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1
021. 습격(2)
정하연의 표정도 울 것 같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긴 해도 울지는 않지만 별이와 별다를 것이 없다.
무심결에 영어로 된 배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도 별이가 말을 알아듣고 배낭을 잡자마자 신도익이 재빨리 들어서 태영의 옆에 놓아주었다.
하여간 애가 눈치 하나는 참 빨라서 좋다. 분명 배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것임에도 금방 알아듣고 가져다주었으니.
배낭 안에 있던 짐들의 대부분은 장 속으로 들어갔기에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소독약과 치료제는 옮긴 기억이 없기에 배낭에 손을 밀어 넣고 이쪽저쪽 움직여서 찾아냈다.
“여기 있군.”
“의원, 상처 자리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 여기 좀 기웁시다.”
소독약을 몰라서 엉거주춤하고 있던 의원이 또 멍한 표정으로 태영을 쳐다본다.
“나리, 무슨 말씀이신지?”
“깁는 거 몰라요?”
“네?”
“옷이 찢어지면 바느질을 해서 깁듯이, 살이 찢어졌으니 여기도 바느질을 좀 하자고.”
태영의 목소리에 놀란 사람은 의원만이 아닌 모양이다.
주변에 서 있던 신도익을 비롯한 가병들과 정하연을 비롯한 여자애들과 별이까지도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안 기워 봤소?”
“으흐, 그게…… 그렇게 치료해 본 적이 없어서.”
의원은 멈칫거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은 한다.
“그럼, 살이 찢어진 것은 어떻게 치료를 했는데?”
“고운 천으로 잘 싸매었사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서야 치료가 제대로 되나. 살이 벌어져서 나중에 상처 자리가 크게 남지 않소?”
“크게 남기는 하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어쩔 수 없긴 개뿔. 치료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지.
“이런, 이런! 별아, 바느질할 때 쓰는 큰 바늘 있느냐?”
“네? 네. 나리.”
“의원은 거기 있다가 내가 하는 것 보고 배운 뒤에 다른 사람들 다치면 그대로 하시오. 별이는 바늘하고 단단한 실하고, 가위를 좀 가져오너라.”
“네, 나리.”
별이가 후다닥 사라지는 것을 보고 태영은 배낭에서 꺼낸 소독약을 부었다.
치이익~ 푸스스스~
소독약이 흐른 자리에 비록 작은 소리가 났지만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엄청난 아픔과 따가움이 온몸을 떨리게 했지만 이빨을 앙다물고 참았다. 그러자 소독약으로 인해 이제는 제법 딱지가 앉았던 핏물이 씻겨 내려갔다.
솜이 없잖아. 젠장.
“정 실장, 수건 있지?”
“네, 나리.”
대답을 한 정하연이 태영이 사용하던 수건이 어디 있는지를 알기에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걸 가져다주었다.
“이거, 이쪽에 좀 비춰 봐.”
태영이 큰 랜턴을 정하연에게 주자 스위치를 눌러 불을 환하게 밝혀서 상처 자리를 비췄다.
촛불을 열 개나 켜 두긴 해도 상처 자리에는 랜턴의 불빛이 더 밝게 보였다.
정하연이 랜턴을 켜자 주위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그 표정들을 보며 재미있다고 여길 틈이 없었다.
태영은 수건 한쪽을 손가락에 말아서 소독약으로 피딱지가 녹아 흐르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의원은 태영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리, 여기 가져왔습니다요.”
족히 7센티 길이는 될 것 같은 바늘과 삼베 실이다.
바늘에는 이미 실이 끼워져 있지만 바늘이 일직선이었다. 손으로 바늘을 한번 눌러 보았다.
상처를 꿰맬 수 있도록 둥글게 휘면 부러지지 않을까?
태영은 잠시 생각했지만, 배낭에서 펜치 하나를 꺼냈다. 펜치가 차량용 공구여서 크기도 무식하게 크고 기름때도 묻어 있었다.
