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74
174. 꺼지지 않는 불꽃(5)
새벽에 시작한 나가사키 정벌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끝이 났다.
1호청의 마당에는 나가사키의 영주로 생각되는 자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호구 조사가 끝나서 별도로 분류되어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줄지어 꿇어앉아 있고, 이곳 1호청을 지키던 왜구들도 모두 꿇어앉았다.
태영은 병사들이 실내에 있던 의자 몇 개를 꺼내서 정리해 주자 그곳에 한서윤, 신도익과 비서실 병사들과 함께 앉아서 포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1개 소대만 왜구들을 감시하고 있고, 나머지는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나무로 대충 만든 의자에 앉거나 그냥 바닥에 앉아 있기도 했다.
“연대장님 오십니다.”
발딱 일어서서 소리치는 장호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하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사포의 병사들과 제주 표선의 참관단들, 그리고 왜구 포로들이 묶여서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와 병사들이 참관단을 한곳으로 인솔하여 세우고, 일부는 왜구들의 포로들을 1호청 포로들이 꿇어앉은 뒤쪽에 줄지어 꿇어앉혔다.
“충성! 임무 완료했습니다.”
김웅겸이 태영의 앞으로 와서 복명했다.
“충성! 고생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쪽 상황은 어때?”
“오규보.”
태영의 질문에 김웅겸이 비서병인 오규보를 부르자, 쪽지를 김웅겸에게 주었다.
“1병영의 병사와 보조 인력들을 합쳐서 1,136명이 있었고, 그중 695명이 사망, 125명이 중상, 경상자가 152명, 나머지 163명은 상처가 없습니다. 중상자 중 절반은 오늘을 넘길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웅겸은 쪽지에 적힌 전투 결과를 보고했다.
많이 죽었네.
“중상자, 경상자는 모두 창고에 가두고 경상자들이 중상자를 돌보도록 지시했습니다. 우리 1개 소대가 감시하고 있습니다. 2병영과 3병영은 각각 545명과 430명이 있었습니다. 양쪽 합쳐 975명인데 그 중에 522명 사망, 163명 중상, 135명 경상, 155명만 이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역시 감방에 가두고 경상자가 중상자를 돌보도록 했는데, 그곳 역시 절반은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도 정말 많이 죽었네.
김웅겸의 보고를 들으면서 백색 탄의 위력이 정말 대단했음을 느낀다.
사실상 백색 탄으로 섬멸 지경까지 공격한 후, 그냥 생존자 처리만 하면 되는 전투의 유형이었다.
“그래, 알았어.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이쪽 상황 보고해 줘.”
“넵. 이곳은 총원 346명, 사망 35명, 중상 89명, 경상 94명, 나머지 포로 128명입니다.”
태영의 지시에 신도익이 김웅겸에게 1호청 상황을 보고했다.
“어, 여긴 사망자가 많지 않네?”
“네, 도주하던 놈들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부실장님이 모조리 쓸어버려서 사상자가 많지 않습니다.”
“부실장님 혼자?”
김웅겸이 복명할 때 잠시 일어섰다가 다시 의자에 앉은 한서윤을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
“네, 거의. 사실상 부실장님이 공격을 하기 시작하니까 이놈들이 전투 의지가 사라져 일찍 항복해 버리는 바람에 많이 죽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는 신도익이 웃었다.
MLRS 수준으로 때리면서 조금 힘이 들어서 잠시 쉬긴 했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어서 저렇게 앉아 한서윤이 무료하다고 했었다.
장호와 유진이는 1호청 연병장에 있던 나무 의자 몇 개를 가져다 한서윤의 뒤쪽에 놓았고, 잔디와 나머지 비서실 병사들은 제주 표선 참관단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스오 데려왔지?”
“네, 저기.”
태영의 질문에 손을 들어 가리키는 김웅겸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제주를 약탈했던 무리의 두목 야스오는 십자가처럼 만들어진 형틀에 묶여서 별도로 꿇어앉아 있다.
작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든 형구에 머리와 목, 허리의 세 곳이 묶였고, 양 손목을 가로로 걸쳐진 나무에 묶은 후 엉덩이 부분에서 끝나는 나무의 하단에 줄을 매어 발목을 묶은 상태였다.
머리도 팔도 허리도 자유스럽지 못하고 오직 다리만 비교적 자유스러워 걸을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도 발목에서 허리로 연결된 줄로 인해 뛸 수도 없다.
그 상태로 무리의 뒤에 꿇어앉혀 있다.
조금 전 태영의 입에서 야스오라는 말이 나왔을 때,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고 있던 나가사키 영주의 얼굴이 잠시 들려지는 것을 태영은 이미 보았다.
지금까지 고려 말로 말하고 있기에 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를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이나누시〔大名主〕.”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로 고개를 든 야스오가 영주를 향해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응?
근데, 왜 다이묘라고 하지 않고, 다이나누시라 부르는 거지?
방금 다이나누시라고 부르는 소리에 다이묘〔大名〕나 소묘〔小名〕라고 부른다고 했던 것이 얼핏 생각났는데, 다이묘가 아니고 나이나누시란 말이지?
