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82
182. 굿바이 아시나(1)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가을이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안 가겠다고 버티고 버티던 개경 손님이 드디어 떠나기 위해 새로 진수된 흑룡호에 탑승했다.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네.”
“대장님, 진짜 시원하신가 보네요.”
태영이 선착장을 떠나 저만큼 멀어진 흑룡호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두 손을 탁탁 털면서 말하자 김웅겸도 손을 털면서 말한다.
“그럼, 연대장은 아쉬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라고 속이 시원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그럼요.”
“그런데, 개경 손님은 항상 새 배를 처음 타네요.”
옆에 서 있던 정하연이 손을 한 번 더 흔들어 주고는 태영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난해 가을에 황룡호 첫 항해로 개경에서 오더니 흑룡호 첫 항해로 개경으로 가네.”
“1년 만인데, 배의 건조 속도는 자꾸 빨라지는 것 같아요.”
“확실히 그래.”
“이미 만들어 본 배이기도 하고, 조선소에 사람도 무척이나 많이 늘었으니 그렇게 돼서 좋기는 한데, 김하석 대목장이 이제 일을 거의 못 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한서윤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세가 꽤 되긴 했지. 후계자를 많이 두긴 했는데, 그래도 대목장이 딱 버티고 있는 것과 아닌 것은 무게감이 다른데 말이야.”
“자, 돌아가서 가볍게 회의를 좀 하자고.”
“네.”
가볍게 회의를 하자는 것은, 모든 부서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부서가 모여 그냥 티타임 수준으로 묻고 답하는 대화 정도이다.
태영은 요즘, 전 부서의 보고를 받는 회의는 월 2회로 줄여 버리고, 이런 가벼운 회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정하연이 워낙 잘 해 주고 있기도 하고.
“숙부, 요즘 제가 바빠서 자주 못 뵈었습니다. 혹여 불편한 거 없나요?”
서윤의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 바라보니 한윤도 앞에 서 있다.
숙부의 이름은 윤도.
성은 형님과 같은 성으로 아이들까지 그대로 한씨 성을 갖게 되었다.
“조카님이 사포의 부실장인데 불편할 것이 있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라도 제게 말씀하셔야 해요. 알았죠?”
한윤도와 그 가족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났다.
할아버지 김정래에게는 한윤도의 가족을 데려오면서 전혀 의미는 없지만, 꽤 많은 보상을 해 주었다.
숙부 가족의 면천 대가라 생각해도 되고, 손녀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도 된다면서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한윤도는 서윤에게서 정착금으로 받은 은자가 제법 된다. 그리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서윤에게 하대를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노비로 살아온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정2품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부실장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윤도의 아내 역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났기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조카님 덕분이라며 항상 고마워한다.
“네, 부실장님. 다만 유하가 군사 훈련받고 비서실에 배속된다고 좋아하던데, 그 아이는 좀 잘 챙겨 주세요.”
“네, 염려 마세요.”
한유하.
한윤도의 큰딸로 올해 나이 열여섯, 서윤과 사촌 간이다.
그 아이도 노비에서 갑자기 면천하고,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볼 수도 없는 정2품 품계의 사촌 언니가 생겨 버렸다.
그 언니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모두를 면천시켜 주었고, 반상의 구분이 없다는 사포로 이주해 왔다.
열심히 배워서 언니에게 부끄럽지 않는 동생이 되겠다고 했단다.
이번에 군사 훈련을 마쳤고, 곧 비서실에 배속될 것이지만, 서윤의 직할이 아니라 정하연 직할이다.
***
“개경 손님은 잘 떠났나요?”
개경 손님 환송식에 나오지 않았던 장모 박신아가 회의실에 앉았다가 물었다.
교장이고, 교육 부장이고, 장모이니 참 직함이 많다.
“네, 잘 떠났습니다.”
“얼마나 떼를 쓰는지 미백용화유 열 개, 미유신수 열 개에 사향수를 다섯 개나 가지고 갔습니다.”
정하연이 장난치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미백용화유(美白容花乳).
사포에서 만든 여자용 화장품이지만, 사실은 비비 크림 수준이다.
왜 끝에 기름을 말하는 유(油)나 부드러운 것을 말하는 유(柔)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젖을 말하는 유(乳)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기름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기는 하다.
