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06
206. 이산(離散) 시대의 흔적(5)
세잎은 조이슬에게 가서 유리병과 대나무 집게를 받아 들고는 병에 든 하얀 조각 하나를 집주인의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잔디도 잔디지만, 왜구들에 대한 세잎의 원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정하연은 세잎이와 상담한 내용을 태영에게 말해 주었었다. 여군을 시켜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했던, 그날 저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마을에 쳐들어온 왜구들에게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 잡혀간 곳은 어딘지 모르지만 바다를 건너 사흘을 갔다.
벌집처럼 생긴 토굴집에 갇혀서 왜구들이 자신을 강간할 때엔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반항의 몸짓을 보였다가 얼굴에 피멍이 들고, 입술이 터지고, 온몸이 퍼렇게 되도록 맞았다.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그 고통스러운 왜인의 몸을 가위로 자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수없이 해 보았지만, 언제나 상상으로 끝났다.
자신의 몸을 탐하는 왜구를 칼로 찌른 후, 자신의 목을 칼로 찔러 죽는 것을 소원으로 빌었다.
죽지 못했다. 그렇게 죽을 용기가 없었던 것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 전전날은, 이대로 잠들어 아침에 눈뜨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여느 날처럼 또 눈이 떠졌다.
일어나기 전에 자리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그 전날은 무엇이든 목을 찌를 수 있는 꼬챙이를 찾아서 잘 숨겼다가 그것으로 목을 찔러 죽으리라 했다. 그러나 손에 나무 꼬챙이를 들고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목을 찌르지 못했다.
병신, 머저리라고 스스로 자책하며 오늘, 반드시 목을 매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왜구들을 다 죽이고, 앞으로도 다 죽일 것이라고 했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죽지 않고 또 깨어난 것을 원망하며 살았는데, 이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어서, 죽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구해져, 일부는 남고 일부는 고향으로 갔다.
부모님의 안부도 궁금했고, 어릴 때 함께 자란 친구들도 궁금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왜구들에게 변을 당해 돌아가셨다 했지만 친지들 대부분 살아 있었다.
잘 돌아왔다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왜 살아서 돌아왔느냐고 했다. 매일 집에 와서 악담을 퍼부었다.
나가서 죽으라고 했다. 갈 곳이 없었다.
왜국에 끌려가서 매일 몇 놈의 왜구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보다 더 비참했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여러 사람이 자살을 했다. 배를 타고 나가서 죽기도 했다.
그래, 거기나 여기나 다를 바 없었구나.
밤만 되면 왜구들이 순번을 정해서 자신을 강간하는 것이 없어진 외에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었다.
여기서도 살 수 없으니 이제는 죽어야지.
너희들 소원이 그거라면, 그래 소원대로 죽어 주마.
그랬는데, 왜국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다.
이젠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합니까?
왜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대로라면 죽는 것밖에 달리할 것이 없습니다.
내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내가 살던 고향에서도 쫓겨나게 만들어, 내 모든 것을 망쳐 놓은 왜구들에게 복수라도 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군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아이, 세잎이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외친 말이라 했다. 왜구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은 군인이 되는 길 외에는 없으니.
“불.”
백린 조각이 모두 올려지자 잔디가 왜인들만 쳐다본 상태로 소리쳤다.
세잎이 모닥불 지펴 둔 곳에서 불붙은 나무 하나를 들어 올린 후 잔디에게 전하려 했지만 잔디는 받지 않았다.
“네가 붙여.”
“네.”
세잎은 아무 예고 없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백린 조각에 불꽃을 가져다 내었다.
푸쉬쉬~
하얀 연기와 함께 바로 불이 붙어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네가 고려 사람들을 아주 많이 죽였다면서? 이제부터, 고려의 여인들을 죽이고, 잡아 온 대가를 치를 차례야. 나는 너희 놈들을 보면 이가 갈리거든. 그러니 기대해.”
세잎이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백린이 타들어 가는 고통은 입을 앙다문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칼로 찌르거나, 베는 것에 대한 고통은 최소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백린은 그렇지 않다.
