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2
022. 습격(3)
태영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꼬물꼬물 움직이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리고 작고 말랑말랑한 몸을 가진 고양이인 듯했다.
따뜻하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는데?
눈을 떴다.
날이 밝았는지 실내가 제법 환한데, 정하연이 한쪽 팔을 베고 태영의 품 안에 안겨 자고 있다.
그리고 몸을 조금 움직여서 품속으로 파고든다.
꿈은 아니었군.
현대라면, 결혼이라는 약속과 상관없이 사귀는 사람끼리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하다.
태영도 지금은 고무신 바꿔 신고 다른 남자에게 가 버린 은율이와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를 가져왔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금기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와 이 시대의 남녀의 풍습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동침부터 먼저 하게 되었다.
태영이 다리를 다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힘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그래서 첫날밤의 거사는 미룰 수밖에 없었지만 아쉽지는 않다.
태영의 몸에 숨어 있는 남자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지만, 다친 몸으로라도 신혼 첫날의 거사를 무리하게 치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젠, 태영과 정하연은 모든 사람들이 공인한 커플이 되어 버렸고, 이렇게 동침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아픈 몸으로 억지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태영의 눈앞에 불과 1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반달 같은 눈썹을 매단 이마가 보인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다.
눈을 아래로 내리니,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이 내려다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붉고 예쁜 입술에 입맞춤도 한번 안 했네.
아무래도 애 같다는 느낌 때문에 키스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다.
콧김이 턱 끝에서 느껴진다.
정하연의 몸에서 나는 것인지, 여태껏 느끼지 못하던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간다.
댕기를 풀어 주었다고, 이렇게 한 이불 속으로 서슴없이 들어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품으로 안겨 들다니.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말 그대로 정말 손만 잡고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2년 만에 여자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더니, 얘가 어린애인 줄을 알면서도 묘하게 행복했다.
어리기는 태영도 그렇고 얘는 정말 한없이 어린 데도 남자와 여자란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비록 자는 모습이지만 귀 한쪽에서 볼을 타고 앞쪽으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려 더없이 예뻐 보이는데 새삼스레 가슴에서 콩닥콩닥 소리를 낸다.
그리고 숨이 가빠져 오는 데다 남자의 본능이 더욱더 강하게 아우성을 치기에, 지금이라도 첫날밤의 거사에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밖이 환했다.
태영은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것이 간지러웠는지 눈가가 가늘게 깜박깜박하더니 살며시 눈을 뜨고 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품속으로 더 파고든다.
“소녀, 행복하옵니다.”
뭐가 뭔지는 알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일까?
하긴 행복감은 정신적인 것이니 첫날밤의 거사를 치르지 않았다고 행복하지 않을 건 없다.
“평소에 하던 대로 말해. 그렇게 말하니까 딴사람 같잖아?”
“네, 그래도 되옵니까?”
“그래도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게 내가 편해.”
“동무들끼리 하는 말이 편하다 하시니 이해가 안 되긴 합니다만, 소녀도 그게 편하긴 합니다.”
“나한테 맞먹자고 반말만 안 하면 돼.”
“반말이요?”
“그래, 반말.”
“세상에 그런 여자들도 있습니까?”
“많지. 얼마나 많은데. 하연이는 모를 거야. 그런 여자들의 세상을.”
현대의 세상은 남녀가 연인이 되면, 아니 연인이 되기 전에도 몇 번만 만나면 바로 반말로 시작한다.
태영에게 그게 이상하게 생각된 적이 없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이 있느냐고 물어온다.
“하.”
정하연이 긴 숨을 내쉬었다.
“왜?”
“이름을 불러 주시니 너무나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정 실장이라 부르고, 둘이 있으면 이름을 불러 주지 뭐. 뭐가 어렵다고.”
“계속 비서실장을 시켜 주실 것입니까?”
“왜 비서실장하기 싫어?”
“아니, 싫은 것이 아니라 혼인을 하면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결혼하면 회사 때려치워야 되는 시대도 아닌데 무슨, 그런 게 어디 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어, 좀 많이 나갔네.
“그런 거 없으니까, 비서실장 계속하라고.”
“네, 나리와 혼인을 하고, 비서실장도 계속할 수 있다니 소녀는 너무나 좋습니다. 그리고 나리의 배필로서 조금도 모자라지 않도록 처신하겠습니다.”
“나리는 무슨 자꾸 나리야? 이젠 둘이 있을 때는 이름 불러.”
“이름을요?”
“그래. 부부는 동격이니 그렇게 하는 거야.”
“태영. 이렇게요?”