미유신수(迷柔身秀)의 이름도 개경 손님이 지었는데, 이건 일종의 바디로션이다.
한자는 왜 또 저런 것을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특히 끝 글자가 왜 물 수(水) 자가 아니고 빼어날 수(秀)자인지는 정말 궁금하다.
이름을 자신이 지어도 되겠냐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지은 이름인데, 이름이야 짓는 사람 마음이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다.
몸에 바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대에 이것은 뭐 신의 선물이라나, 뭐라나.
사향수(麝香水)는 여성용 향수다.
개경 손님이 돌아가면서 제일 욕심을 낸 것이 화장품인 미백용화유와 미유신수, 그리고 사향수였다.
“그거, 이름을 개경 손님이 지은 거잖아?”
“네, 이름을 잘 지어 주었으니 열 병만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빼앗겼습니다.”
“드려, 드려. 그거 얼마나 한다고.”
작명비로 그 정도야 줘도 되지. 더 줘도 되고.
“앞으로 개경에서 한 병에 은자 90냥, 송나라에 가서는 150냥을 받을 물건인데, 열 병을 그냥 가져가면 돈이 얼마인데요.”
그냥 주라는 태영의 말에 정하연이 정색을 한다.
그래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 걸 보니 장난은 장난이다.
“원가가 은자 두 냥인데. 뭐.”
아직은 회의실에 태영과 박신아, 정하연과 한서윤이 전부여서 태영도 그렇게 말했지만, 병 값이 포함되어서 원가가 그렇게 나온 것이다.
“그래도, 우린 판매 가격으로 생각해야 해요.”
정하연의 말이지만, 이런 때는 참으로 영악하다.
원가가 2냥짜리인 것을 90냥 받으면, 현대식으로 환산하면 날강도 수준이지만, 이 시대의 희귀 물품은 제조자 마음이다. 아무도 따라 만들지 못하니까.
“이번에 송나라 갈 때, 얼마나 가지고 간다고?”
“미백용화유 3천 병, 미유신수 5천 병, 그리고 사향수 100개만 가져가려고 해요.”
태영의 질문에 한서윤이 대답했다.
“양산 시설이 갖추어지니까 한번 작업 들어가면 3천 병 정도는 금방 끝나네요.”
“원료 조달이 잘 되니까 그렇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리고, 공업부, 건설부, 농업부의 각 부장들과 부관들, 그리고 김웅겸이 들어섰다.
“어서들 와.”
“네. 대장님.”
“윤 부장, 개경에 간 건설부의 직원들은 언제 올 예정이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흑룡호로 오게 될 것입니다. 아이고 그나저나 개경 손님 때문에 대장님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 특히 냉방기 달아 달라고 떼쓰는 것 때문에 아주 곤란했어.”
귀빈관에 설치해 준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낸 개경 손님은 자신이 황궁에 돌아가면, 귀빈관 생활에 익숙해져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데, 온수 온돌과 냉방 시설을 좀 해 달라고 떼를 썼었다.
완전히 떼쟁이다.
“그래도 온수 온돌을 놔 주기로 하고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어차피 개경은 전기가 없으니 냉방기는 소용이 없어. 온수 온돌이야 전기 없이도 가능한 것이니까 되는 거고.”
“개경에 전기 시설 하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되긴 되지.
사포의 오버 테크놀로지는 태영이 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치더라도, 개경에 이 오버 테크놀로지를 도입하는 것은 어찌 되었건 무조건 안 된다.
오버 테크놀로지 수준이 아니라,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오버 테크놀로지다.
“안 될 거야 없지.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야.”
“사포에 살면서 느끼는 거지만, 전에 어찌 살았을까요?”
윤점돌의 저 질문을 우리나라 50년대나 60년대에 하지 않았을까?
개경 손님의 일행은 얼마나 에어컨을 틀었던지 궁녀 한 명은 냉방병으로 고생을 할 정도였다.
“농업부는 겸우가 돌아와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지?”
농원 지도원의 김경환이 농업 부장을 겸하고 있다.
어차피 행정은 부관들이 따로 하고 있으니, 작물 연구에 미쳐 있어도 상관없어서 임명을 했다.
“사실은 대장님이 주신 자료가 더 효용 가치가 높습니다.”
“그건 그럴 거야.”