살을 태우면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 계속 태워 가는 그 고통은 결코 참아지지 않고, 면역도 되지 않는다.
치지지지직~
푸쉬시시시시~
하얀 연기가 어깨를 파고들면서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불길이 빨갛다가 노랗다가 주황이었다가 하면서 살이 함께 타들어 갔다.
으아아악~
네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한쪽에 꿇어앉은 노비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렸다. 혹시 자신들도 저런 처참한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처참하군요.”
박해월이 약간은 안됐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인이지만 이런 모습이 가엽다는 것이겠지?
이런 이상한 곳에서 가엽게 여기는 마음은 즉석에서 깨 주어야 한다.
“잔디는 왜구에게 부모와 형제 모두를 잃고, 잡혀서 끌려가는 것을 내가 구해 내었어.”
“…….”
박해월이 조금 놀란 듯 태영을 쳐다보았다.
여기 와 있는 사포의 사람들은 고생 없이 편안하게 살아왔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놀라겠지.
“세잎이는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의 나날을 견뎌 내었어.”
“…….”
“여기 있는 우리 여군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왜구들에게 끌려가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할 만큼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야. 내가 구해 내기 전까지는.”
“…….”
“해나도, 가비도, 박해월 너도, 어렵고 힘든 고난을 겪어 왔다고 하겠지. 누가 더 고생하고, 힘들게 살아왔는지 비교하고 강조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저 사람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그건 고생도 아니야.”
“흑.”
해나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나왔다.
“지금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잔인하다고 말하면 안 돼. 그것은 저들을 모욕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왜인의 옆쪽에 꿇어앉은 여자들은 거의 기절할 듯이 울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있어.”
“…….”
그 말에 박해월이 태영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 지금은 누구도 자신이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아.”
“사포에서 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박해월은 일어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태영은 모르는 체했다.
“마, 마사시 흐억.”
드디어 왜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말해졌다.
작은 백린 조각이었기에 거의 다 타고 이제는 연기만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지만, 여태껏 비명을 지르다가 이제야 이름을 말한다.
“진작 말해야지. 다음부터는 묻자마자 답하라고. 네가 대답하지 않아서 불을 붙였는데, 일단 불이 붙으면 불이 붙은 부위를 도려내기 전에는 꺼지지 않거든. 그러니까 대답을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야.”
마사시라고?
한자로 바꿔 읽으면 바를 정(正)에 뜻 지(志)인데, 고려를 침략하고 여인들을 잡아 오고, 그곳의 양민들을 죽이는, 그것이 바른 뜻이야?
잔디는 비명을 지르다가 지친 듯 축 쳐져 있는 아들 중에 좌측으로 갔다. 그 둘의 어깨에 내려진 백린도 모두 타서 이제는 연기도 거의 나지 않았다.
잔디는 해나를 오라고 손짓했다.
“이놈이 좀 전에 너를 모욕했다. 그치?”
“네.”
“참고로 알려 주자면, 이것의 이름은 백린이다. 별명은 지옥의 천사라고 한다. 나쁜 놈들을 처벌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다.”
“네.”
“이놈 좌측 어깨하고, 허리에 걸린 옷자락과 몸 사이에 한 개씩 얹어 줘라.”
해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인 후, 세잎에게 병과 집게를 받아 들었다. 위력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작은 조각 하나는 왼쪽 어깨에, 조금 큰 조각을 열심히 찾더니 그것은 배 부분에 걸쳐져 있는 옷자락을 살짝 밀면서 그 사이에 끼웠다.
불이 붙은 나뭇조각을 가지고 그 앞에 섰다.
“아까 그 말, 한 번 더 해 봐.”
해나가 그놈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 그놈 참 무섭고 살벌하게 말하네.
“컥, 이 이년. 내, 내가 으으윽 풀려 나가만 하면 허억, 네년을 껍질부터 버, 벗길 거야. 허윽.”
