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83
183. 굿바이 아시나(2)
열흘 동안 찾아서 옮길 수 있는 정도의 자료는 많지 않다. 진즉 알았더라면, 더 많은 자료를 찾아서 PC의 용량이 되는 한 살려 내었을 것이다.
PC는 이 시대로 날아오기 2년 전에 구입된 것이다.
여기 와서 4년이 되었으니 6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새 기계이다.
21세기에 살았으면 6년이면, 수명에 상관없이 바꿀 때가 되어 가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잘 사용해서 고장을 일으키지 않으면 20년 정도 쓸 수 있다고 봤을 때, 앞으로 14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테르와는 다르다고 해도 욕심이 과한 건가?
만일, 드론과 태블릿까지 수명이 다하면, 일본 정벌과 몽골을 막아 내려는 계획에 많은 차질이 생긴다.
몽골이 치고 내려오기 시작하면, 역사대로라면 수십만 명의 고려인이 죽는다.
고려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수십만 명으로 알고 있을 뿐, 시골의 작은 마을들까지도 약탈당하고 죽어 간 숫자를 합치면 백만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건 역사학자들조차 모르는 일이니까.
무신 정권이 강화도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버티는 사이에 힘없는 고려의 양민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몽골군은 육지의 고려백성들을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왕실이 어쩔 수 없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방화 하면서 계속해서 죽여 나갔다.
그렇게, 몽골군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인을 끌고 간 것이나 백제인을 포로로 잡아간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고려 백성들을 도륙했다.
그렇게 죽어 간 고려인은 왜구들이 고려 연안에 해적질을 하면서 죽어 간 숫자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왜구가 그러하듯이 몽골군 역시 군인과 민간을 구분하지 않고 도륙한다.
아니, 몽골군은 원래 자신들이 침범한 지역의 모든 생명을 말살한다.
그건 막아야 한다.
그래서 몽골을 막아 내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계획 자체는 성공할 것이다.
무력의 차이가 워낙 압도적이기에 그것은 반드시 성공하지만,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 모른다.
***
열흘 동안 거의 꼼짝도 안 하고, 심지어 보고도 받지 않고 테르에서 살려 낼 자료들을 검토하고 복사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PC에 들어 있던 CCTV 녹화 파일은 모조리 삭제하고, 설치된 앱도 필수적인 것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웠다.
영상 파일과 음악은 없애면 안 된다는 정하연과 한서윤의 요구에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복사하는 것으로 살려 냈다.
그렇게 디스크 용량을 확보해서 가득 찰 때까지 재료를 받아 냈다.
지도 이미지 파일은 PC와 태블릿으로 각각 복사했다.
정말 아시나가 진단한 대로 열흘이 지나자 그나마 남아 있던 자료에 공백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자료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서윤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시나.
정하연은 영환이를 재운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태영과 서윤이 테르의 자료를 살피던 중이다.
언제나 라일리라고 불렀을 뿐, 단 한 번도 서윤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아시나가 처음으로 제대로 이름을 불렀다.
옆에서 자료를 보던 태영도 깜짝 놀랐다.
“으응?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작별?
“그래, 알았어.”
그런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아시나? 최소 한 달에서 두 달은 가능할 거라고 했잖아?”
서윤도 눈치채고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기계인데, 인공지능일 뿐인데,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서윤이 말했던 그날로부터 15일째다.
그러니 한 달이나 두 달이라고 했던 기간은 아직도 한참 더 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래도…….”
“아시나.”
“굿바이 아시나.”
태영이 먼저 인사를 했다.
“서윤아, 아시나에게는 시간이 없어 보여. 그 안에 너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은 거 같아.”
태영은 서윤의 손을 들어서 아시나를 향해 흔들어 주었다.
“Goodbye Asina.”
서윤의 입에서 굿바이라는 말이 들리고 3초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소리 없이,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시나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서윤은 멍하니 아시나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시나.”
조용히 아시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어 아사나가 떠 있던 허공에 가져갔다. 그러나 그림자도, 빛도, 아무것도 없다.
서윤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태영은 가만히 다가가 서윤을 안아 주었지만, 테르나 아시나가 사람은 아니기에 슬픔이 걷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매정하지만 사실이다.
애착을 가지고 사용했던 기계들과 얼마나 많이 작별해 봤던가?
그 기계들과 작별하고 마음을 수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사람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이후에 떠나보내는 과정이 있지만, 기계는 그냥 동작의 정지일 뿐이다.