일본의 역사를 배울 일이 없고, 일본의 관직 또한 신경 쓰고 사는 일이 없었으니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살아 있었구나.”
허, 참.
기가 막힌 부자 상봉이긴 하다.
꿇어앉은 영주의 눈가에 잠시 눈물이 어리는 것 같은 것은 혼자만의 착각인가?
하긴,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아비는 아비다.
몰골은 너무나 처참하여 사람의 몰골이 아니고, 저놈이 제주를 약탈하던 때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소식이 궁금하여 누군가를 보내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살아서 돌아온 것이리라.
“잔디.”
“네, 대장님.”
태영의 부름에 잔디가 재빨리 일어섰다.
“아까 준 것 있지?”
“네, 여기 있습니다.”
잔디의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망태가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대장, 저기 야스오 이리 끌고 와서 마주 보게 꿇어앉혀라.”
“네, 대장님. 거기 야스오 이리 데리고 와라.”
신도익은 명령을 받자마자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대대장, 이자의 가족들도 옆에 끌어다 앉혀. 아들과 손자들 분리해서.”
“네.”
조금 전에 야스오가 다이나누시라고 부른 영주의 가족들 60여 명이 모두 끌려 나와 영주의 좌우에 무릎이 꿇려졌다.
호구 조사는 이미 대충이라도 마친 상태이다.
야스오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여섯이 있는데, 그 중 넷이 영주의 아들인 것은 이미 확인했다. 나머지 둘은 사위이고, 미혼의 딸들도 함께 있다.
손자가 열하나, 손녀가 열다섯.
와이프가 여섯이니 그 정도야 이상할 것이 없다.
많기도 하다.
이 시대의 왜국에서 느낀 것이지만, 왜인들은 여인들을 거의 가축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맨살로 한 이불 덮고 같이 자는 아내를 왜 그리 취급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속사정이어서 구분이 잘 안 되기는 한다.
그러나 태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다. 물론 21세기의 문화와 대비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인도 카스트제도 하에서의 달리트 계급과는 또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들은 불가촉천민으로 아예 접촉 자체가 금지되는 수준이지만, 자신의 아내는 살을 맞대고 함께 잔다. 물론 여럿일 수는 있지만 평생을 함께하면서 자식을 낳아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렇다.
하긴, 유럽을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긴 하다.
유럽도 중세까지의 여자란,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욕을 풀어 주고, 후계자를 낳아 주는 개념이 더 강했다.
유럽의 영주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촌이거나 외사촌지간이고 대를 이어 사촌 아니면 외사촌 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니 마누라나 딸, 손녀들은 어찌해 봐야 의미가 없다. 아들과 손자들만 조지면 된다.
“야스오가 장남인가?”
태영이 다이나누시라 불린 놈을 향해 물었다.
“…….”
대답은 하지 않고 이를 앙다문 채 노려보기만 한다.
제법 강단이 있다 이거지?
하기야, 그 정도도 없이 한 지방의 영주가 되지는 못했겠지.
제가 능력이 있어서 영주가 되었건, 물려받아서 영주가 되었건, 한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 정도 되면 그 정도 배짱은 있다고 봐야지.
“대답을 하기 싫다?”
“…….”
“나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참 싫어하는데.”
“…….”
“내가 맞다. 내게 물어라.”
태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야스오가 가래 끓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앙상하게 말라 있는 몸인 데다 묶여 있는 것이 고함을 지를 수 없는 상태라 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네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사람이 아니니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그 입 다물어라.”
태영은 마치 친한 사람과 대화하듯 조용조용 말했다.
퉤~
야스오가 침을 탁 뱉었다.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 해?
문제는 그냥 쉽고 편하게 죽여 주지 않는다는 거지.
“개가 사람을 문다고, 사람이 개를 물지는 않지만, 개를 매달아 놓고 매질을 할 수는 있다. 그러니 까불지 마라. 그리고 최소한 말을 알아듣는 개로 상대해 줄 때 조용히 있어라.”
태영은 야스오를 향해 빙긋 웃으며 한마디 해 주었다.
“잔디야, 거기서 조각 세 개 꺼내서 좌측 줄 두 번째, 세 번째와 우측 줄 첫 번째 놈의 어깨에 얹어라.”
“네, 대장님.”
“큰 집게 사용하도록 하고.”
“넵, 알겠습니다.”
잔디가 망태기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물이 찰랑찰랑한 그곳에서 조각을 집게로 집어서 각각 어깨에 한 개씩 얹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자리에서 잠깐 멈칫했다.
“대장님, 얘 이거 너무 어린데요?”
영주의 손자로 보이는 아이는 열 살 전후로 보였다. 너무 어려서 고문을 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 꺼림칙하다는 의미이다.
“수은이의 죽음을 잊었느냐?”
수은이.
태영이 율촌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왜구들이 제물로 바치기 위해 마치 짐승처럼 들고 가던 아이다.
두 살.
그냥 두 살이었을 뿐,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었다.