“아니, 끝에 씨자 붙여서 태영 씨 이렇게 불러.”
“태, 태영 씨. 후후.”
어색했는지 본인도 멋쩍게 웃는다.
태영은 자신의 눈에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는 정하연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자.”
태영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네, 물어보세요.”
“내가 만일 하연이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하연이는 어쩌려고 했어?”
“그럴 생각을 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궁금해서.”
“30여 년 전에 율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거절당한 처자가 뒷산의 나무에 목을 매었다고 들었습니다.”
“뭐?”
아니, 뭐 그만한 일로 목을 매? 아 씨, 괜히 물어봤네.
그 처자 말고 너는 어떡했을 거냐고 계속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런 때는 무조건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게 최상이다.
“자 일어나자. 모두들 우리가 일어나길 기다릴 거야.”
“네. 나리.”
“또 나리라고 한다.”
“네, 태영 씨.”
“그래. 그렇게.”
“그나저나 아버님께서 와 계실 수도 있는데, 너무 늦게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이?”
“네, 잔디에게 아침에 일어나거든 율촌에 가서 아버님 좀 모시고 오라고 시켰거든요.”
“왜?”
짐작이 갔지만 물었다.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부모님께 고하고 혼인을 해야지요.”
“사위 될 사람이 가야지, 장인 될 분을 오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
칼로 베이고 열 바늘이나 꿰맨 자리의 통증이 제법 가라앉았어도 움직이면 욱신거리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일 만해요?”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태영을 보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정하연이 물었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야지.”
“조심하세요.”
“이거, 나처럼 해 봐.”
새 칫솔 하나를 꺼내 거기에 치약을 조금 묻혀 주었다.
“태영 씨가 쓰는 것은 봤는데, 이를 닦는 것인가요?”
“응. 여태까지 뭐로 닦았어?”
“소금을 손끝에 몇 알 묻혀서 닦기는 합니다만, 비싸고 귀한 물건이라 자주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 소금이 귀하고 비싸?”
“네. 비쌉니다. 두 홉짜리 소금 한 포에 나락 한 가마니를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두 홉에 나락 한 가마라니,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잖아?
역사를 보면 소금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모두 국가가 관리했다.
소금은 세수 확보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었고, 권력의 척도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샐러리맨이라는 말의 샐러리의 어원이 소금을 지칭하는 셀리에서 나왔다나 뭐라나.
그렇다면 여기서는 소금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소금은 어떻게 조달해?”
“도염원에서 배급이 나오고 있다고는 하는데, 언제나 부족해서 상당 부분을 밀염상에게 의존하는 편입니다.”
밀염상이라.
태영은 정하연에게 밀염상이 얼마나 자주 오는지, 도염원에서 배급되는 소금은 왜 적게 오는지를 물었지만, 밀염상 이야기는 알아도 소금 배급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조선 시대까지도 소금 제조 방식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고, 천일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한 제국 시절부터라고 기억이 났다.
결국은 20세기 들어서야 천일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으니 생산량이 적고, 끓이는데 소요되는 원료들이 꽤 많이 소비되다 보니, 비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기로는 천일염과 끓여서 만드는 자염 사이에 어느 것이 좋으니 나쁘니 논쟁이 많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빨은 소금으로 닦는 것도 좋고, 이걸로 닦는 것도 좋아. 뭐로 하건 간에 양치질을 하고 나면 개운하기도 하지만, 벌레가 이빨을 먹는 것을 막아 주니까 아주 좋은 거야.”
“벌레가 이빨을 먹어요?”
“왜? 이빨 썩은 사람들 없어?”
“많지요. 그런데, 그게 벌레가 먹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래, 벌레가 먹어서 그렇게 썩어 가는 거야.”
정식으로 배우는 학교 같은 것이 없으니 그런 것들은 제대로 배우지 않는 모양이다.
“아, 그럼 열심히 양치질을 해야겠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알려 주어야 하지만, 치약과 칫솔을 구할 수가 없어. 지금 나와 하연이가 쓰는 것은 내가 가지고 온 것인데, 몇 개 되지 않아서 나누어 줄 수가 없어.”
“이건 짐승의 털이 아닌가요?”
칫솔의 앞부분을 유심히 보면서 물었다.
“응. 짐승 털 같은 것이 아니야.”
“만들면 되지 않나요?”
“양치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빳빳한 털로 칫솔을 만들어서 사용하면 입안에 상처가 생기는데, 지금 이것은 빳빳하면서도 상처가 생기지 않거든.”