저놈도 보통 독한 종자가 아니네.
우측 어깨에 올라간 백린의 불은 꺼졌지만, 그래도 고통으로 죽고 싶을 지경일 텐데 욕을 한다.
“그래, 네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희망이라도 가져 봐.”
그러고는 불붙은 막대기를 조금 전에 올린 백린 조각에 올려서 불을 붙였다.
어머니가 죽고, 동생 둘이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로 잡혀 와 4년이었다. 그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른다.
으아악, 아아아아악~
좌측의 마사시의 아들은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을 견뎌 보려고 볼을 깨물고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서도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마사시, 고려 연안에 몇 번이나 갔어?”
잔디는 마사시의 앞에서 물었다.
“…….”
“또 대답이 늦네.”
잔디는 세잎이 들고 있던 병을 받고 집게도 받았다.
“네, 네 번.”
“넌, 존대할 줄 모르나? 내가 네게 존대해 줄까?”
“네, 으으윽, 네 번입니다.”
“고려의 여인들을 몇이나 잡아 왔어?”
“배, 백서른.”
“백서른이나?”
“…….”
“또 대답 안 하네.”
“마, 맞다, 마, 맞습니다.”
“다 어디로 보냈어?”
“으흐으으으.”
“말하기 싫단 말이지?”
이미 백린 조각은 모두 타서 몸을 태워 들어가지는 않지만, 백린의 공포는 몸을 떨게 만드는지, 곰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잔디는 여전히 들고 있는 장도의 끝을 마사시의 오른쪽 무릎, 총 맞은 곳 옆에 얹었다.
총을 맞은 곳에서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고 아직 굳지 않은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다.
“모, 모두 파, 팔았다.”
“또 반말이네?”
“팔았습니다.”
“사람이 물건이야? 사람을 내다 팔게? 그래서 부자가 되어서 이렇게 큰 집에서 사는구나. 그치?”
“…….”
“또 대답을 안 하네.”
저 말에 대답을 어찌해?
그렇지만 지금 저 상황은 잔디가 갑 중의 갑이다.
“팔려 나간 장부 있어?”
“이, 있습니다.”
“어디에?”
그래도 명단을 작성해 두었네.
명단?
고려인의 이름을 왜어로 작성할 수 있나?
이놈들이 일제 강점기 때 하듯이 또 저희들 마음대로 한자어로 고쳐서 기록했을 가능성 백 프로다.
일제 강점기 때는 한글이 있었음에도 그랬는데, 지금 이 시대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이니, 이거야 말하나 마나 아닐까?
하,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대대장님, 저기 저 여자 앞세우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귀중품이나 보석류도 모두 쓸어 오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잔디가 신도익을 향해 말했다.
“그래, 거기, 거기 셋, 저 여자 데리고 가서 찾아와라.”
병사 셋이 꿇어앉은 여자 한 명의 포박을 풀어서 앞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보니까, 이만 한 집들이 꽤 많던데. 그놈들이 다 고려 여인들 잡아 와서 파는 거 맞지?”
그래, 그럴 것 같아. 여긴 교토에 가까워서 수요는 항상 있었을 것이다.
“나고야를 포격하지 말고, 시일이 좀 많이 걸리더라도 여기처럼 수색하면서 가야 하지 않았나 싶다.”
태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서윤에게 말했다.
“거기,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군대가 있는 병영만 포격했으니 혹시 잡혀 온 사람들이 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를 바라야지요.”
“그래, 하긴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니.”
“거기다 나고야는 여기보다 몇 배는 넓어서 수색하는데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맞다. 거긴 여기보다 훨씬 더 넓다.
인근에 작은 도시들도 오사카 인근에 비해 월등히 많다.
***
장부와 금은보석을 수색하느라 취조와 고문은 잠시 중단되었다.
사포의 병사들이 수색하고 정리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에 세잎이와 박해나가 나란히 서서, 계속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세잎이 뭔가 코치해 주는 것 같다.