아시나는 말을 주고받은 사이였기에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오래지 않아 잊히지 않을까? 아니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 맞다.
그것이 기계와 사람의 차이가 주는 갭일 것이지만, 서윤은 가족을 떠나보내고 또 아시나를 떠나보내는 것이어서 오래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그런 것이다.
아시나가 드론과 태블릿은 앞으로 2년 정도 사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것도 반으로 줄여 잡아야 할 모양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드론이 떠오르지 않거나, 비행 중에 갑자기 추락할 수도 있고, 태블릿의 화면이 펼쳐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테르와 아시나가 사라지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드론과 태블릿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서기 2284년에 만들어져 2285년에 이곳, 대략 서기 765년 전후로 날아왔고, 지금이 서기 1221년이니 기간으로만 따지면, 대략 457년 정도를 살아온 기계이다.
물론 서기 838년 전후를 기점으로 태영이 다시 깨운 서기 1219년 가을까지는 잠들어 있었으니, 그 중간에 381년 정도를 뺀다고 하면 76년이다.
기계의 수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산수 계산하듯이 되는 것이 아닌 줄은 안다. 그래도 반도체가 이렇게 오래 사용이 가능한가?
21세기의 반도체 기술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데, 엄청나게 기술이 발달한 2284년에 만들어졌으니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 녹아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지만, 이젠 물어볼 대상이 없다.
테르.
주양세에게 들은 몇 마디 말로 찾아간 호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태영에게 기적을 선물하고는, 이렇게 홀연히 사라져 가려 한다.
아시나는 떠났지만, 테르는 얼마간 더 살아 있긴 해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여태 황궁 호장고를 털지 못하고 그냥 왔는데, 다음에 항주에 가면 기필코 털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곳에서는 또 무엇이 태영을 기다려 줄지 모른다.
아주 단순한 기능으로 동작시킬 수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이기에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첨단 장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는 것.
아, 이건 단순하지 않네.
배터리가 있는 스마트폰 스위치를 수초 간 계속 누르고 있어야 동작이 시작된다는 것.
테르처럼 한 사람이 엄지손가락 두 개를 지문 인식기에 같이 대고 몇 초간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지극히 간단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동작 원리를 몰라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첨단 기기들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기다려라. 제2의 테르야. 곧 찾으러 가마.
***
“아, 아바, 아바.”
아들 영환이가 제법 말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몇 단어밖에 안 된다.
이제 겨우 돌이 지난 때이니 많은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한다.
“저는 언제나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정하연이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자신이 영환일 재우러 간 사이에 아시나와 작별하고 자기는 불러 주지도 않았다고 서운해했지만, 아시나는 매정하게도 정하연에게는 단 한 번도 아는 체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
하긴, 그래도 서운하긴 하겠지.
“애를 잘 키우는 것은 엄마가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렇지 않나, 호장님?”
답답하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흑룡호로 개경에도 다녀오고, 황룡호로 상산과 후쿠오카에도 다녀왔는데, 전투가 없었다.
상산에는 물건 내려주고, 물건 싣고 오는 정도이니 그냥 왔다 갔다 하기만 해서 답답하다는 거다.
왜구를 때려잡지 못하니까 저런 거다.
“뉘에~ 저도 그리 생각하옵니다요. 피~이~이~이~”
태영이 놀리듯 말하자 반응이 저런다.
“남들이 안 보기에 다행이지 그렇게 말하는 걸 남들이 들으면 웃어.”
“웃으라죠, 뭐, 그나저나 서윤이는 왜 애가 안 들어서는 거야?”
괜한 질투이다.
물론 진짜 질투는 아니고 이렇게 셋, 아니 영환이 까지 넷만 있을 때는 간혹 저렇게 질투 섞인 말을 한다. 둘의 사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좋으니까.
“성님, 저도 잘.”
아시나와의 이별의 슬픔을 이제 다 털어 내긴 해도, 간혹 한 번씩 침울해지곤 하던 한서윤이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발라드 음악의 소리를 줄이며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는 나보다 서윤이가 서방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양보해야 하는 거야?”
지금도 그런데?
“아니에요, 성님.”
“농담, 장난. 알지?”
“네, 그럼요.”
“에이 참, 서윤이가 애를 가지면, 서윤이에게 영환이 맡기고 내가 따라나서면 되는데, 서윤아 피임 안 하는 거 맞지?”
그러게, 진짜 왜 임신이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름 이후부터는 피임을 하지 않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는다. 피임을 하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정하연의 저 요구 때문이었다.