“어떻게든 알려서 이빨을 닦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태영 씨가 쓰는 모든 것들이 단 하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정말 궁금했습니다.”
“궁금하면 물어보지 그랬어?”
“이제부터는 궁금하면 모두 다 물어보겠습니다.”
역시 똑똑해.
그나마 말이 잘 통할 것 같으니라구.
그나저나 함께 자고 같이 일어나니 양치질 같은 아주 초보적인 부분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응, 왜?”
“소세할 때 사용하는 저것은 무엇입니까?”
“아, 비누?”
“비누?”
“그럼 하연이는 세수할 때 뭐로 얼굴을 씻나?”
“아, 그게 조두라고 해서 콩과 녹두를 곱게 갈아서 말린 것을 소세할 때 얼굴에 문질러서 씻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하면 비린내가 나는데. 나리, 아니 태영 씨가 사용하는 저것은 향긋한 냄새가 나면서 거품도 나오기에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비누라는 것은 아예 없고, 조두를 사용하는데 빨래할 때는 잿물을 내려서 사용했다고 했던 것 같다.
“혹시 잿물도 사용하나?”
“잿물이라면?”
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잘 모르는 것인가 보다.
이빨 튼튼한 것이 오복 중에 하나라고 할 만큼 중요한 건강의 지표이던 시대이다.
조선 왕조의 왕들 중에 이빨이 튼튼한 왕이 없었고, 그로 인해 두통에 시달린 왕들이 많았다고 했던 것도 같다.
국사 시간에 흘려들었던, 시험에 나오지도 않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여기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일단 건강 생활에 필수적인 양치질을 하는 것, 비누 만드는 방법, 몸을 청결히 하는 것 등등을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것들 외에 앞으로도 가르칠 것이 많겠지만 나름 즐거울 것 같은 생각은 든다.
“자, 그리고, 이거.”
“그건 무엇인지요?”
“권총이라고 하고, 이름은 글록이야. 내가 어깨에 메고 있는 소총처럼 무서운 무기야.”
“이것도 천둥소리를 내나요?”
“응, 맞아. 작고 가벼운 대신 멀리 있는 것은 맞힐 수가 없어.”
“가볍지 않은데요?”
“소총보다 가볍다는 뜻이야.”
태영은 발목에 차고 다니던 글록을 풀어서 허리를 질끈 동여맨 정하연의 허리띠에 매어 주었다.
그리고 간단하게나마 탄창을 조립하고 분리하는 방법과 안전장치의 사용법, 그리고 겨냥하고 쏘는 방법만 가르쳤다. 반드시 두 손으로 잡아야 하는 것과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
“실제로 쏴 보는 것은 수일 내로 해 보도록 할 테니까.”
“네, 그런데 이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것에다 이 방아쇠를 당기면 정말 죽나요?”
“내가 하연이 구해 줄 때 왜구들이 쓰러지는 것 봤지?”
“네, 천둥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 명씩 죽어 가는 것이 무섭고도 신기했습니다.”
“그래, 그 천둥소리가 들리게 되고, 상대는 갑옷을 입었거나 말거나 맞으면 다 죽어.”
이 시대의 갑옷이라는 것을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고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지만, 총탄을 막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아, 있긴 하다.
아마도 무쇠 솥뚜껑은 꽤 여러 발을 맞아서 깨질 때까지는 견딜 것이다.
태영과 정하연이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동헌으로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두 명을 줄에 묶어 무릎을 꿇어앉힌 앞쪽으로 신도익이 서 있었다.
한쪽에 가마니로 덮은 사람의 발이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중현과 오중기의 사체이리라.
“그래, 확인해 보았는가?”
태영이 동헌의 앞마당에 내어 놓은 중앙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나리.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오중현을 풀어 준 자는 어제저녁 옥을 지키던 오한석이고 추가 공모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네, 오한석은 오중기의 먼 친척인데, 오중현이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겠다며 하도 사정을 하기에 다녀오라고 하면서 풀어 주었다 합니다. 그것은 옥에 갇힌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참, 기가 막혀서.
옥에 갇힌 놈을 옷 갈아입고 오라고 풀어 줘?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일벌백계.
그게 맞겠지?
기강을 확실하게 잡으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별이를 통해 이런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긴 했다.
현대처럼 경찰서의 조사실이나 검사실 같은 데서 조사하는 게 아니라, 동헌 앞에 공개된 장소에서 취조가 이루어지는지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수밖에 없으니 별이가 이런 사실을 알아 오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하연에게 들은 바 실제로 고을의 많은 사람들이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고, 또 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며 외지인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이런 일들이 빈번히 발생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