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80
180. 비가(悲歌)(4)
개경으로 가는 길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리를 이끌고, 말을 타고 다닐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길을 익혀 둘 겸, 그리고 유해를 담은 단지를 나무 상자에 담아 말에 얹고 이동하는 중이니 일부러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길이 좋고 넓은 곳이 나타나면 말을 위해서 빨리 달렸지만, 오솔길은 천천히 움직였다.
제비골에서 생긴 일은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틀이 지나자 모두의 마음속에서 잊힌 것처럼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말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혹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또 몇일이 지나고, 멀리 회빈문(會賓門)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곳을 지키는 감문위 소속 병사들이 부산스러워 보였다.
하긴, 말 30필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데다 사포 병사의 복장은 저들도 익히 알고 있을 터였다.
“충성! 대장님을 뵈옵니다.”
이 사람들도 거수경례를 배웠어?
“충성! 수고 많아요.”
“아닙니다. 별감 나리께 연통하겠사옵니다. 어디로 가신다고 하면 되옵니까?”
책임자인 듯한 사람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만난 적이 없는 모양이다.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소. 그리고 우리는 사포재로 갈 테니, 혹시 알리게 되거든 그리 말해 주고.”
사포재는 이들이 모를 수도 있지만, 이름을 대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집 이름을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었더니 좀 촌스럽나?
그래도 상관없다.
“넵, 알겠습니다. 충성!”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회빈문을 지났다.
최세헌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지남산 남쪽이다.
본래 최충헌의 집을 최세헌이 차지하고 들어갔으니, 그 집을 빼앗은 사람은 태영이고, 그걸 최세헌에게 주었기에 집값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거의 몇 달 만에 오는, 실제로는 살지도 않고, 하인들만 살고 있는 개경의 집이다.
지난해 가을에 개경 손님을 모시러 왔을 때, 정서하가 여기서 살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기에, 정규하 부부가 출장으로 장기 숙박을 할 때에도 안 된다고 잘랐다.
개경의 집값이 비싸단다. 그래서 그런 부탁도 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정규하와 김비주 부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작은 집을 하나 사서 그곳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어차피 출장지이니, 출장지 숙소로 생각하고 해결해 주었는데, 그렇게 부담해 주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태영의 집에 와서 주인처럼 사는 것은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
“나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씨 마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집사장 윤이호의 표정이 환하다. 그런데 이놈들은 태영보다 서윤을 훨씬 더 반긴다.
예쁜 주인마님이라서 그런 거야?”
참나.
“사랑채의 내부 수리는 완료했을 테고, 내가 시키는 대로 집기도 놓았는가?”
“네, 대장님. 집기는 사포에서 보내 주신 것으로 배치도에 따라 모두 배치를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왔을 때 사랑채의 내부 구조 변경이 거의 끝나 있어서 그사이에 내부에 놓을 집기와 칸막이 등을 보냈었다.
“누구 시켜서 학당 김윤경 교장하고, 정규하에게 연락해 줘. 오늘 저녁에 좀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에잇, 개경에도 전화가 있어야 하는데.
하긴 아직 사포도 전화는 없으니, 그건 나중 문제다.
“우리 병사들 숙소 배정해 주고, 다들 먼 길 왔으니 따뜻하게 목욕할 수 있게 해 줘. 말들도 먹이 좀 많이 주고.”
“네, 잘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아무도 없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치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중대장.”
“넵. 대장님.”
“여기 집사장에게 목욕물 준비하라 일렀으니 숙소 배정받은 후 짐 풀고, 촌티 나지 않게 잘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할 거야. 잘하는 요릿집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준비해.”
“넵,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며 웃는다.
개경 시내를 거쳐 오면서 개경 사람들을 보고, 왜 개경 사람들이 이리 촌스러워 보이느냐고 했던 사포 병사들이기에 태영이 거꾸로 촌티라고 말한 것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윤 집사도 들었지?”
“네, 십자가 건너 조정의 높으신 분들이 잘 가는 요릿집이 있으니, 거기 인원수 맞게 방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김윤경 교장 비롯해서 학당에서 오륙 명, 그 외에 정규하와 일행들이 올 것이니 거기에 맞게 빌려 줘. 그리고 최 별감 댁에 누굴 보내서 내일 만나자고 연통해 주고.”
