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8
018. 응징을 위한 준비(2)
화선지에 붓으로 그리고 쓰는 것이 참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노역 형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일을 위해 화선지에 쓰고 그리다 보니 이젠 제법 늘었다.
“병사와 선원을 포함하여 이천을 태우고, 쌀 삼천 석을 싣고, 장작 삼천 고리 이상을 동시에 실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서너 척입니다…….”
“네?”
크루즈 여객선 같으면 아마도 길이 2백 미터는 나와야 할 것이지만, 전투선과 화물선을 겸하는 용도라고 해도 최소 그와 비슷한 크기가 될 것이다.
태영이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총 배수량이나 적재량 같은 것은 어차피 잘 모르는 사항이어서 대충 계산을 해 본 것이다.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아…… 그 정도가 되려면 그 크기가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김하석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 정도의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실으려면 정말 얼마나 클지 모르지만, 태영이 생각하는 길이는 180미터 정도였다.
철선으로 만들어도 결코 쉽지 않은 크기인데, 과연 목선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철선으로 만들고야 싶지만, 이 시대에 철로 배를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기도 하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김하석이 말은 그리하면서도 배가 그려진 커다란 화선지를 유심히 보다가 한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이옵니까?”
김하석이 손으로 짚은 곳은 스크류였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병선은 사람이 노를 저어 배를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럼 뭐로? 하는 표정으로 김하석이 태영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시대에는 스크류로 가는 배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설사 노를 사용하더라도 노는 배를 돌리거나 근거리를 이동하는데 사용하는 정도의 보조일 뿐이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힘은 첫째가 기관, 둘째가 돛이오. 그 돛조차도 보조용일 뿐, 배의 추진력은 기본적으로 기관을 통해서입니다. 지금 가리키고 있는 그것은 바로, 기관의 힘으로 물을 밀어내어 배를 빠른 속도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이오.”
돛은 서양 범선의 돛의 형태를 띠고 있고, 선미에는 커다란 스크류와 키가 달려 있었다.
김하석은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 것이오. 그러니 선미의 하단에 기관이 들어갈 자리로 넓이 쉰다섯 자, 길이 여든 자, 높이는 갑판의 위치보다 두 자 높은 곳까지의 공간을 비워 두면 되오이다.”
기계공학과를 다닌 것이 이럴 땐 정말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과제로 설정해서 설계를 해 보았던 증기 터빈을 만들어 배의 동력으로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터빈을 만들 수 없으면 돛으로만 움직여야 하는데, 그래서야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증기 터빈을 만들어야 한다.
증기 엔진이 터빈보다는 간단하고 규모도 작지만, 효율은 터빈이 좋고 힘도 좋을 뿐만 아니라, 큰 배를 움직이려면 큰 동력이 필요하다.
나름대로 며칠 동안 안 돌아가는 짱구를 굴려 가며 도출해 낸 결론이다.
원자력이나 화력 발전소는 현대에서도 증기 터빈을 사용하여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석유를 구할 수 있다면, 휘발유 엔진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석유를 구할 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연료의 확보가 쉬운 증기 터빈이나 증기 기관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증기 터빈은 단점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점도 많다.
크기를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고 고출력을 얻기가 힘들지만, 석탄이나 장작 같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연료를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장이 잘 나지 않는다.
특히 증기 터빈은 워낙 크기가 클 수밖에 없으니 배에서 사용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감히 한 가지 더 여쭙고자 하옵니다.”
“물어보시오.”
“이 병선으로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옵니까?”
신도익이 무슨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김하석을 바라보았다.
태영은 잠깐 망설였지만, 그냥 알려 주기로 했다.
“보름쯤 전에 이곳에 왜구가 쳐들어와 죽은 사람이 일백이 넘고, 아이들도 많이 죽었소. 그리고 옆 마을인 율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죽었소, 이곳에는 오 년 전에도 역시 왜구가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죽었소이다.”
태영은 잠시 김하석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쳐들어온 왜구들은 내가 모조리 다 죽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놈들을 용서할 수 있겠소?”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당연히 아니다.
김하석이 입을 약간 벌린 채 태영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난, 그놈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소.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조리 씨를 말려 버리고 싶소.”
태영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이것은 신도익에게도, 정하연에게도 아직은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하겠사옵니다. 소인에게 이 일을 시켜 주시옵소서.”
한참 동안이나 잠잠하게 앉아 있던 김하석이 갑자기 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그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모습이 보였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무언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물었다.
김하석은 굳은살이 박인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쭈글쭈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문질러 주르르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 내었다.
“소인에게 두 아들과 세 딸, 그리고 일곱의 손주가 있었사옵니다. 그들 중에 지금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된 손자 하나가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자신의 옷 한 자락을 잡고, 자신의 옆에 앉은 사내아이를 돌아보았다.
“그 아이오?”
“네, 그렇사옵니다. 이태 전에 우리 마을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동네 사람들 절반이 죽어 나갔고, 그 와중에 저 아이의 어미, 애비와 삼촌들, 그리고 사촌들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했습니다.”
김하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슴을 손으로 잡았다. 숨이 막히는 모양이다. 어찌 그러지 않으랴.