박해나가 눈물을 흘렸고, 세잎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세잎이 눈물을 흘리고 박해나가 닦아 주기도 했다.
박해나는 아버지와 오빠가 살아 있고, 왜인들에게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엄마를 잃고 두 동생을 잃었다.
세잎은 박해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처절하게 망가진 아이다. 그렇긴 해도 상당한 부분의 동병상련의 아픔이 공유되는 사이여서 저런 듯했다.
장부를 찾아오고, 귀중품과 보석류를 모두 가운데 큰 전각의 방 한곳에 모았다.
금자와 은자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제법 큰 궤짝으로 두 개가 가득했다.
왜국도 화폐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기에 화폐의 형태로 된 것보다는 그냥 금 한 냥, 은 한 냥처럼 덩어리져 있다.
소유한 농토도 많고, 고려 여인들을 잡아다 팔아서 챙긴 것도 많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저택의 주인들도 이놈, 마사시와 비슷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여기 명부에 적힌 이름들 보면, 저 하인이 거의 다 압니다.”
집에서 일하는 하인 중에 비교적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하인이, 고려 여인들을 사간 왜인들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교토에 있는 모양이지?”
“네, 대략의 위치 설명을 하는 걸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열 명 정도는 저 산 너머로 팔려 나갔는데, 거긴 우리 진행 방향과는 다릅니다.”
“진이야, 위치상으로 어딘데?”
유진이가 태블릿을 가져와 보여 주는데, 23세기 지도에서 야마토타카다 시에서 나라 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연대장님에게 위치 알려 주고 다녀오라 할까요?”
서윤이 물었다.
“아니야. 길이 40킬로는 넘어 보이는데, 돌아 돌아가면서 경계까지 하고 다녀오려면 거기 다녀오는데도 이틀은 걸릴 거야.”
“철위로 가면 되지만 올 때가 문제가 되겠네요.”
철갑 교위는 길이 닦여 있지 않다고 해도, 이 지역의 대부분이 평지이니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구해 낸 사람이 몇이냐 하는 게 문제인데, 사람이 많으면 다 태우고 오지 못하게 된다. 그건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 된다.
“나중에 나하고 부실장이 같이 가든지, 아니면 교토에 갔다가 내려올 때 들리든지 생각을 좀 해 보자.”
태영이 가면 수분 만에 도착하고, 한두 시간이면 여인들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한 뒤에 그 여인들의 걸음으로는 아무 방해 없이 걸어도,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때에 여기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백 리가 넘는 길이다. 중간에 방해가 없다고 볼 수 없으니 태영이 함께 와야 하는데, 그러면 하루나 이틀이 날아가 버린다.
그들 모두를 구해야 할 책임이 태영에게 있는 것은 아닌데, 정말 다 구해야 할까?
개중에는 을목의 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을 수도 있다. 가 봐야 눈총을 받고 고생만 할 것이 뻔하니까.
“네, 그래요.”
“문패가 달린 것도 아니고, 찾는 것도 큰일이네.”
“문패요?”
“응? 응. 아니야.”
이 시대에 문패 같은 거 없지.
아버지는 아파트나 연립 같은 공동 주택으로 바뀌면서, 문패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동 호수 표지판이 붙었다고 했다.
태영도 문패를 본 기억이 많지 않지만, 은율이와 데이트하면서 북촌 한옥 마을인가 거기를 갔을 때 문패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은율이가 생각난 것도 오랜만이네.
이젠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고무신 바꿔 신은 지 6년은 지났으니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어딘가에 취업해서 태영 대신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겠지.
이 시대로 날아올 줄 알았으면, 그때 고무신 바꿔 신은 것은 아주 잘한 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냐?
“무슨 생각을 하세요? 실장님 생각해요?”
“왜? 그래 보여?”
“네.”
이런 것이 여자의 촉인가?
무섭다.
잠시, 불과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6년 전 사귀던 연인을 떠올렸는데 바로 눈치를 채고 물어본다. 다만, 물어보는 대상이 6년 전의 연인이 아닌 현재의 정하연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