대체 뭣인데 이렇게 부드러운가요?”
질문을 하면서 손은 수건을 만지고, 눈은 태영과 정하연을 왔다 갔다 바라봤다.
면인 데다 극세사 수건이니 당연히 부드럽지.
정하연도 여전히 수건을 만지면서 눈은 무언가 설명해 주기를 태영에게 바라는 눈빛이었다.
대답을 어찌해 주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들의 놀라는 모습은 그만 보고, 이제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사포로 이사 가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 순간 태영은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스쳤다. 사포에 가서 호장 일을 하다 보면, 부호장들에게 물어보기에 곤란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얘가 호장인 아버지 곁에서 하는 일을 봐 왔을 테니 그런 것들을 물어보면 어떨까?
어차피 하인으로라도 일하겠다 했으니, 가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면에서 곁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결정했어.
***
별이에게 모두 모이라 시켜 놓고 밖을 나갔을 때는 가솔들이 모여 있었다.
정하연을 따라 하인이 되겠다고 했던 세 아이들도 함께였다.
“자, 전달 사항 있는데, 잘 들어요.”
대중에게는 항상 존대를 하는 습관이 여기서도 나온다.
졸병들을 모아 놓고 교육할 때도 개개인에게는 반말을 하지만, 전체를 향할 때는 존대하던 습관이다.
“사포의 호장이 사포의 양민들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가병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사포에서 왜구에게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죄를 물어 사포 호장을 참형함에 따라,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 당분간 사포의 호장을 대신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가솔들이 사포로 이사를 해야 하니, 그리 알고 준비를 하여 수일 내로 사포로 이사하도록 하세요. 이사를 가더라도 이 집은 계속 사용할 것이니 집 안의 물건들은 그대로 두고 갑니다.”
그럼 여기는 누가 사는 거야?~
고향 떠나는 거 싫은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나이 든 어른들은 조용했다.
사포라고 해 봐야 여기서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곳이니, 고향을 떠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떠나긴 떠나는 거였다.
“낭자는 나하고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정하연에게 그렇게 말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싶어 한번 쳐다 보더니 따라 들어왔다.
멍석 위에 있는 탁자 앞 의자에 가서 앉자 정하연이 맞은편에 다소곳이 서 있다. 얘는 아까 별이랑 왔을 때와는 행동거지가 다르다.
태영은 헬멧을 벗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총을 풀어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러고는 짧게 깎은 머리를 한번 쓸었다. 아마도 헬멧의 끈에 머리가 눌려 머리카락이 이상한 모양일 터였다.
“앉아요.”
말해 놓고 보니 현대식의 말이 나와 버렸다.
앉으시오, 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쉽게 고쳐질 일이 아닌 것 같다.
편할 대로 살아야지, 뭘 고치려고 애를 써?
“아니옵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말 안 들을래?”
약간 언성을 높이자, 깜짝 놀라는 정하연의 표정이 볼 만했다.
정하연은 태영의 언성에 잠시 머뭇거리기는 해도, 놀란 표정을 감추고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그런 식의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긴 할 것이다. 거기다가 갑자기 반말로 명령하듯 했으니 당연하지.
“몇 살이오?”
“열여섯이옵니다.”
열여섯, 어린애구만.
열여섯이면 이제 겨우 중3이고, 중3이면 흔히 하는 속된 말로 핏덩어리잖아?
그런데 이렇게 의젓해?
겨우 중3 정도의 나이가 맞긴 맞는 거야? 대체 뭐야?
그것과는 상관없이 참 예쁘기는 하다. 어쩌면 저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조금도 틀어짐 없이 저렇게 자리할 수가 있나?
예쁘다고 해서 요즘 애들처럼 나 예쁘니 인정해 줘야지 하고 시건방져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태어나고 예쁘게 자랐을까 싶다.
이런 거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해. 누군 예쁘게 태어나서 예쁘게 자라고, 누군 아니란 말이야.
“호장의 딸이 내 집에 하인이 되었다고 하면, 율촌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소? 보아하니 낭자도 글공부 꽤나 한 것 같은데, 이건 글공부와는 상관없이 도리에 대한 부분이니 낭자의 생각을 들어 봅시다.”
“…….”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을 거요?”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놀란 것일까?
움찔하는 느낌이 나더니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흐른다.
지금까지 하는 행동을 봐서 제법 당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못짚었나?
이 정도의 언성에 울기까지 하다니.
“그 점은 소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니고는 달리 아무런 방안이 생각나지 않아서…….”
눈물은 흘렸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럼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봐요.”
태영의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이것저것 몇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단 한 가지였다.
목숨의 구원은 목숨으로밖에 갚을 길이 없는데, 그것을 할 수 없으니 하인이 되어서라도 갚고 싶단다.
참,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니.
이런 식의 발상이 고려 시대라서 가능한 것인가 싶었다.
“내가 사포의 호장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했고, 그것과 맞물려서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네, 나리.”
“사포에서 추밀원의 승선 역할을 할 수 있겠소?”
정하연의 고개가 잠시 흔들리더니 태영을 쳐다보는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가 금방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고려 시대의 추밀원은 중추원이나 밀직사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조선 시대로 따지면 승정원이라는 이름이었다.
황실에서 황제의 비서 역할을 하는 것인데, 요즈음으로 따져도 대통령 비서실 격이다.
