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19
219. 역사의 유산(5)
“뭐라는데?”
“선화 상단 손님이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한답니다.”
하긴, 배 안에 있으면 답답하기도 할 테고, 왜국의 수도가 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이젠, 전투 위험도 없어졌으니 오라고 해도 되려나.
“거참, 골치 아프게 하네. 장호, 철갑 교위에 연료 얼마나 남아 있나?”
“눈금 상으로는 9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눈금 9이면 거의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실제 눈금 기준으로 보면 11 정도 들어가니까, 연료는 충분히 남아 있다. 하긴, 오사카에서 내려서 여기 온 것밖에 없으니.
“지금 철갑 교위 보내겠다고 해. 그걸 타고 오라고 하고.”
“네, 전달하겠습니다.”
전달 방식은 드론을 시야에 보일 만큼 낮게 날려서 허공에 글씨의 형태로 알리면 된다.
“거리가 얼마나 되지?”
“직선거리로 55킬로쯤 됩니다.”
“그럼 대략 60킬로는 넘을 텐데, 가는데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은 걸리겠네.”
철갑 교위의 속도는 평지에서 60킬로, 강을 건너야 하고 조금은 꼬불꼬불한 길인 데다, 평지라 해도 흙길이어서 길이 평탄하지 않으니 그 정도는 걸릴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올 때는 해가 진 뒤이겠지만, 철위에 전조등이 있으니 별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연대장, 지금 철갑 교위 황룡호에 보내 줘. 그리고 선화 상단 손님하고, 송산과 송도 참관단도 함께 데리고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김웅겸은 대답하자마자 곽병선을 불렀다.
“다녀오겠습니다.”
곽병선은 재빨리 거수경례를 하고는, 철갑 교위가 있는 회창문 앞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연대장, 여기에 고려 말을 하는 근위부 병사가 있었어.”
“고려 말을 한다구요?”
“그래, 왕실파의 근위부인데, 지금 그들이 무장을 하고 궁내에 막부파 색출자 수색하고 있어. 누구 시켜서 타카오 신고라는 근위 대원을 좀 찾아오라고 해. 그리고 그놈에게 물어서 근위부와 병위부에서 고려 말을 하는 사람은 찾아서 같이 오라고 하고.”
“네,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불러와 놓고 볼 일이다.
김웅겸은 유진이에게 근위병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박해인.”
태영이 지시하는 동안, 박해나를 백 허그로 안고, 박해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박해인을 불렀다.
“네, 대장님.”
“근위병들 중에 고려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
“아닙니다. 저희들 앞에서 고려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감추고 있었다는 거네.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다. 곧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된다.
“그래?”
“네, 그런데.”
“그런데?”
“간혹, 소인을…….”
“소인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소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간혹,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근위부의 번이나 곤란한 상황에서 끼어들어 어려움을 해결해 준 병위부의 번이 있습니다.”
번이라고?
대번역?
혹시, 설가의 고구리인들과 벌도 화지의 신라인 마을을 쳐들어와서 조져 버린 그 카이세이 인가 하는 놈이 일했다는 대번역이 조금 전에 박해인이 말한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유를 짐작해 봤을 거 아닌가?”
일단 궁금증을 묻어 놓고 물었다.
“사실 집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는 감히 눈을 마주치면 안 되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고, 대장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만, 왜국은 여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곳이기에 그런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짐작했습니다.”
여인에게 가혹한 곳, 맞지.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에, 왜국에서 태어나서 어른이 되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일이었을지라도, 고려에서 태어나 어른이 되어, 이곳 왜국으로 잡혀 왔으니 여인에게 가혹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거기다 박해인은 양반집 딸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눈을 마주치는 것이 금기인 시대지만, 왜국에서는 목을 내놔야 할 수도 있다.
“혹시, 병위부나 근위부에 소속된 병력을 번이라고 부르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맞군.
궁 경비대.
카이세이를 물을 필요는 없다. 이미 죽어서 바닷속으로 사라진 놈이다.
***
“이름이 뭐라고?”
태영의 앞에 다섯 명이 복장은 갖추었지만, 병장기는 없는 상태로 섰다.
풍락원의 전각도 태극전처럼 돌을 깎아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건물이 서 있다.