수건 한쪽에 소독약을 부어서 펜치의 앞부분을 적당히 닦은 다음에 바늘 뒤쪽을 물고 휘었다. 바늘은 다행히 부러지지 않고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 바늘에 다시 소독약을 부은 후 실에도 적셨다.
“의원. 여기 살이 벌어지지 않게 꼭 좀 눌러요.”
“네? 네. 나리.”
연고를 짜서 벌어진 살갗에 문질러 바른 뒤 의원에게 잡으라고 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상처 자리를 외면했지만, 그래도 의원이라고 눈을 돌리지 않기에 시킨 것이다.
태영은 바늘을 펜치로 잡고, 살갗에 가져다 대었다.
제대로 된 소독약도 없으니 마취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펜치 끝으로 바늘을 집고, 상처 자리는 의원에게 잡으라 한 뒤 바늘을 찔러 넣었다.
“으으윽.”
생살을 마취도 없이 찌르는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있나?
거기다가 자신의 살을 자신이 찌르는데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천하에 그런 독종도 없을 것이다.
피가 번져 나오면 소독약을 붓고, 다시 바느질을 해서 끝을 묶고 하기를 무려 열 바늘이나 꿰매었다.
제정신으로 자기 살을 마취도 없이 꿰매는 짓은 다시는 못 할 짓이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치료해 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으니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지금 해내고 있었다.
태영이 제 살에 바늘을 꽂을 때마다 여자들은 입을 앙다물고 신음을 삼키면서 얼굴을 돌렸지만, 그래도 의원과 신도익을 비롯한 가병들은 인상은 찡그리면서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기워진 살갗에 다시 소독약으로 씻어 내었지만 피는 여전히 조금씩 배어 나왔다.
외상 연고를 더 짜서 꿰맨 위로 다시 발랐다. 그리고 거즈를 위에 얹은 다음에 의원이 건네준 붕대로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싸매었다.
그래도 트럭에서 이런 것들을 찾아 가져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의원 강성호가 가져온 대바구니에는 거즈는커녕 붕대도 보이지 않았었다.
삼베로 된 수건 같은 것이 보이기는 했지만, 뭘 하는 용도인지 모르겠다.
“휴.”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
주위에 둘러선 가병들과 하인들이 무언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태영은 무시했다.
“의원, 보았소?”
“네, 나리.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요?”
“이렇게 꿰매면, 우선 살이 갈라지지 않아서 치료가 빠르고, 또 손상된 근육이 원래에 가깝게 붙어요. 그다음은 사람 몸의 자연 치유력에 맡기면, 원래처럼 되돌아가려는 성질로 인해 자국은 어쩔 수 없이 남아도 전처럼 힘을 쓰거나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지는 거요.”
“아. 그런, 그런 일이.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것이옵니까?”
의원이 소독약과 연고를 가리켰다.
“이건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것인데, 파상풍을 막고, 합병증과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아 주며, 이건 상처 자국을 최소화하면서 상처가 빨리 아물도록 해 주는 외상 연고제요.”
태영은 의원이 신기해하는 것 같아서 선선히 이야기해 주었다.
“소인이 한번 볼 수 있겠는지요.”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마 같은 것은커녕 비슷한 것도 쉽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오. 워낙 기술이 필요한 귀한 약이라.”
의원이 소독약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고, 손끝에 찍어서 혀끝으로 맛을 보기도 했다.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소독약과 외상 연고에는 한글로 성분과 함량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들이 그것을 읽을 수도 없고, 설사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태영이 의학이나 화학 공학 같은 지식은 전혀 없으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독약, 저건 제법 큰 병인데도 삼천 원 정도면 살 수 있고, 거기다가 외상 연고에 거즈까지 모조리 합쳐 봐야 만 원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구할 수 없는, 정말로 귀하고도 귀한 약이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큰 상처를 입은 데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밤에 아마 고열이라는 후유증이 나타날 것이고, 당분간 운신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외지에서 다치면 가장 서럽다더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되었다. 이제 모두 가 보거라. 신 부호장은 경비를 더 강화하고.”
