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23
223. 고려령(2)
“잔디 언니 멋져.”
백호루 쪽에서 박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쉿, 엄숙한 자리인데 또 장난하지?”
박해나를 말리는 백해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박해나의 말은 팽팽하게 뻗어 있는 긴장감이 살짝 누그러지게 한다.
저 아이가 왜국에 잡혀 와 고생을 해서 그런지 처음에 보여 준 모습은 저 생기발랄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는데, 대체 언제 저런 모습으로 바뀐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나이스는 통역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은소현에게 이것저것 묻고, 그것을 답해 주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받아들이겠죠?”
“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설가와 화지의 이야기가 들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죠. 끝까지 버티면 몰살을 당하고 빼앗길 것이고, 중간에 포기해도 대부분은 죽고 난 뒤에 빼앗기는 거지요.”
“이 일이 마무리되면, 고려국의 일부이니 이제 안심하고 일하고 터전을 가꾸어 나가면 되겠지요?”
“안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국에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계속 기회를 노릴 테니까요.”
“강대한 적들은 대장님이 다 눌러 주신다고 하잖아요? 그 외의 적들은 우리 스스로 막아 내야지요.”
“대장님이 가진 무기들은 정말 무서워요. 누가 감히 저기에 대항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에치젠 국의 동쪽으로 왜국을 제한하고 그 서쪽이 고려국이 되면, 어제 대장님이 말씀하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말이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백제 평승이 고구 신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말하는 대로 선을 그으면 왜국의 절반을 고려가 가져간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이번에는 고구 신오의 대답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태영에게는 대부분 제대로 들리는데, 모두 고려 말로 나누는 대화다.
“사카이도는 그럼 어찌 되는 거지요?”
서해도.
21세기에서 규슈로 불리는 일본의 큰 섬 4개 중의 하나이다.
“사카이도는 이곳에서 아주 먼 곳이어서 제외하더라도, 서쪽 지역으로 하리마와 타지마의 경계를 정해 주셨는데, 그럼 하리마의 서쪽을 통치할 세력이 있나요?”
“설가 어르신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설가에게 묻는다.
“그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지는 않았지만, 남해도는 우리 영역이고, 산양도의 대부분은 화지 시장이 지배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 화지 시장님은 여인이지요?”
화지가 여자의 복장이 아니라 사포의 군복을 입고 있지만, 얼굴이 여인이기에 물어보는 것이리라.
“네, 맞습니다. 그런데 대장님은 반상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도 구분하지 않으며, 오직 능력을 우선으로 보시더군요.”
이 말은 화지와 함께 참관단에 포함된 하득의 말이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터전인 송도의 통치자가 여자라고 깔보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 예, 그것은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왜국 왕실에 이런 모든 사항을 통지한 분도 여인이지요.”
“네.”
표정에 불안함과 불쾌함, 걱정스러움 등이 마구 버무려져 나온다.
이 시대는 남자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의식 구조가 쉽게 바뀔 수는 없다.
강제로 뜯어고치려면, 그걸 고치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그래도 그건 해답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귀화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잔디가 일어섰다.
이 각이 지난 모양이다.
잔디는 흙바닥에 밟히는 모래 소리를 뒤로하고 뚜벅뚜벅 걸어서 구조 미치리가의 앞에 섰다.
“이 각이 다 되었다.”
잔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그쪽의 의논이 끝나지 않았다.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땅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일방적인 요구를 꺼내 놓고 30분 안에 결론을 내놓으라 한다.
30분의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잔디가 그렇게 선포하자 김웅겸이 일어섰다.
용미단의 끝으로 이동하자 사포의 병사들의 눈이 김웅겸을 따라갔다.
“전 병력,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철컥~철컥~ 탁 타닥~
사포의 병사들이 복창하고는 바로 노리쇠 당기는 소리와 탄창을 한 번씩 치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리기 시작했다.
회창문 가까운 곳에 있는 병사 한 명이 깃발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는 철갑 교위와 철궁 조에게 전투 준비를 알리는 깃발 신호이다.
“……락 ……겠습니다.”
구조의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의 노리쇠 당기는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거부한다는 거지?”
잔디가 잔인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수락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좋다. 그럼, 조정 대신들과 신료들이 모두 모여 고려 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절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바닥에 세 번 찧어 그 소리가 고려국 황실에까지 들릴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연후에 고려의 황제께 올리는 주문(奏文)을 작성토록 하겠다.”
절할 때 머리를 바닥에 찧어 큰 소리가 나도록 하는 것은 명나라나 청나라 때 중국에서 하는 예법이라고 한다.