물론 피임약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배란기를 피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피임을 했는데 그걸 피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네, 성님. 여름부터 안하기 시작한 걸요.”
“거 참 이상하지. 왜 애가 안 들어설까?”
혹시 미봉산, 그 일하고 상관이 있으려나?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검사를 해 볼 수도 없다. 여긴 13세기이지 21세기가 아니거든.
그러고 보니 미봉산에 피디지가 나타나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 영 소식이 없다.
어떤 일일까?
피디지의 현상을 보면 분명 자연 현상은 아니고, 라일리가 말한 강제적인 뒤틀림일 거라 생각되는데, 더 이상 안 생기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똑똑~
“들어와.”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잔디가 들어섰다.
“대장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 가시면 됩니다.”
“그래, 가자.”
“자동차 시동 걸어 두어서 안이 따뜻합니다.”
“운전은 가림이가 하나?”
“아닙니다. 오늘은 유시완이 합니다.”
정하연이 포대기로 꽁꽁 둘러싼 영환이를 안고 버스로 개조된 트럭에 올랐고, 태영과 서윤도 올랐다.
뒷좌석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미 탑승해 있었다.
“대장님, 어서 오십시오.”
“다들 나 때문에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출발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운전석에 앉은 유시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온정 철소.
지금은 온정 공업 단지라는 이름으로 바뀐 곳의 광장에 수백은 될 듯한 사람이 운집해 있다.
사람들의 중앙에 사람의 키 높이보다 조금 높게 쌓인 흙무더기가 있고, 그 옆에 대형의 트랙 불도저, 소형의 트랙 포클레인, 그리고 중형의 휠 로더가 각각 한 대씩 서 있다.
저걸 만들려고 공업부에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양산이 아니라 샘플로 각각 3대씩 만드는 데만 거의 2년이 걸렸지만, 그래도 빠른 것이다.
태영이 처음에 영상을 보여 주고, 그림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지금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역시 테르는 정말 보물이었다.
건설 장비, 도로 포장 장비, 탄광의 채굴 장비, 석유 시추 장비,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각종 장비들까지 정말 수많은 자료가 들어 있었다.
물론 그 중에 완전한 자료는 많지 않았지만, 약간의 결점이 있는 상태로 베껴낸 것은 태영이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무한정 필요하겠지만.
라일리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런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항모, 함정, 전투기와 수송기, 첨단의 살상 무기들에 대한 자료들까지 무기에 관심이 많은 태영도 놀라 자빠질 정도의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태영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자료를 정현에게 건네주었고, 그래서 불도저는 대형, 포클레인은 소형, 휠 로더는 중형이 되어 버렸다.
오늘 성능을 확인한 후에 양산에 들어가는데, 양산이라고 해 봐야 불도저는 50대, 나머지는 각각 30대 정도로 예정하고 있다.
다른 곳에 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며칠 후에 모터 그레이더와 드럼 소일 컴팩터 자료를 넘겨 줄 것이다.
모터 그레이더는 불도저가 밀어 버린 대지를 좀 더 평탄하게 고르는 기계이고, 진동 롤러라고 불리기도 하는 소일 컴팩터는 땅을 다지는 기계이다.
사람 수백 명 몫을 하는 기계들이지만, 불도저가 가장 시급한 기계였다.
자주포를 축소시킨 야포가 이미 완성되어 벌써 이십 문 넘게 생산되었지만, 사실 트랙 불도저가 더 반갑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랙, 흔히 말하는 캐터필러가 사용되었기에 자주포 차량 바디로 전환하는 과정이 쉽다.
저것들을 만드는 중에 휠 로더 바디에 중기관총을 얹고, 장갑으로 두른 전투 차량 2대가 만들어진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이름은 철갑 교위.
다른 기갑 병기들과 싸울 일이 없기에 장갑을 얇게 빼서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캐터필러 대신 휠 로더를 채택한 덕분에 주행 거리와 속도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기름통을 가득 채우면 6백킬로를 갈 수 있고, 속도는 평지에서 시속 60킬로 이상 달린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전차가 140톤의 무게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주행 거리 190킬로에, 속도 시속 40킬로에 비하면 월등하다.
장축을 늘렸기에 경사도 40도의 산을 오르는 등판능력을 가진 오프로드 차량이니, 도로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이 시대에 딱이다. 그건 아무도 모르게 시운전까지 하고 잘 감추어 두었다.
오늘의 행사는 모든 일반인들에게 불도저와 포클레인 같은 장비들을 알리는 날이다. 그래서 이렇게 공개 행사를 준비한 것이고.