기단의 높이는 사람의 키보다 더 높아서 풍락전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따로 만들어 둔 것이 태극전과 비슷한 양상이지만, 태극전은 정무를 보는 곳이고 풍락전은 놀자 판을 까는 곳이어서 모양은 사뭇 다르다.
태영은 기단 아래에 서 있는 다섯 명을 기단 위로 불러 올려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앞으로 불렀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고려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타카오카 신고 데스.”
“고려 말로 해.”
“네, 고구 신오(高丘 新吾)라 합니다. 그리고…….”
“각각 자기가 말해.”
“석야 유성입니다. 여기서는 이와노 류세이라고 부릅니다.”
“시라기 타이치, 아, 아니 신라 대지입니다.”
“우나바라 와타류.”
“고정 청도, 다카이 세이토라 합니다.”
다섯이 제각각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네 번째가 왜어로만 말하면서 아주 강한 적대감을 표한다.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이해를 한다.
태영이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불렀건 간에 이들과 사포군이 여전히 적인 것은 분명하니까.
“너, 이름 다시 말해 봐.”
태영은 네 번째, 자신의 이름을 우나바라라고 말한 자를 쳐다보고 말했다.
“우나바라 와타류.”
우나바라 와타류(うなばら わたりゅう)라 발음한 것을 보면 해원 도류(海原渡流)가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왜어는 같은 한자라도 발음이 다르기에 발음만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어서 한자로 꼭 써야 한다.
그런데 이름을 묻는 고려 말을 알아들으니 대답하는 것이 분명한데, 대답은 왜어로 한다. 혹시, 고려도해처럼 그런 경우인가 싶은데, 얼굴에 나타난 적대감이 과하다.
“왜인이야? 아니면 고려인이야?”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
묵묵부답.
여전히 적대감만 강하게 표시할 뿐이다.
자신을 신라 대지라고 말했던 자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우나바라를 한번 쳐다보았다.
복장으로 봐서 우나바라는 근위부의 번이고, 신라 대지는 병위부의 번이다.
왜인이냐, 고려인이냐 묻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도 안 되기는 하지만,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질문에 답하지 않고 뻣뻣한 이유는 뭘까?
대화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런 사람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 태영이 손으로 제외시키라는 표시를 했다.
“치웁니까?”
한규장이 물었다.
“그래, 치워.”
한규장이 병사를 시켜 우나바라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하자,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사포 병사를 거세게 밀치는 그 순간 병사의 허리에 달려 있는 소도를 뽑아냈다.
?
소도는 병사의 허리에서 뽑혀 나오는 그 동작의 연장선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한규장의 목을 향해 비스듬히 베어 갔다.
저리 가까운 곳에서 날 길이가 불과 40센티 정도 되는 칼로 순간적으로 휘두르면 목이 반쯤은 잘릴 것이다.
그건 바로 죽음이다.
사포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갑옷 같은 것으로 방어 무장을 하지 않는다.
목 앞, 불과 5센티쯤 전방에서 딱 멈춘 소도.
날이 부르르 떨렸다.
한규장은 깜짝 놀랐고, 태영이 고개를 돌려보자 서윤이 눈에 파란빛을 뿜으며 손끝을 돌리고 있었다.
서윤이 막지 않았으면, 한규장의 목을 반쯤은 잘라 내었을 것이고,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태영도 방심했고, 한규장도 방심했고, 병사들도 방심한 것 같다.
총을 가진 상태에서 칼을 가진 병사들을 상대했고, 특히 이곳 평안경에 와서는 백색 탄을 이용하거나 박격포로 적을 괴멸시켰기 때문인 듯하다.
“하아.”
한규장이 침음을 토했고, 서윤은 우나바라의 몸을 띄워 올렸다.
서윤의 시선이 풍락원 밖의 광장으로 향하면서 우나바라는 풍락원 밖으로 날아갔고,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남은 네 명의 표정에 경악스러움이 가득했다.
우나바라는 공중으로 한참을 솟아오르더니 몸을 거꾸로 세우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퍽~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거꾸로 내리꽂혔기 때문에 사람의 몸으로 볼 수 있는 형체는 허리부터 발까지만 겨우 유지하고 있고, 머리부터 허리까지는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단단한 흙바닥이었기에 땅속으로 몸이 파고들지도 못한 상태 그대로 짓이겨진 상태다. 피가 사방에 흥건하게 흘렀다.