인삼 재배 기술을 배우러 간 겸우가 돌아왔지만, 21세기 식으로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나는 인삼을 어떻게 캐러 다니고, 어떻게 다음을 위해 씨앗을 뿌려 두는지 등을 배워 왔단다.
말 그대로 산삼을 캐는 수준이었지만, 좋은 인삼 씨앗을 꽤 가지고 왔다.
그런데 참 웃기는 것이, CCTV 제어용 PC 속에 인삼 재배 방법이 있었다.
그 PC를 사용하던 사람은 다음에 인삼을 재배하기 위해 귀농하는 것으로 예정하고 자료를 아주 넘치도록 모아 두었었다.
인삼 재배 방법 외에도 각종 약초와 식물, 약용 작물의 재배를 위한 수많은 자료들과 온실 재배, 수경 재배 관련 자료들이 있었지만, 인삼 재배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귀농을 준비했던 그 사람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건설부에 유리 온실 열 동을 지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것이 완성되는 대로 약용 작물을 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인삼은 무량산에 터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 자료에서 말하는 햇볕과 일조 시간 같은 것을 검토를 해 본 결과, 무량산이 현재로서는 가장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왜구 노예들의 투입도 요청했습니다.”
“그래?”
“농업부에서 요청한 노예 숫자가 천 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3백을 지원해 줄 계획입니다.”
정하연의 대답이다.
노예들의 일은 받아간 부서에서 시키고, 군부에서 경계를 서 주지만, 인력 배분은 행정부 소관이어서 정하연이 대답했던 것이다.
“아, 그렇지. 기계가 완성되었으니까.”
“네, 그것 때문입니다.”
“……?”
김경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 부장은, 보름 후에 공업부에서 보이는 기계화 작업 장비 시범에 대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정현과 정균이 살짝 미소 지었지만, 어차피 회의실 안에서도 저 두 사람과 태영과 정하연, 그리고 한서윤만 아는 내용이다.
“그럼, 그때 시범에 참석해. 그럼 노예 3백 명도 넘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똑똑~
다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금 늦었습니다.”
개경에서 내려온 철장 김도윤이 부관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뒤이어 권승찬과 부관이 들어섰다.
“어서 와. 과학 부장, 그리고 산업 부장.”
김도윤은 전기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에너지 관련 분야의 부서가 필요했는데, 딱 맞는 사람으로 김도윤을 임명했다.
개경에서 내려온 철장 김도윤.
정현이 추천을 하기도 했지만, 본인도 그 일이 정말 잘 맞는 것 같단다.
“냉동기 만드는 일을 좀 보다가 시간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김도윤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과학부 권 부장은 지원 좀 잘 해 줘.”
“네, 대장님. 그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 부장님이 너무 일을 많이 벌려서 아주 저를 못살게 합니다.”
사포의 전기 생산, 전화기의 보급, 전기 기계류의 제조와 보급, 에너지의 보급 등에 관한 것을 산업부에서 하고 있고 그 영역이 자꾸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사이에 사포의 모든 집에 전기가 보급되었고, 전구는 판매 형태로, 전기료도 납부해야 하는 방식으로 했다. 공짜 심리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곧 전화도 보급이 될 예정이지만 무척이나 비싸게 보급할 생각이다.
다이얼 방식도 아니고, 교환실을 통하는 수동 방식이다.
돈이 넘치는데 비싸게 받아야 할 이유는 없고, 문명의 이기라서 필수적이긴 하지만, 통신에 관련되는 부분의 보급은 제한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직은 본부와 연구소, 공업부의 정현에게만 전화기가 있다.
전화 교환실은 본부 뒤쪽에 별도로 만들었다. 그래서 도청이 아주 쉬울 것이다.
“정 부장님, 미백용화유 용기 1만 개, 미유신수 용기 1만 개 더 만들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거 글씨 새기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한 달은 주셔야 합니다.”
한서윤이 정현에게 용기를 요청하는 것이 미리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미백용화유라는 글씨 새기는 것이 정말 정밀한 작업이긴 한 모양이다.
태영도 가 봤지만, 불에 달궈진 글씨본을 용기에 지져서 새기는데 지지다 보니 실패가 제법 많이 나온다. 레이저 장비 같은 것이 있으면 그냥인데, 아쉽다.