“대장님, 기다렸습니다.”
정현이 입구까지 나와서 버스에서 내리는 태영 일행을 반겼다.
윤점돌을 비롯한 건설부의 사람들도 숱하게 와 있었다.
“수고 많아요. 정 부장, 윤 부장.”
“와, 대장님, 제게 뭐 저런 것이 있데요? 나는 우리 정 부장님이 말을 안 해 줘서 겨우 한 달 전에 알았는데, 진짜 대단한 물건이네요.”
“윤 부장이 제일 좋아하네.”
“그럼요, 그럼요. 저게 다 건설부에서 사용할 물건이잖습니까?”
“그래, 맞아. 잘 알면 정 부장에게 술이라도 사.”
“우허허허. 요새 자주 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싫어라 해요. 늦게 들어오고 술 먹고 온다고.”
에이, 엄살쟁이.
부인이 애를 가졌으니 늦게 오면 불안하지. 그래도 그 집에 꽤 여럿이 사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는데, 너무 많이 왔습니다.”
윤점돌에게 밀려 말할 기회를 놓쳤던 정현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보고 싶겠지요. 사람 수백 명분의 일을 혼자서 한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겠소?”
“도저는 수백 명분을 하고, 굴삭기는 수십 명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운전은 누가 해요?”
“건설부에서 시운전을 하고 연습을 했는데, 잘하는 사람이 몇 있습니다.”
이 시대는 현대보다는 기계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운전을 잘하면 좋은 거지.
간단한 인사말에 이어 세 명의 운전자가 각각 도저, 굴삭기, 이름이 담지기로 지어진 휠 로더 앞에 섰다.
삐이~
공업부의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름이 기억이 안 나지만 얼굴이 익은 사람이 호각을 불자, 가장 먼저 도저의 기사가 불도저에 올라가 시동을 걸었다.
부릉~ 부르르릉~
소리도 요란하게 엔진의 시동이 걸렸다.
우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커졌다.
“정말 대단해요. 수시로 봐 왔는데도, 새삼스럽게 대단해 보여요.”
불도저의 엔진 소리가 요란한 데다, 사람들의 함성까지 있어서 큰 소리로 말해야 했지만, 정하연도 한서윤도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끼르르르릉, 카라랑~
트랙을 밀고 가는 소리가 마치 나 여기 있소 하는 것처럼 들리며 도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캐터필러는 트랙을 최초로 만든 회사의 이름이라는 것을 태영도 대학 때 알았다.
도저 앞에 쌓인 사람 키 높이보다 더 높은 흙무더기가 불도저에 밀려 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더 커졌고, 어떤 사람은 껑충껑충 뛰기도 했다.
윤점돌은 엄지척을 하며 태영을 쳐다보았다.
“최곱니다. 흙을 저기 가져다 쌓을 때 스물이 닷새를 갖다 쌓았는데, 도저가 그냥 한 번에 밀고 가 버리네요.”
그때, 정하연이 태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손으로 온정 공단의 입구를 가리키는데, 홍문공도로 보이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일부가 가족을 데리고 올라온 모양이다. 걸어오기에는 제법 먼 길인데, 오는 중에 못 봤단 말이지.
공단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놀라움을 침착함으로 감추지 못해서 그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이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태영이 있는 쪽으로 오는 것도 여의치 않은데, 몇 사람이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들어와 공손히 인사를 한다.
“출발이 늦어서 늦게 도착했습니다.”
인사하는 사람의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서윤과 종씨라고 유난히 반가워하면서 자랑스러워했던 한재부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 상관없는 한씨인데도 그렇게 반가워했다.
한서윤은 태영이 붙여 준 성씨였기에 특별히 생각하지 않지만, 한재부는 그 내막까지는 모른다.
“어서 오시오. 방금 시연을 시작했으니 구경하시지요.”
정하연이 인사를 받자 대답했다.
“사포에 정착한 다른 고장 사람들도 저기 와 있어요, 대장님.”
“어디?”
“저기 저쪽이요.”
그쪽을 보니 정착 신고를 하러 왔던 얼굴들이 보였다.
사포의 소식이 알게 모르게 펴져 나가긴 한다.
상인들을 통해 퍼져 나가는 것은 알고 있고, 그랬기에 사포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조금씩 있다.
도망자도 있고, 가산을 정리한 사람도 있겠지만, 도망자를 잡으러 온 관군이나 추노꾼 같은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