온몸에 있는 피라는 피는 다 흘러내린 듯했다.
“허억.”
그 광경을 본 네 명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감히,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칼질을 해?”
우나바라를 메다꽂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서윤의 입에서 고함이 나왔다.
“너희 넷, 나와.”
서윤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더니 네 명이 나비처럼 날아서 풍락전 밖으로 나갔다.
“아아악, 아악.”
“으아악.”
네 명은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몸이 공중에 떠 있으니 자신이 자신의 몸을 어찌할 수 없다.
땅 위 3미터 정도.
그곳에서 서윤은 손을 거둬들였고, 네 명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트리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고생 좀 하라는 소리다.
그렇다고 해도 약간의 부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리가 아래로 향한, 정상적으로 사람이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무언가가 받치고 있던 발아래의 받침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철퍽, 쿵~
셋은 몸을 움직였지만, 한 명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거나 기절했거나.
으으으~
낮은 신음이 입에서 배어 나왔다.
“꿇어라.”
왜어가 아닌 고려 말이다.
얼마나 부상을 입었는지는 모르지만, 서윤의 말에도 아주 느릿느릿 반응하고 있었고, 입에서 낮은 심음이 계속 나왔다.
퉤~
한 명이 입에서 시뻘건 침을 뱉어 냈다.
“우욱, 우웩.”
죽은 우나바라의 시신을 쳐다보던 한 명이 입을 벌리고 토하는 모습을 했다.
처참하게 뭉개진 모습에 사포의 병사들도 곁눈으로 쳐다보기만 했을 뿐 그쪽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꿇지 않으면 죽는다.”
차르르르~
그렇게 말한 서윤의 손에서 쇠버리 수십 개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세 명이 몸을 비척거리며 무릎 꿇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한 명, 자신을 석야 유성이라고 말했던 고려인의 몸을 흔들었다.
“우리는 고려 연안의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왜구를 정벌하러 왔고, 고려 말을 하는 사람은 고려인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너희들 역시 고려인으로 구분했는데, 너희에게는 우리가 적이었던 모양이구나. 이제부터는 우리도 너희들을 적으로 대하겠다.”
서윤의 경고성이 조용히 울렸다.
저들이 무릎을 꿇어서 쇠버리는 조끼 주머니로 다시 들어갔지만 경고는 묵직했다.
“아, 아닙니다. 결코 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서윤이 보여 준 절대적인 힘 앞에서 항거하면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더 항거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해원 도류가 우리와 생각이 달랐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려인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짜 내어 변명을 했다.
“입 다물라.”
비명이 섞인 말로 해명을 했지만 바로 잘랐다.
“중대장님.”
서윤이 한규장을 불렀다.
“충성! 부실장님.”
한규장이 거수경례를 하고는 손을 내린 뒤 아무 말 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하명하십시오.”
허리를 편 한규장이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차렷 자세로 섰다.
“저놈들 포박하세요.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참살하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압수합니다. 다친 놈이 있으면 의무병에게 보이기는 하되,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두라고 하세요.”
“명 받듭니다.”
서윤이 내린 명령은 태영의 생각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아니, 치료를 해 주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치료는 해 주라고 한다.
“3중대, 집합.”
한규장의 중대가 3중대, 이번 원정을 위해 임시로 부여한 부대 번호이다.
중대원들도 그 상황을 보았기에 더욱 빨라졌다.
‘후와, 부실장님 아니었으면 중대장님 큰일 날 뻔했어.’라거나.
‘부실장님, 정말 대단하셔.’ 같은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에 대해 서로 주고받는 말소리들로 조금 웅성거렸다.
태영이 봐도 서윤의 저 능력은 정말 대단하고 부럽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괘씸한 놈들.
“묶어라.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허튼짓을 하면 선 참살, 후 보고한다.”
한규장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방금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자신도 알기 때문이었다.
“네.”
“이 순간부터 이들은 적군 포로로 취급한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해가 넘어가고 겨울의 기온은 햇빛이 사라지면서 더욱 차가워졌고, 분위기도 더욱 싸늘해졌다.
“저건, 궁내 일꾼들 시켜서 치우고, 불을 밝혀라.”
이젠 김웅겸이 나섰다.
태영까지 꼭 나설 필요는 없다.