조선의 16대 임금인 인조께서 청나라의 침공으로 청나라 태종에게 그렇게 절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흑역사가 있다.
병자호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그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수십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가서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끔찍한 전쟁의 끝에 그런 일이 있었다.
주문(奏文)은 현대식 의미로 보는 단어의 뜻은 임금에게 아뢰는 글이다.
그러나 중세와 근세의 국가 간 위상으로 보면, 신하국의 왕이 상국의 황제에게 아뢰는 글이다.
명나라와 조선 간에도 이루어지던 외교 문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명나라는, 원나라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싸움으로 혼란하던 시대에 원을 몽골로 내쫓으며 탄생했다.
당시, 세계 인구의 20%를 죽였다는 페스트(흑사병)가 유럽을 한 바퀴 돌아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기근과 가뭄으로 수백만이 굶어 죽는 상황.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배고픔과 페스트로 인한 떼죽음이 중국 땅 전역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을 때, 그 혼란을 틈타 도적의 무리인 홍건적이 집단 할거하여 극도의 기승을 부렸다.
이때, 주원장은 페스트로 대부분의 가족을 잃고 탁발승으로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비적의 집단인 홍건적에 들어가 그 세력을 규합하여 세운 나라가 바로 명나라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그나마 좀 좋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탁발승으로 표현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행려 걸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 명나라가 강대한 힘으로 찍어 누른 주변국의 왕들이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가 주문(奏文)인데, 말이 외교 문서이지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주(奏)라는 글자가 아뢸 주 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잔디의 한마디 한마디에 왜국 조정 대신들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
“전체, 차렷.”
권우석이 늘어선 병사들을 정렬했다.
병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서 구령에 따라 착착 움직이는 모습을 이곳 오사카 인근에서 구한 여인들이 이미 승선해서는 뱃전에 둘러서서 보고 있다.
이곳에 남겠다는 여인이 서른둘, 그리고 배에 승선한 여인들이 351명이다.
명단에 없었지만, 고려 여인들을 구하러 다니다가 추가로 확인된 여인들을 모두 합쳐서 383명이나 되었다.
또 거기에 반해, 명단에는 있어도 종적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수십 명은 되었고,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찾아낸 사람들에게는 복수할 기회를 주었지만, 복수할 대상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
자신이 노예로 다뤄지며 살던 집주인에게 복수한 사람도 있다.
그들이 노예의 신세에서 이제 자유인이 되지만 표정들이 그리 밝지는 않다.
그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세잎이의 이야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세잎이는 향촌에서 와카마쓰로 잡혀갔다가 다시 향촌에 되돌아가서 당한 수모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었고, 지금은 사포군에서 왜구들만 보면 눈에 불을 켜는 비서실의 병사이기에 자신의 아픔이 대입된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통치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인해 남는 여인들이 제법 되는지 모르겠다.
승선한 여인들 중에 또 일부는 송산과 송도에서 내릴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만, 자신이 왜구에게 잡혀 끌려올 때, 그것을 막으려던 가족들이 눈앞에서 모두 죽음을 당했기에 돌아가 봐야 아무도 없으니 부모님 생각하며 눈물만 흘리게 될 것이 아니냐며, 이젠 고려인들이 통치하는 곳이니 그냥 여기에 남겠다고 한 여인.
혼인을 하고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구들이 쳐들어와서 서방님을 죽이고 자신은 이곳으로 끌려왔다는 여인.
돌아가면 가족들이 살아 있을까요?
그렇게 묻는 여인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이었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마음속에 갈등이 남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가장 많은 질문은 ‘왜구에게 당한 한을 갚고 싶은데, 사포로 가면 가능합니까?’라는 것이었다.
비서실 여군들을 중심으로 면담하는 것을 태영이 지켜보면서 속에서 울화만 치밀어 올랐지만,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으로 되돌려 줄 방법은 없다.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이곳 오사카에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은 여인들 일부는 송산과 송도로 가는 것으로 갈 길을 정했다.
“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경례 구호가 해안을 울렸다.
“충성!”
뒤로 돌아선 권우석이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충성!”
태영은 그리 크지 않은 경례 구호로 대답하며 거수경례를 하여 응답했다.
“반년 후에 건강하게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 대대장도 병사들도 모두 건강해.”
“넵, 대장님.”
권우석 대대가 모두 남겠다고 했다.
이미 권우석 대대의 최을석 중대가 송도에 잔류 중이다.