“네, 나리.”
다들 나가는데 정하연과 별이, 그리고 신도익은 안 나간 채 그대로 있었다.
정하연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고, 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면에 웃음이 활짝 걸렸다.
“이제 정 실장께서 함께 계시면서 나리의 용태를 살펴 주시지요.”
“네, 그렇잖아도 그리할 생각입니다.”
뭐? 뭐라? 이 무슨 소리야?
아무리 정하연이 어려 보이기는 해도, 남녀가 야심한 밤에 함께라니.
남자와 여자가 밤에 한 방에 있으면 딱 두 가지밖에 할 일이 없다.
함께 잠을 자는 것과, 또 함께 잠을 잔다고 말하는 그것, 그것 두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데 함께 있으라고?
“신 부호장, 함께 있으라니?”
태영이 깜짝 놀라 신도익에게 고함을 쳤다.
“네? 나리, 무슨 말씀이신지요. 정 실장님과 혼인하실 것이 아니옵니까?”
신도익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혼인이라니?”
“나리, 정말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뭘 몰라?”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다리가 성하면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댕기 말이옵니다. 댕기.”
신도익이 황당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대체, 댕기가 왜?”
“처자가 사내에게 댕기를 주는 것은 곧 자신의 낭군이라는 의미이옵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사내가 처자에게 댕기를 받은 것은 혼인을 하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내자로 정했다는 것이옵니다. 정녕 이를 모르시옵니까?”
뭐?
머시라?
하, 정말 돌아 버리겠다. 그래서 아까 댕기를 달라고 할 때, 바로 풀어 주지 않고 잠시 망설였던 것인가?
댕기에 그런 의미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아, 정말 미쳐 버리겠다.
정하연을 바라보았다.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머리를 두 갈래로 갈라서 붉은색 댕기가 아닌 희끄무레한 천으로 머리끝을 묶었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모두 다 한 줄로 머리를 땋고 붉은 댕기로 끝을 묶었는데, 결혼한 여자들은 머리를 올리거나 양 갈래로 내려서 붉은색이 아닌 것으로 묶었던 것 같다.
그럼, 저렇게 양 갈래 머리를 했다는 것은, 난 이제 유부녀입니다 하는 표시?
태영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라니.
신도익의 말로 미루어 보아, 오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이건,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정하연에게 완전히 코 꿰인 거잖아?
“나리, 감축 드리옵니다.”
별이의 말이다.
무슨 말라비틀어진 감축?
솔직히 마음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예쁜 데다 귀엽기까지 하지, 키도 크지. 이곳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공부도 많이 했지. 똑똑하지.
사실 율촌과 사포를 통틀어서 제일 예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가 태영이 사포나 율촌에서 본 여자들은 기혼, 미혼을 가리지 않고 정말 키가 작다.
두 마을 모두 다 여자들은 태영의 어깨 아래에 오고, 남자들은 아무리 큰 사람들도 태영의 귀 부근에 온다.
그 정도로 다들 키가 작은데, 정하연은 여자이면서도 귀 아래에 올 정도이니 정말 월등한 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결혼을 하면 어쩌자는 것인데?
물론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못 간다고 포기하며 살 수는 없는데, 덜컥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인데, 아이가 생기면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잖아?
그리고 스물셋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말도 안 되지. 아니 완전히 미친 거지.
거기다가 정하연은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중3짜리와 결혼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거야?
“소장은 그만 물러나겠나이다. 정 실장께서는 나리를 잘 보살펴 주시지요. 그리고 별이는 수발을 잘 하거라.”
신도익의 말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도 정하연에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니 나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 인정하고, 지금 신도익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데, 태영이 아니라고 하면, 정하연은 어찌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신 부호장. 살펴 가십시오.”
정하연이 신도익에게 하는 어투가 바뀌었다.
여태까지는 윗사람 대하듯이 했다면, 지금의 말은 상관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말하는 느낌 같았다.