“네, 대장님. 그리하겠습니다.”
“언제쯤 갈 생각이야?”
사랑채로 발을 옮기며 물었다.
“내일 갈까요?”
태영의 질문에 서윤이 짧게 물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삼 일 쉬었다가 가지 않고?”
“그래요. 그럼 사흘 후에 가요.”
“미리 연락할 필요는 없겠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외손녀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서윤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모친의 유해를 외가에 전달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른 걱정이 생긴 것이다.
“사포와 개경은 사는 세상이 다르니, 다 키운 딸이 집안의 하인과 야반도주하여 2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손녀가 어머니의 유해입니다 하고 나타나면, 황당할 일이지.”
“네, 생각이 어떠할지는 모르지만, 야반도주를 할 때 이미 내 딸이 아니었다 하면 할 말이 없는 거지요.”
“서윤이 손녀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고.”
과연 딸과 사위로 인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제가 손녀로 인정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는 어차피 개경에서 살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머니가 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이 시대의 신분의 차이는 절대적이고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 세상이 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하인과 도망친 딸이라면 충분히 ‘난 모르는 일이다’라고 할 가능성이 있다.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서윤의 말처럼 서윤이 개경에 아쉬울 일은 없으니. 오히려 그쪽에서 아쉬운 것이 있어서 서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그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최 별감에게 지원을 요청할까?”
태영이 다르게 물었다.
“아뇨.”
최세헌을 앞세우고 찾아가면, 감히 거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태영이 인편으로 서찰을 보내도 된다.
아무리 고려 조정으로부터 품계 하나 받지 못한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고려 땅에서 태영의 위세를 넘겨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서윤은 그 모든 것을 하지 말자고 한다.
“오, 완전히 사포의 본부에 만들어진 집무실과 비슷해졌네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사랑채 집무실 문을 열자 서윤이 탄성을 자아냈다.
“그렇지. 집기는 거기서 가져온 것이니까.”
“여기가 내 자리구나.”
서윤은 자신의 자리로 생각되는 탁자 앞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태영 역시 자신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 일단 우리도 더운물로 목욕이나 하지.”
“네, 더운물 목욕은 안채로 가야 하죠?”
“아니, 사랑채 뒤에 목욕실을 꾸미라고 했으니 거기로 가면 돼. 안채까지 가기가 번거로울 것 같아서.”
“으흥.”
서윤은 콧소리를 내면서 태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베레모를 벗어 책상 위에 던지고는 문으로 향했다.
“저 등 밀어 주실 거죠?”
함께 목욕하자는 아내의 말인데,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당연히 밀어 드려야지. 그런데,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해 볼래?”
***
“충성!”
정규하와 김비주가 사랑채 집무실로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경례를 한다.
“충성! 잘 지냈어?”
“네,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누님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너도 아주 좋아 보인다. 비주는 개경 생활 할 만해?”
“네, 부실장님. 사포 생활보다는 못 하지만, 좋아요. 부실장님은 더 예뻐졌네요?”
“그럼, 대장님의 사랑이 넘치거든.”
호호호, 하하하~
서윤의 가벼운 농담에 집무실 안에 웃음이 퍼졌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김비주의 목소리가 울리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아이구, 대장님.”
최세헌이다.
저 양반은 내일 보자니까 왜 오늘 찾아온대?
“어서 오십시오. 내일 오시면 좋겠다고 미리 연통을 했는데, 벌써 오십니까?”
“아, 뭐, 국사가 바쁘긴 하지만, 마누라도 없고, 딸도 없고, 아들까지 없으니 적적해서요.”
가족들의 대부분이 사포에 가 있으니.
본처와 어리고 예쁜 셋째 마누라는 사포에 가 있어도, 둘째 마누라는 곁에 있는데. 하긴, 셋째에 비해 애교가 없고 무뚝뚝하긴 하더라.
“하하하, 일을 더 바쁘게 해 드려야겠네요.”
“그건 안 되지요. 그나저나 감귤하고, 참외는 참 잘 먹었습니다. 감귤은 제철이니 그렇다고 해도, 이 엄동설한에 참외라니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많이 못 드려서, 뭐.”