정하연을 비롯하여 잔디와 눈이, 가림이 등이 잡혀갈 때, 그 아이 수은이는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잡혀가고 있었고, 왜구들을 모두 죽인 뒤 확인했을 땐,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 쓰러져 있던 수은이는 이미 체온이 싸늘하고, 숨도 쉬지 않았었다.
그 말 때문이었을까?
잔디의 눈에 파랗게 불꽃이 일렁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으흠.”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목 안에서부터 넘어오는 된 소리를 가볍게 질렀다.
“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그리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사이에 눈물이라도 흘린 것인가 싶다.
“양지유, 고유하, 부영운 세 사람 이리 나와.”
느닷없이 제주의 참관단 쪽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지명을 당한 양지유가 둘을 순서대로 돌아보더니,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잔디를 보고 입만 벙긋벙긋했다.
“그래. 이리 나와라.”
잔디가 재차 부르자 세 명이 느린 걸음으로 잔디에게 갔다.
“이 집게로 여기서 조각 하나를 이놈의 어깨에 떨어지지 않게 올려라.”
“네, 네? 제가요?”
“그래.”
“아, 알겠습니다.”
양지유가 집게를 들어 조각 하나를 살짝 꺼내서 좌측 줄 두 번째에 꿇어앉은 왜구의 어깨에 올렸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서 있어라.”
양지유가 자리를 이동하려고 하자 잔디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다음 고유하, 너는 저놈.”
고유하라 불린 여아가 조심스럽게 역시 조각 한 개를 올렸다. 이미 양지유에게 시키는 것을 들었기에 떠나지 않고 그 앞에 서 있었다.
“부영운, 너는 저기.”
부영운은 저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사내아이 앞에서 역시 같게 하고는 그 앞에 섰다.
“조이슬, 거기 불씨가 있는 나뭇가지 한 개 가지고 와서 잔디에게 전해 줘라.”
“넵, 대장님.”
조이슬이 연병장에 피워진 장작불 바깥에서 불씨가 있는 막대기를 가지고 왔다.
“잔디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지?”
“네, 이 불씨를 저기에 불이 붙도록 하면 되는 것 맞습니까?”
“그래, 맞다.”
백린.
여름날에는 햇볕에 나오면 10초가 지나기 전에 자연 발화할 정도로 발화점이 낮다.
여름 낮의 온도가 40도가 되지 않지만, 그것은 백엽상 속의 온도일 뿐, 직접 햇살을 받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백린의 발화점이 60도인 것은 맞지만, 그 햇살에 바로 불이 붙는다.
“양지유 들었지?”
“네.”
양지유가 전달받은 막대기에 불은 꺼졌지만, 숯이 타들어 가듯 빨갛게 달궈진 나무 끝을 자신이 올린 조각에 가져다 대었다. 물론, 저게 무엇인지 모르니 쉽게 가져다 대는 것이다.
불씨가 있는 부분이 백린의 조각에 닿자마자 하얗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파바박 불꽃이 튀면서 연기가 자욱해졌다.
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악~
불꽃이 피어오르며 연기가 나자마자 왜구는 비명과 함께 온몸을 뒤틀었다.
비명 소리가 들리자 양지유는 우는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백린의 조각이 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냄새가 확 풍겨 오더니 곧바로 살 타는 냄새까지 풍기기 시작했다.
영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지 몰랐겠지.
설명해 줘도 모를 것이다. 사포의 병사들도 처음 보는 모습일 테니.
“다음.”
태영의 말에 잔디는 불 막대기를 고유하에게 전해 주었고, 고유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벌벌 떨면서 잔디를 쳐다볼 뿐 백린 조각에 불을 가져가지 못했다.
“잊었느냐? 저놈들이 네게 어찌했는지.”
“아, 잊지. 아…….”
“큰 소리로 말해라.”
고유하가 들릴 듯 말 듯 말하자 잔디가 호통을 쳤다.
“아, 아니. 잊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수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유하의 목소리가 고함 소리로 튀어나왔다.
“그럼 뭘 망설이느냐?”
잔디의 말이 나오자마자 막대기를 백린 조각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 잔디가 전해 준 불 막대기를 부영운은 입 한번 앙다문 것으로 나도 잊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듯, 백린 조각에 가져다 대었다.
“으아아아, 아아아악.”
세 명의 비명 소리가 온 연병장을 백린의 연기처럼 퍼져 나갔다.
“그, 그만, 말하겠다.”
“말하지 않아도 돼. 여기 네 가족은 많고, 우리는 아주 오래 이곳에 머물러도 되니까.”
“야, 야스오는 장남이 맞다.”
“맞다? 네가 나와 맞먹겠다는 말이네?”
“그…….”
그렇겠지.
여태까지 제 위에 아무도 없었을 테니, 당연히 평소 하던 대로 말했겠지.
막말로 가마쿠라 막부도 여기서 몇 천 리 떨어져 있고 왕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니까.
“너는 존경을 담아서 말하는 것부터 배워야겠다.”
비명이 귀를 찢는 소리가 들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왜구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제주의 참관단을 태영은 휘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