그리고 승선이란 직책은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도승지 또는 승지로 변경되기 전의 명칭이다.
“더없는 광영입니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사옵니다.”
“두 가지 문제?”
“네, 첫째는 소녀가 승선이라 칭하기 위해서는 나리께서 나라님이어야 하는데, 이는 여차하면 역모로 몰릴 수가 있습니다.”
역모라고?
이 무슨 벼룩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아니, 말 되네.
승선으로 부르려면 태영이 황제를 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충분히 역모로 몰고 갈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준다는 소리이다.
역사적으로 역모로 몰려서 끝이 좋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니, 그건 모르지.
입시를 위해 국사 공부 좀 했다고 역사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기에 장담은 못 하지만,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피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 추밀원을 알고 승선도 알면서, 그사이에 가장 중요한 문제점도 짚어 내었다고?
거 참, 총기 있네.
“그것은 나리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리라 생각되옵니다.”
“그리고?”
태영은 놀람을 감추고 다시 물었다.
“두 번째는 여인이 관직에 오른 경우가 없어서 부호장들이나 가병들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가 듣게 만들 테니 염려 말고, 승선 역할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소?”
“네, 나리.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확인 절차가 필요해서 물었더니 잘 안단다.
추밀원의 승선의 자리라는 것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긴 했지만, 그 이전에 얘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고민하다가 나온 것인데, 대뜸 알아듣고는 잘 알고 있다고 하고, 문제점까지 짚어 내니, 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하지.”
“어떤?”
“직무는 추밀원의 직무를 하되, 낭자는 추밀원사의 직인데, 사포에서의 명칭은 비서실로 하고, 낭자는 비서실장이오. 알겠소?”
그 역할 그대로 현대식으로 바꾸면 어때. 임명권자 마음이지.
그리고 입에 익지 않은 추밀원이나 승선보다는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들었던 비서실이나 비서실장이라는 말이 훨씬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잖아?
“비서실에 비서실장이라 하셨습니까?”
“맞아요, 비서실장. 그리고 이번에 부모들이 모두 죽어 갈 곳이 없다는 세 사람을 다 비서실에 두고 비서실 직원으로 하면 되고.”
“명 받자옵니다. 다만.”
비서실장이라는 이름으로 추밀원사 직을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지.
“다만?”
“이제 비서실장의 직을 맡았으니, 하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되옵니다.”
“알았어. 지금부터 그렇게 하지.”
사실 어린애 같은데 존대를 하기도 좀 그랬었다. 바로 하대를 하였는데도 놀라기는커녕 환하게 웃는다.
대체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정하연과는 그 이후의 대화에서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하나 있고, 남동생 둘은 개경에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 기거하며 유학 중이라는 것도 알았다.
***
태영은 사포 관아를 시찰하여 현황을 파악하기 이전에 사포의 가병들을 불러 모아 정하연의 직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여기는 율촌의 정인구 호장의 따님인 정하연 낭자이다. 알고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비서실장이라는 직위로 나를 보좌하게 될 것이다. 부호장과 같은 계급이며, 내 명령에 대한 수발을 담당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호칭은 정 실장 또는 비서실장으로 하면 되고, 정 실장이 지정한 세 사람은 비서실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정 실장을 보좌한다, 이상.”
아예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무리 지어 사포의 가병들에게 주지시켰다.
“네, 나리.”
“안내하게. 정 실장도 따라오고.”
“네, 나리.”
신도익이 앞장섰다.
“여긴 곡물 창고입니다.”
앞서 걸음을 옮긴 신도익이 관아를 돌면서 각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했다. 동헌의 왼쪽에 있던 지붕 높은 건물 다섯 개가 모두 창고란다.
“저기 저건?”
“저기는 가병들이 기거하는 곳이고, 바로 옆은 하인들의 처소입니다.”
동헌의 좌측 뒤에 있는 언덕을 올라가 다시 대문으로 들어서면 그 안쪽은 내아(內衙)라고 했는데, 지금은 옥에 갇혀 있는 호장의 가족들이 기거하였던 곳이란다.
엄청 큰 집에 살았군.
그래 봐야 현대 사회에서의 달동네 수준과 비슷하다.
이미 한번 가 본 감옥은 가병들의 집 뒤쪽의 끝에 있었다.
동헌에서 내아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중간 지점에 커다란 집과 조금 작은 집이 기역자로 앉아 있다. 아무런 현판도 없는데, 신도익은 그냥 사랑채로 불렀고, 박한이 기거했던 곳이란다.
관아와는 낮은 담벼락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사랑채와 관아 사이에 대문은 없었다.
“문을 열어 보게.”
곡물 창고라는 말을 듣고 신도익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
“네, 나리.”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대식으로 물건을 운송할 때 쓰는 팔레트처럼 생긴 나무판 위에 가득 쌓인 곡물들이 대충 보아도 어마어마한 양이다.
“담당자와 장부가 있는가?”
“네, 여기 있사옵니다.”
신도익이 허름한 복장의 하인에게서 책자처럼 생긴 것을 건네받아 두 손으로 공손하게 태영에게 내밀었다.
복장으로 봤을 땐 하인이 분명한데 장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은 글을 안다는 소리였다.
하인을 쳐다보았다.
뭐야? 공부를 제법 한 눈빛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