그런데 이곳 평안경에 잔류할 부대를 지원받았더니 곽병선과 김한신이 지원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권우석 대대 소속이다.
권우석은, 이곳은 도시가 크고 인구가 많으면서 이해관계가 복잡한 지역인 데다, 아직 왜적의 잔당들이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은 지역이니, 자신이 함께 있으면서 잔당들의 정리까지 하겠다며, 자신도 남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사들 1인 기준으로 실탄 5백 발, 공용 화기로는 모아 탄 10기에 대철궁 1기와 백색 탄 100발을 남겨 둬 달라고 요청해서 그대로 지원해 주었다.
그렇게 6개월간 상주할 부대가 결정되었다.
지금부터 6개월 뒤면 태풍이 중국 남부의 타이완 지역으로 대부분의 진로가 정해지고, 일본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딱 적당한 때다.
이곳으로 올 때 7개 중대가 왔는데, 돌아가는 것은 3개 중대다.
이미 송산에 1개 중대, 송도에 1개 중대가 주둔군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포에는 7개 중대 3백여 명이 기다리고 있으니 병력이 모자랄 일은 없고 봄이 시작되기 전에 개경에서 1만 명을 데려와 훈련이 끝나면 군인이 된다.
“연대장님,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지역 정벌 계획이 있으면, 교대할 부대를 보내 주십시오.”
“그래, 그리하도록 하지, 대대장도 건강하고 모두 낙오 없이 귀환할 수 있도록 해.”
권우석의 말에 김웅겸이 그러마 대답했다.
국경을 그렇게 그었다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도 알 것이다.
후속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다.
“신 대대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권 대대장 건강해. 애들 각별히 좀 잘 챙겨 주고.”
권우석과 신도익도 작별 인사를 했다.
남아 있는 지휘관들과 떠나는 지휘관들이 서로 건강하기를 바라며 인사하는 사이에 돌아가는 병사들과 남아 있게 되는 병사들 사이에도 작별 인사가 오갔다.
이들이 사포를 출발한 지 이미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앞으로 6개월은 지나야 이들과 교대할 병력이 올 것이다.
사포와 율촌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해질 편지는 이미 모두 받아서 보관 중이다.
늘 보던 얼굴이지만 이제 얼마간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편지로는 전해질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서로에게 대시 전해 달라는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건강해야 해요. 무사히 잘 돌아와야 하는 거 알죠?”
여군 병사가 남자 병사에게 하는 당부가 들려온다. 서로 사귀는 남자 병사와 여자 병사들의 애틋한 이별은 조금 더 가슴이 아프다.
“그래, 걱정 마. 돌아가면 우리 혼인하는 거야, 알지?”
이곳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하는 남자 병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요, 여기 왜국의 여인들에게 눈 돌리면 알죠?”
“걱정 마. 나는 너만 좋아하는 거 알잖아?”
쪽쪽~ 쯔읍~
한쪽에서는 남들이 보든 말든 서로 부여안고 진하게 입을 맞추는 병사들도 있다.
“사포에 돌아가면, 우리 엄마에게 종종 들려 줘. 동생이 있기는 해도 내가 없어서 서운할 거야.”
또 한쪽에서 작별을 고하는 한 쌍이 보인다. 저 커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둘이 좋아하는 사이였구나 싶다.
“그럼요, 혼인하면 내 어머니도 되는데 자주 찾아뵐게요.”
그렇게 대답하며 남자 병사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춘다.
입맞춤이 이렇게 보편화된 것은 순전히 태영과 정하연, 태영과 한서윤의 행동 때문이다.
한쪽에는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있는 커플도 있다.
“읍, 푸후.”
참았던 숨이 터지는 소리에 돌아보니, 잔디의 품속에 반쯤 묻힌 얼굴이 발개진 박해나의 모습이 보인다.
하긴 저놈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서 서슴없이 입맞춤하는 것을 보았을 리가 없지.
이미 승선한, 왜국에 잡혀 온 여인들이 ‘에구 망측해.’ 하는 소리는 한두 번 들려온 것이 아니다. 그걸 보고 후다닥 뛰어서 숨을 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보기 좋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보기 좋잖아요.”
그 말에 서윤이 태영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면서 말한다.
“그렇지?”
“그럼요. 송산에 잔류하는 여군들과 사귀는 남자 병사들은 부대를 바꿔 주기 잘한 것 같아요.”
윤서이 소대는 소속된 중대의 결정에 따라 송산에 잔류하기로 했다.
여군 소대는 함께 잔류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소대원들의 의견을 종합한 윤서이가 잔류하겠다고 결정을 했다.