“네, 그 정도면 문제없습니다.”
“교육부, 홍문공도는 요즘 어떻습니까?”
태영은 박신아에게 물었다.
“이제 사포의 문화에 완전히 몰입이 되었구요. 이젠 이들의 다음 조를 받아도 될 것 갔습니다.”
홍문공도 스물이 사포로 와서 교육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꽤 힘들어했는데.”
“처음에는 사포와 율촌의 사람들에게, 개경에서처럼 양민들에게 ‘너 이놈’ 했다가 몰매 맞은 사람도 있는데, 지금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양반이 곧 권력이던 곳에서,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었다.
양반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반상의 구분이 없는 곳에서 살기란 쉬운 일은 아니긴 하다.
“지금은 사포에서 생활하는 것이 꿈만 같다고 합니다.”
“꿈이요?”
권승찬이 물었다.
“네,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대장님 오시기 전에 살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 그렇게 비교하면 꿈속에 사는 것 아닙니까?”
“아, 꿈 맞죠. 꼬집어 보면 무지하게 아픈 꿈.”
윤점돌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웃었다.
“네, 맞아요. 그 사람들이 딱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그렇지, 그럴 거야.
“요즘은 글과 문화의 전달, 그것을 통한 지배 방법 등에 열띤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중에 대장님이 한번 봐 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다.
이런 부분은 태영도 공대생이다 보니, 관련된 책을 거의 읽은 바가 없기에 때로는 이들과 토론을 하면 말발에서 밀리기도 한다.
저희들은 책 읽고 토론만 하지만, 태영은 사포를 다스리며 무역도 하고, 연구 개발 지원도 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교육도 하는데 다를 수밖에 없지.
아, 물론 이들이 책 읽고 토론하는 것 외에 사포에서 각각 맡은 일은 있다.
일부는 행정부에서, 일부는 과학부에서 또 일부는 공업부에서 행정일의 지원을 하고 있다. 그거 안 하면 월봉을 주지 않으니까.
한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르크스, 엥겔스의 식민지론이 테르에 영문 자료로 있었지만, 번역해 주기는 겁난다.
태영도 읽어 보지 않았지만, 그 책으로 인해 공산주의나 노동자 운동으로 번져 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시대를 너무 지나치게 앞서도 안 된다.
지금 이곳은 암흑의 중세이니까.
에이, 그런 말 할 자격은 있나? 완전 21세기 교육을 시키면서.
“그러지요.”
“그리고, 내년에 홍문공도 서른 명을 더 데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건 좋지.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다음 번 원정 때문에 난 몽골어 교육에 좀 빠지게 될 것입니다. 카이바라에게 그리 전달해 주세요.”
몽골인으로 남자는 카이바라, 여자는 뭉흐체첵이다.
고려에 귀화한 젊은 부부를 사포에 데리고 와서 사포식 교육을 시키고, 태영을 비롯해서 희망자는 모두 몽골어를 배우고 있기도 하다.
물론 두 몽골인은 많은 제약이 있다. 절대로 사포를 떠나지 않는 조건이 가장 큰 제약이지만,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이들은 사포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면서 몽골에서의 열악한 기후와 농사 등에 대해 말하면서, 고려, 특히 사포는 정말 잘 사는 곳이라고 추켜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몽골보다 기후가 좋고 사람들이 좋아서 귀화를 하긴 했지만 사포로 오는 것은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다나 뭐래나.
“두 사람은 서신 교환도 안 되는 거지요?”
“보내는 것과 받는 것 모두 검사를 하세요. 안부 정도는 상관없으니까. 그 외에는 안 됩니다. 그게 조건이었으니까요.”
“네, 그렇게 하죠.”
그래도 그들이 온 지 반년이 넘어가니 지금은 사포 사람들 일부가 몽골어를 다들 제법 한다.
“교육부는 윤전기 자동화하는 것, 모두 끝났다고 했죠?”
“네, 공업부에서 고생을 많이 해 지금은 아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인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단히 많은 부분에 자동화가 되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는 부분이 많아졌고, 인쇄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
“서방님, 이거 좀 중요한 일이 있어요, 오늘 이걸 말할 기회가 계속 없었는데 이제야 나네요.”
회의를 마치고 모두 떠났을 때, 한서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뭐가?”