방금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김웅겸도 열 받았다는 소리다.
“오규보는 수색조들의 수색 중단과 동시에 경비 순찰 편성표를 각 중대에 전달하라. 순찰조는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고 무장을 갖춘 자는 이유를 떠나서 무조건 현장 사살을 원칙으로 하고, 통행증을 소지한 자라고 하더라도 대적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역시 사살 후 보고하도록 전달하라. 식사 후에 회의를 할 것이니 중대장 이상은 전원 참석하라. 식사는 이곳 풍락원에서 할 테니 그에 맞추도록 하고, 각 중대 단위로 교대로 식사하되 음주는 금한다. 이상.”
“넵, 충성!”
김웅겸이 필요 사항을 외고 있는 것을 풀어 놓듯 지시했다.
오규보가 김웅겸이 지시한 내용을 기록하고는 이연과 채민을 불러 지시 사항에 대한 업무를 분장했다.
“잔디야, 3중대장에게 말하고 고구 선오 좀 불러와라. 중대장 함께 오라고 하고.”
“넵, 대장님.”
저녁이 준비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다.
무언가 확인을 좀 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 시간을 이용할 생각이다.
***
고구 선오는 포박을 당한 채 풍락원 안으로 들어왔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제법 다친 듯한데, 걸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린다. 입가에 배어 나온 핏물이 묻어 있는 것으로 봐서 속을 다친 모양이다.
입에서 핏물이 넘어왔겠지만 포박당해 있고, 씻을 것도 주지 않았으니 그럴 것이다. 다리에는 붕대를 감았는데, 거기도 핏물이 배어 있었다.
“연대장하고, 대대장 둘 다 들어와.”
비서실 병사들이 궁인들을 시켜 촛불을 밝히고, 차를 준비하게 했다.
한규장의 소대원 둘이 고구 선오를 바닥에 꿇어앉혔다.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고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희밖에 없다. 그 점을 알고 있도록 해라.”
“죄송합니다.”
조금은 황망한 모습으로 사죄를 하는데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뭐든 말해 봐.”
“…….”
“할 말 없어?”
“무엇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선, 너희의 정체부터 말해 봐 왜 왜국의 왕궁에 번으로 있으면서 고려 말을 쓰는 거야? 그리고 너의 성은 왜 고구인 거지?”
“부친과 조부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으로는, 당나라에게 멸망당한 고구리의 후손입니다. 당나라에서 수많은 고구리인을 당으로 끌고 갔는데,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피해서 도망쳤다 하였습니다. 하나, 신라는 당과 함께 고구리를 공격하는 적이었기에 신라로 도망치지 못하고 왜국으로 도망하였다 하였습니다.”
공식 기록으로 20만 명을 끌고 갔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셀 수조차 없다고 들었다.
“고구리가 멸망한 지 550년이 지났다. 알고 있느냐?”
“……몇 년이 지났는가는 모르옵니다.”
“아무튼, 어떻게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느냐?”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긴 세월을 내려온 것, 그것이 중요하다.
“조부님은 때가 언제가 되었건, 반드시 돌아가서 옛 터전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려면 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하였습니다.”
“당나라는 멸망했다. 그것도 알고 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나라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맞는 말이네.
그 땅이 그대로 있고, 그때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그것대로 역사의 소용돌이일 뿐인데.
“언젠가 돌아가서 되찾아야 할 것이라는 그 생각과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높이 사줄 정신이 맞다. 그런데 아까 그자는 왜 그랬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느냐?”
“우나바라는 신라 귀족의 후손입니다. 이름이 해원 도류인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세력에 가담한 무리와 대립하다가, 본인의 말로는 모함을 당해서 멸문지화를 면하려고 이곳으로 도망을 왔고, 왜국에서 힘을 키워 반드시 고려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을 염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짐작대로 해원 도류가 맞군.
모함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때 새 왕조에 반하는 세력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멸문지화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켜?
웃긴 놈일세.
이런 놈들이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같은 때, 적극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인들을 죽이고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선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답은 정해졌군.
“지금 고려의 황제가 그 왕건의 후손이다, 우리가 고려군이어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그리 짐작할 뿐이옵니다.”
“헛된 야망을 가지고 있었군.”
“…….”
고구 신오는 고개를 숙였다.
“신라 대지, 고정 청도, 석야 유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성향을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