“시중에 파는 것을 몇 개 사서 먹긴 했는데, 그거 몇 개 더 먹으려 하다가는 집도 팔고 전답도 팔아야 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왜요? 한 개에 얼마에나 팔렸기에 그러십니까?”
“처음에는 한 개 은자 두 냥, 나중에는 닷 냥까지 치솟았다 합니다.”
개경에서도 상인들이 극성을 부린 모양이다.
운송비가 워낙 많이 먹히니, 은자 한 냥에 2개로 정했는데, 그 중간에서 이윤이 그렇게나 불어난 모양이다.
돈 버는 놈들은 따로 있다니까.
아, 태영이 그리 말하면 안 되나?
지난번 선화 상단과 기화 상단과의 거래에서 1천6백만 냥이나 벌어 왔으니, 물론 천만 냥 이상은 철과 동, 석탄 같은 현물로 가져오는 조건이긴 해도, 그리 말하면 안 될 것 같긴 하다.
“아직 수확할 것이 좀 더 있는데, 거참.”
“황궁에 갔더니 폐하께서 아주 원망이 많으십니다.”
“왜요?”
“황후께서 참외를 실컷 먹었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황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자랑할 때까지는 그냥 부러움만 느꼈다고 하셨는데, 송나라에 가서 좋은 곳을 구경 다녔다고 하며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그림, 태영도 봤다.
황후가 그림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는지, 황산의 절경과 서호의 절경을 그린 것이 정말 멋있었다.
“그런데요?”
“그래서 날 보고, 대장님에게 말해서 송나라 구경 한번 갈 수 있게 해 보라고 하시니, 제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이야. 일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말이야.
그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럴까 봐 자랑 좀 하지 말라 했는데.
“그런데, 거기에다 더 얹어서 사포가 너무 살기가 좋아서 가을까지 거기서 지내다 오겠다고 통보를 하고 떠나는 바람에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원망할 만하지요.”
“폐하께서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지요?”
“마지못해 후궁은 들이셨지만, 후궁들의 처소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맞아. 안혜 황후가 젊은 나이에 죽고도 황제는 황후를 들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후궁을 두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문화이니까.
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평민은 일부일처제이지만, 황족과 귀족은 일부다처제 문화다.
그것은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와 연결하여 힘을 가지기 위해, 그 외에 온갖 이유로 그랬다고 한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왕건은 스물아홉이나 있었다는데.
그 중에 자의로 얻은 사람은 몇 없지, 아마?
대부분 지방의 세력가들이 왕건의 침실에 딸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안혜 황후가 1년이나 곁에 없어도 후궁의 처소에 발길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이, 불가능한 일을.
***
“거긴, 반상(班常)의 구분이 없는 것이 맞습니까?”
개경에 온 여러 목적 중에 오늘의 만남도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어떻게 서하와 규하가 웅천도(熊川徒), 아니 홍문공도(弘文公徒)라 불러야 하나?
어찌 부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홍문공도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제학만큼이나 뛰어나고, 고려 사학을 대표하는 여러 사학 중 선두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태영도 알고 있다.
항주를 다녀오며 했던 몇 가지 이야기에 규하는 ‘많은 선생님들이 필요하겠군요. 고려 학당의 선생님 같은 분들이.’라고 말했고, 그 뒤에 홍문공도들을 태영이 말하는 선생님들의 대열에 참여시켜 보겠다며, 개경 출장을 이야기했기에 허락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이는 돈은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했다. 넘치는 게 돈인데.
그런데 규하의 스승이란 자가 태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질문하는 것이 다분히 시비조였다.
“맞습니다.”
“어허.”
탄식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관작을 내린다 하였습니다. 그것도 맞습니까?”
서윤과 비주, 김윤경을 한번 보고는 질문하는 의도가 왜 여자를 관직에 올리느냐는 질문이다.
관작? 관직? 두 말은 의미가 조금 다른데, 홍문공도는 관작이라 한다.
작이라는 말은 태영이 기억하기로 중국 주나라 시절에 사용하던 오등작인 공후백자남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가?