저렇게 심각하게 말한 적이 없는데, 느낌이 싸했다.
“아침에, 개경 손님 환송할 때 제가 조금 늦게 나갔잖아요?”
“응 그랬지.”
뭐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30분쯤 아니사와 이야기하고 나왔다.
“그때, 아시나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거든요.”
“그런데?”
“아시나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구요.”
“이상한 소리?”
“네, 어느 날, 불러도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테르의 수명이 다해서 그런 것으로 알라고.”
테르의 수명?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응?”
“저도 좀 놀랐어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죠.”
“물었더니?”
“갑자기 읽어지지 않는 자료가 있어서 시스템 진단을 좀 했더니, 테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갑자기 목까지 차올랐다가 머리끝까지 넘어가 버리는 답답함에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모든 것은 수명이 유한하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기계이건 그것은 피해 갈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테르는 정말 오래된 기계이다. 그런데도 테르의 수명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살았는데, 갑자기?
“네.”
“하.”
“하.”
태영도,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하연도 한숨을 푹 쉬었다.
스마트 워치는 찾지도 못했는데.
“테르의 수명이 다하면, 그 전에 자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는 한 자신과도 작별해야 한다고…….”
그 말을 하는 한서윤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테르는 기계이고, 테르 속에 살아 있는 아시나는 그냥 인공 지능일 뿐인데.
“흐윽.”
결국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배어 나왔다.
태영은 한서윤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태영도 테르의 수명이 끝나고 아시나가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정말 답답했지만, 서윤과 아시나 사이는 정말 각별한 사이였다. 비록 사람이 아닌 인공 지능이긴 하지만, 자매 같은 사이다.
“얼마나 남았다는데?”
아시나를 옮기는 방법?
없다.
또 다른 테르를 구하지 못하는 한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
아시나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테르의 물리적인 부분을 진단했기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내부 구조가 작은 모듈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듈 단위로 기능이 정지하는 시간이 다를 것이라고 하면서, CPU와 OS모듈은 6개월 정도까지 견딜 것 같은데, 다른 부분은 2개월에서 5개월 사이에 기능이 랜덤하게 정지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해요.”
저렇게 시간차가 나는 이유는 뭘까?
뭔가 이유는 있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진 않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자신을 불러내는 것이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두 달 정도요, 그런데 지금 각 모듈의 기능이 정지하는 추이로 봐서 그것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요.”
“보관된 자료들은?”
“그게 현재 상태가 유지되는 기간은 앞으로 열흘에서 이십일 정도.”
“필요한 자료들이 너무나 많은데.”
정말이다.
이 시대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그 속에 잠들어 있다. 여전히 아직도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파악도 다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명이 끝나 간단다.
그냥 테르만 사용했으면 수명이 다해 가는 줄 모르고, 어느 날 먹통이 되어서 땅을 쳤을 것이다.
아시나가 있었기에 자가 진단을 해서, 그나마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그럼 우리는 우리 일을 하자.”
“네.”
서윤이 눈물을 닦고 대답했다.
“일단, PC로 자료를 좀 옮기자. 그런데 테르의 용량과 PC의 용량 차이가 너무 커서, 아주 조금밖에 옮기지 못하는 거 알지?”
“네.”
“복사할 자료를 확인하고 골라내는 것은 어차피 내가 할 수밖에 없고, 서윤은 세계 지도를 100미터, 5백 미터, 2킬로, 5킬로 축적 지도로 각각 만들어서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 PC에 복사해 달라고 해, 그건 태블릿에도 옮겨야 해.”
지도 작업은 정말 보통 작업이 아니어서 사람이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아시나는 금방 해낼 것이다.
그리고 태영이 일하는 것과 상관없이 별도로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하다.
“네, 그리할게요.”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할게.”
“네.”
“그리고, 드론과 태블릿은 얼마나 더 사용 가능한지 진단 좀 해 달라고 하고.”
“네, 그것도 확인해 볼게요.”
드론.
정찰 수단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태블릿은 무선 통신 수단으로 이 시대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최상의 통신 수단을 제공해 준다.
이 두 가지를 사용하지 못하면 완전히 깜깜해진다.
리프래시 문제로 자료가 2프로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이것을 예상했었어야 하는데, 전자와 반도체 쪽 지식이 너무 없었다.
그리고 너무 안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