신도익도 여태까지 하던 말과는 어감과 어투가 완전히 달라졌다.
신도익이 물러나고, 이것저것 정리를 도와주던 별이도 나가고, 태영과 정하연 단둘이 남았다.
허벅지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기는 해도 마취제나 진통제도 없는데 그 통증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욱신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데다 두 사람 사이에 가라앉은 듯 남아 있는 침묵에 더욱 난처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참. 이런 느낌이라니.
얼굴을 들어 태영을 힐끗 쳐다본 정하연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제법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그래, 등 떠밀려서, 그리고 관습을 몰라서 이리되었는데,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이곳에서는 현대 사회에서처럼 서른 즈음에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 나이에 맞는 미혼의 여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정하연처럼 열여섯 살이라면 반 정도는 유부녀인데, 태영이 서른 즈음 되었을 땐 그 나이에 맞는 여자는 돌싱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말이 좋아 돌싱이지 정확한 사실은 이혼녀다.
이혼녀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이혼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손해 보는 느낌 아닌가?
그리고 정하연 말고 말이 통할 만큼 공부를 한 여자가 이 시대의 어디쯤에 있기나 하려나.
개경에 가면 혹 많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율촌이나 사포에서는 없었다. 아니, 몇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정하연과는 비교의 대상이 아예 아니다.
거기다가 좀 예쁘고 좀 귀엽게 생겼어?
어디에 저리도 예쁜 여자가 또 있기나 할까?
나이가 좀 더 들었다면 태영이 먼저 덤벼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받아들이자.
그리 생각하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달라 보였다.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야?”
“…….”
재가 왜 저래 대체?
평소에 전혀 보지 못하던 행동과 모습이었다.
“이리 와.”
태영의 부름에도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몸을 일으켜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태영의 앞으로 왔다. 그래도 두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평소에 저렇게 얌전한 스타일은 아닌데 별일이긴 하다.
그 모습을 보고 태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하기에 그 손을 잡고 품으로 당겼다.
태영이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인지라 정하연이 몸을 낮추며 아무런 거부감 없이 태영의 품으로 넘어지듯 안겨 왔다.
등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 있었던 일로 인해, 아까 여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 실장과 내가 혼인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단 말이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어깨에 전해졌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사포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 실장을 좋아하기는 해, 그런데 정 실장은 날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 아닌가?”
“아, 아니옵니다. 소녀가 아직도 혼인하지 않은 것은 소녀의 배필이 될 만한 사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소녀가 나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대로 보자면 정하연이 잘나긴 했지.
여자가 이리 잘나면 배필을 구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소녀는 나리가 왜구의 손에서 구해 주던 그 순간부터 사모하게 되었사오나, 감히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소녀가 다른 사내들을 보고 무언가 부족하다 느꼈듯이, 나리께서도 소녀를 모자라다 느끼지나 않으실까 저어하여 혼자서 속으로만 애를 태웠는데, 이렇게 되어서라도 나리의 짝이 되게 되었으니 부디 나리께서 내치지 않으시면, 온 힘을 다하여 나리에게 걸맞은 배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랑 고백인 셈이군.
사랑 고백을 옛날식 화법으로 하는데, 고려 시대적인 사랑 고백이라.
그것도 여자가 먼저.
기도 안 찬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태영에게 한참 모자라니, 모자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남녀 관계에 그런 것이 어디 있으랴만, 그래도 뜻이 참으로 가상했다.
얘를 집에 데려다주려다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한 칼 먹고, 그로 인해 덜컥 마누라가 생겨버린 셈이다.
그것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나이인 스물세 살에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는 마누라가 생긴 것이다.
참으로 황당했다.
아버지나 엄마가 이 사실을 들으면 얼마나 황당해하실까?
대체로 이곳 사람들은 결혼들을 일찍 하니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태영의 기준으로 보면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아니, 현대에서 고려 시대로 날아온 이 상황이 더 황당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