아무튼, 책에서 배운 바로, 고려 시대는 남녀가 평등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보면 남녀의 권리는 동등한 듯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관직에 여자가 없었다.
신기한 일이지?
진짜 평등한 것은 아니지.
재산 분할만 평등하게 하면 평등인가?
“맞습니다.”
태영이 웃으며 똑같은 대답을 하자 인상을 찡그린다.
아무래도 오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
“반상의 법도가 분명한데 어찌 그리한단 말입니까?”
질책하는 거야?
까불고 있어. 그런데 까불다 맞아도 아프니까, 까불지 마라.
“반상의 법도는 누가 만들었소?”
걸어오는 시비를 피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말이 막 나간다.
나이가 훨씬 많은 데다 은퇴해서 후학을 기르는 중이지만, 제법 높은 지위였다 했다. 까짓, 별감도 쩔쩔매는 태영인데, 높아 봤자지.
“그야…….”
‘그야’는 무슨 얼어 죽을. 당연히 양반이 만들었겠지.
“이런 것을 토론하려고 오늘의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말씀하시오.”
“고귀한 신분의 양반과 보통의 중인과 양민, 그리고 비천한 상놈과 역시 비천한 천민 등으로 구분되어 있지요?”
“그렇소이다.”
대답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붓 쓰고, 벼루 쓰고, 종이 쓰지요?”
“……?”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좌우를 돌아보는 모습이 무슨 질문을 하느냐는 의미다.
“밥그릇에 밥 담아서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밥 먹지요?”
“…….”
이것 역시 무슨 이따위 질문이 있느냐는 표정이다.
뭐, 상관없다.
“그건 누가 만들어요?”
“…….”
“그런 것을 비천한 상놈이 만든다면, 비천한 놈이 만든 것을 사용하고 입안에 넣는 놈은 비천하지 않소?”
“…….”
막말 수준의 질문에 표정이 확 바뀐다. 그러거나 말거나.
“왜 비천한 상놈이 만든 비천한 벼루에 비천한 상놈이 떠 온 비천한 물로 비천한 먹을 갈아서 비천한 종이에 비천한 붓으로 전혀 비천하지 않은 척 글을 쓰고, 왜 비천한 상놈이 만든 숟가락과 역시 비천한 젓가락으로, 비천한 상놈이 비천한 솥에서 비천하게 밥 지어서 비천한 밥그릇에 담아 온 비천한 밥과 비천한 반찬을 먹고 고귀한 척 살아가는 거요? 그 목숨은 비천하지 않소?”
비천을 대체 몇 개나 쓴 거야?
셀 수가 없다. 이렇게 비천하다는 단어를 마구 집어넣어서 말을 해도 말이 통하기는 하나?
규하도 비주도 웃고, 김윤경도 한서윤도 웃었다. 물론 크게 웃은 것이 아니라 미소 정도지만 비웃음이었다.
할 말 없지? 없을 거다.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게, 밀어붙이면 말이 안 통하지.
“사포에 반상의 법도가 없다고 하여, 내가 개경에 반상의 법도를 없애라 요구한 적이 있소?”
“…….”
조금 안심하는 표정이다.
“내가 개경에 반상의 법도를 없애려면, 개경에 사는 양반이란 족속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간단히 해결되오. 난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고, 그 일을 하는데 딱 열흘이면 되오. 아, 내 아내가 힘을 좀 많이 보태면 사흘이면 다 되고 시간이 좀 남을 거요. 그런데도 난 아무 소리도 안 하지 않소? 그런데 뭐가 문제인 거요?”
어안이 벙벙한, 그리고 많이 놀란 표정이다.
“저기, 저 아이는 왜구에게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왜구에게 잡혀가는 것을 내가 구했소.”
비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계속했다.
“나는 정말 많은 여인들을 왜구들의 손에서 구해왔고, 단 한 번도 그 여인들을 구해 왔다고 떠벌린 적이 없소, 그리 많은 여인들을 구해왔음에도 그래도 여전히 정말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더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죽었소. 그런데 그 잘난 양반들은 그때 뭐 했소?”
“…….”
얼굴이 벌게진다.
결국, 며칠 후에 다시 보기로 하고 자리를 파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이야기가 안 되지. 정신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