태영은 자신의 가슴도 미어지는 느낌이라 그대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김하석은 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이놈 하나라도 살려 보겠다고 얘 애비가 대들보 위로 밀어 올려 숨긴 모양인데, 애비 어미가 다 죽고 혼자 남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왜구들이 집에 불을 질러 집이 불길에 싸이자, 저 어린것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리다가 모로 떨어져 어깨뼈가 완전히 바스라진 모양입니다. 그래도 뒷문으로 도망을 쳐서 어찌어찌 살아남았는데, 어른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바람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해서 저리 병신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지요.”
정말 왜구 놈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가능하다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다.
“소인이 연락을 받고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며칠을 굶어서 숨이 넘어가기 전이기도 했고, 상처 자리가 너무 심하게 곪은 데다 뼈를 맞추지 못해서 저리되고 말았습니다요.”
쪼글쪼글한 얼굴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지만, 마치 응어리를 풀어내듯 말은 계속했다.
“소인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고 더없이 소중한 아이옵니다. 소인이 눈을 감기 전에 왜구에게 소인의 원한과 이 아이의 원한을 일부라도 갚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것이옵고, 무슨 일이든 할 것이옵니다.”
김하석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도대체 이 왜구 놈들은 얼마나 노략질을 하고 다녔다는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이 맺히게 했단 말인가?
이어진 김하석의 이야기는 정말 처절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차피 이곳에서 배를 건조하게 될 것이고, 말이 나온 김에 속에 맺힌 것들을 조금은 풀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슬처럼 풀려 나오는 김하석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김하석의 태생은 거제의 바닷가 마을이었다.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부역을 하기 위해 간 곳이 배를 만드는 조선소였고, 그곳에서는 병선을 만들고 있었다.
부역에서 처음에는 그저 잔심부름밖에 할 수가 없었지만,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있었던지라 병선 건조하는 일이 아주 잘 맞았다.
그러나 부역은 짧은 기간이었고, 이듬해에 군역을 가게 되었는데 군역의 장소 또한 조선소였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으면 축대를 쌓거나 선착장을 쌓는 일이 주된 일이었고, 훈련은 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소에서 병선을 만드는 목수가 김하석이 부역을 할 때 손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목수로 차출해 갔다.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 군역이나 부역이 아닐 때도 수시로 차출되어 갔고, 한번 차출되어 가면 몇 년 동안 집에도 가지 못하고 병선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래도 목수로서 배를 만드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좋았었지만, 혼인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부터는 문제가 많이 생겼단다.
부역을 가거나, 병선을 만들기 위해 차출을 당해서 가면 자신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단다.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가족들은 어렵고 힘들게 살았는데, 왜구가 자식들과 손주들을 모조리 도륙할 때도 자신은 여전히 병선을 만드는 조선소에 차출당해 있었단다.
자신이 고향에 있었으면 함께 죽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아픔 가슴을 쥐고 병신이 된 손주와 함께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했다.
듣고 보니,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서 품삯도 주지 않았다고?
왜구들이 훨씬 더 나쁘기는 해도 거제에 있다는 조선소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내가, 사포에 호장으로 있고, 김 대목장이 사포에 사는 한 지금 당했던 일과 같은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겠소.”
태영은 김하석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약속을 했다.
신도익을 시켜서, 왜구의 약탈로 빈집이 된 집 한 채를 내어 주게 하고, 관노로 있는 여인을 한 명 그 집에 보내 수발을 들게 했다.
품삯은 월봉으로 부호장에게 주는 정도를 주겠다하고, 배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해야 하니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
여태까지는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사포에서 호장의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 의외로 이런 일들이 적성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
신도익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받고 난 후 다들 나가자, 정하연과 별이만 남아 있을 때 정하연이 불렀다.
“왜?”
“이 종이, 그리고 볼펜이라고 하신 글씨가 써지는 이 이상한 물건, 또한 나리가 사용하는 것들 중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많은 물건들은 대체 무엇입니까?”
어이구. 이 질문을 하기까지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궁금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용케도 잘 참더니 드디어 질문을 했다.
“별아, 가서 비서실 식구들 모두 불러오너라.”
“네, 나리.”
별이가 밖으로 나간 사이, 태영은 의자 뒤쪽의 장에 넣어 두었던 과일 음료 여섯 병을 꺼냈다. 그동안에 잊어버리고 있기도 했지만, 이들을 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는데 꺼낸 것은 처음이다.
어쩌다가 비서실에 정하연을 포함하여, 직원으로 네 명이나 있게 되었는데 사실상은 비서실 하인인 셈이어서, 그들은 하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태영은 쉽게 부리기가 조금 어색했다.
비서실 직원들이 들어오고, 별이까지 합쳐서 다섯이 태영을 바라보았다.
“다들 앉거라.”
별이가 비서실 직원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앉으라고 시켜도, 정하연은 의자에 앉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하긴 하인의 신분으로 여태까지 살아온 어떤 규칙 같은 것이 있었을 터인데, 태영이 앉으라 한다고 의자에 앉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주스 한 병씩 밀어 주었고, 다들 받기는 했지만 멀뚱멀뚱했다.