그런데 같은 중대가 아니면서 윤서이 소대에 소속된 여군과 사귀는 다른 중대의 남자 병사는 아예 중대를 바꿔 주었다.
“쌍으로 남는 병사들은 전리품 분배를 좀 많이 해 줘야겠어.”
“네, 그게 좋죠.”
이번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지급할 전리품은 이미 일부를 분배했다.
그것은 그들의 사기를 더욱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대부분은 가족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병사들이 이렇게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분배되는 전리품은 상당히 크다.
부우우웅~
뱃고동이 울렸다.
이제 떠날 테니 탈 사람은 다 타라는 소리다.
돌아가는 길에 송산과 송도의 참관단을 내려 주고, 사포에 데려가서 한글을 포함하여 현대식 교육을 받을 사람들로 바꿔 태우고 가면 된다.
“우와, 언니, 언니언니, 황룡호가 얼마나 큰지 마치 섬이 떠내려가는 거 같아요.”
배가 떠나고 육지가 점점 멀어지자 황룡호의 뱃전에서 쉴 새 없이 손을 흔들던 박해나가 갑판 위를 깡충깡충 뛰면서 서윤과 잔디 사이에 끼어들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 아주 크지?”
“네, 정말 커요. 그런데 사포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응, 우리가 송도에서 하루, 송산에서 하루 머물 거니까, 사흘 후에는 도착할 거야.”
“그렇게 빨라요?”
“송산과 송도를 들르지 않으면 내일 오후에 도착 가능하단다.”
“와, 우리가 여기로 올 때는 스무 날이 걸렸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어?”
“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어요.”
이 시대에는 배에 엔진이 없이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게 아닌 경우에는 노를 저어 가야 하는데, 전투선이 아닌 다음에야 수십 명의 노꾼을 두고 배를 운행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해나를 잡아 온 왜국의 병선에는 노병이 없었을까?
“장관이었습니다.”
박해월이 뒤쪽에서 말했다.
“뭐가?”
“왜국의 왕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려의 신하국으로서 예를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이요.”
장관이었지.
“그리고 그렇게 통쾌한 적도 처음입니다. 여태까지 당하고 살았던 원한이 한꺼번에 다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속이 시원하면 된 거지. 그나저나 사포에 가면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사포에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무료로 가르치는 학당이 있어서 글 선생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사실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건, 가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고.”
“네, 그런데 반상의 구분 없이 모두를 가르치는 것을 조정에서 알면…….”
“훗.”
옆에서 듣고 있던 비서실 병사들이나 신도익이 웃는다.
김웅겸은 흑룡호에 승선하여 지휘 중이어서 이곳에는 없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개경에도 사포의 고려 학당이 문을 열고 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고려 글을 모르면 자리를 내놔야 해.”
“아, 하하. 지체 높으신 양반님들이 죽을 맛이겠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대대장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뭔데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병사들에게 물어도 답을 해 주지 않던데요.”
함포는 뚜껑이 덮여 있고 포신에는 방수포가 씌어져 있어서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에 천천히 알아보세요, 지금은 설명해 줘도 알아듣기 힘들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대답한 박해월이 목례를 하고 물러섰다.
“언제쯤이면 이곳이 완전한 고려 땅이 될까요?”
배가 바다를 미끄러져 갈 때 말없이 오사카를 되돌아보던 시선을 바로 하며 서윤이 물었다.
점령했다고, 그리고 자치령의 시를 여섯 개 만들어 주었다고 그냥 고려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과 문화까지 동질성을 이루어야 한다.
“두 세대는 흘러야 하지 않을까?”
두 세대를 몇 년 정도로 보는 것이 합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40년 정도 보면 되지 않을까?
21세기를 기준으로 보면 60년은 잡아야 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결혼을 빨리한다.
“네, 그렇겠죠, 그나저나 백제사에서 자살한 그 스님의 자살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요.”
“나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야. 다만 추정은 귀화인들끼리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예전에 너희가 우리를 침략했느니, 너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니 아니니 하며 싸우고 갈등하는 것 때문에 힘을 모으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저도 그런 생각이에요.”
“그래도 계파별 갈등이 외형상으로는 봉합되었으니 그 정도에서 만족해야지.”
“대장님이 강제로 때려잡아 지역별 분배를 해 주시기 잘하셨어요. 그들끼리 의논을 하라고 내버려 두었으면 1년이 걸려도 해결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서로 다투기만 하니까 통합도 안 되고, 그러니 힘을 못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