뭔지를 모르는 것이다.
“딱딱하고 차가운데, 안이 훤히 보여요. 세상에 이런 물건이 있었나요?”
정하연이 물었다.
태영은 병을 눈높이까지 들고 뚜껑을 싸고 있는 비닐에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자, 여기 보면 얇은 비닐 막, 아니 얇은 막이 있는데, 이걸 벗기고.”
비닐은 영어잖아?
그래도 여기서 말하면 그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가 되어 버리겠지만.
“자, 그리고 이렇게 잡고 돌리면 뽕 소리가 나면서 뚜껑이 벗겨지는데, 요렇게 마시는 거야.”
그러면서 태영은 주스 한 모금을 마시고는 내려놓고 해 보라고 시켰다.
“와~”
“나리. 이게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맛난 것입니까요?”
정하연의 눈이 감격에 젖어 있고 비서실의 다른 사람과 별이도 표정은 비슷했지만, 별이가 태영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별이는 태영을 많이 어려워하지 않기에 그런 듯했다.
별이가 마신 것은 석류, 정하연이 마신 건 귤이다.
“과일즙인데, 알지?”
귤과 석류가 고려 시대에 있었던가, 없었던가?
귤은 원래 제주와 중국 남부가 원산지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고려에 귤이 있었던 것 아닌가?
“별아, 이런 과일들 본 적은 있어?”
“본적이 없는뎁쇼, 아씨.”
맞다. 고려 초에는 제주도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인 탐라국이었다고 배운 것 같다.
그리고 귤은 황궁의 진상품으로 개경의 귀족들도 쉽게 맛볼 수 없는 귀한 과일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사포에서 귤을 보았을 리가 만무하다.
현대 사회에서도 귤은 생산량의 대부분이 제주산이다. 아마도 제주의 토양과 따뜻한 기온이 귤을 재배하기가 좋아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그림을 이 작은 것에다가 누가 그린 것입니까요?”
별이가 병에 붙은 라벨을 보고 신기하듯 보면서 물었다.
“그림을 참으로 잘 그렸네요.”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어 인쇄한 것이니 그렇지.
“이거 너무 예뻐요. 뒤가 보이는 호리병이 다 있네요.”
호리병?
유리병을 처음 보는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고대의 유리는 보석으로 취급되었고, 그릇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리를 병으로 만든 것을 보았으니 문화의 충격일 수도 있겠지만, 까짓것 뭐 어때.
“이것은 내가 살던 곳에서 마시던 과일 차 종류 중 하나야. 다만 내가 그런 것들을 설명해 주기가 힘들다는 것이지.”
정하연이 볼펜을 또각또각 눌러 보다가 다시 태영을 쳐다보았다.
“나리.”
밖에서 신도익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별이가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세. 정 실장은 이번에는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고.”
“어디 가시는데요?”
“음, 온정 철소에 다녀올 것이야.”
철소에 여자가 함께 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신도익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현대에도 철을 다루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성향이 조금 거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온정 철소는 채광 양이 적어서 버려진 곳이 아니옵니까?”
“그래, 버려진 곳이어서 찾아가는 거야.”
신도익이 앞장서고 태영의 뒤에는 신도익의 부하였던 사병 김세돌과 신호익이 따랐다.
신호익은 신도익의 사촌 동생이란다.
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였고, 김웅겸이 허름한 옷에 괭이를 들고 태영에게로 왔다.
“출타하십니까, 나리.”
“음, 마을 사람들 중에 부역에 해당하는 사람이 몇인가?”
“모두 아흔세 명입니다. 농사가 시작되는 한 달 뒤까지는 돌아가면서 가능하옵니다.”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리고 부역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하라 하여 명단 작성해서 정 실장에게 주고 그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하고 일을 시키도록 하게.”
옛날에는 부역이라고 명명된 노동의 착취가 대단했던 것 같다.
누구든 일정 기간 동안 부역을 해야 하고, 부역은 품삯을 지불하지 않는 무상 노동이었다. 심지어 식사조차 제공해 주지 않는단다.
거기다가 부역은 가구마다 부과되는 것이어서 여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자가 나오게 된단다.
“이미 넘겨받았습니다. 나리. 내일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부역 현장에 가 보겠다면서 뒤따라오던 정하연이 대답했다.
정하연의 대답을 들으면서 노역의 현장을 둘러보니 오중현이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다.
일이란 것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손에 괭이나 삽을 들고 움직이고 있거나 허리를 펴는 등 일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오중현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냥 한쪽에 앉아 있는 자세로 봐서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일을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 저러고 있단 말이야?
복장도 일을 하기 위한 복장이 아니라 관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저런 건 또 못 본다.
“오중현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나?”
김웅겸에게 물었다.
“일을 시켰습니다만, 본인이 일을 거부하고 있어서…….”
김웅겸이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보아 오중현이 거부하자 김웅겸이 강제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도익을 돌아보았다. 너는 알고 있느냐는 의미였다.
“이야기는 들었사온데…….”
신도익도 어쩌지 못했다고?
그런데, 보고도 안 했다고?
이것들 봐라. 제정신들이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