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3
023. 습격(4)
여기서 외지인이 있다면 태영이 유일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여행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이니 대부분 혈연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결론은, 한 다리 건너기도 전에 대부분이 다 친척인 것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고을에서만 살고, 대부분 같은 고을 아니면 옆 고을 간에 결혼이 이루어지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현대의 도시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거나, 집과 학교와 회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서로가 다 바쁜 사람들이기도 하면서, 문 열고 들어가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이런 모든 환경들이 그런 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인 듯했다.
“소, 소인은 정말, 그럴 줄 몰랐습니다요. 나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오한석은 나이 삼십 줄에 들어선 조금 왜소해 보이는 체격의 가병이다.
비록 노역 형에 처하긴 했으나 처음에만 옥에 가두었을 뿐 모두 풀어 준 상태이고, 노역 이외의 일은 가병으로서의 일을 하도록 조치했었다.
일벌백계로 삼아 엄중히 다스리고 차후에 이런 일이 절대로 생겨나지 않으려면, 저놈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한석은, 옥에 갇힌 죄인을 마음대로 풀어 주는 중죄를 저질렀다. 이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 마땅하다.”
태영의 말이 떨어지자 난리가 났다.
오한석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무릎을 꿇고 한번만 용서를 해 달라면서 사정을 한다.
여태까지 이런 일로 죽인다는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인다는 말이 나왔으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두 조용히.”
태영이 눈치를 주자 신도익이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특히,”
태영의 말이 다시 시작되었다.
“죄인 오한석은 사망한 죄인 오중현과 인척임을 기회로 마음대로 풀어 주는 방만한 근무를 하였다. 그 잠깐의 방만한 근무로 인해 나와 비서실장이 죽을 뻔했다. 나와 비서실장이 오중현에게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것인가?”
비록 낮은 소리였지만 오한석의 울음소리와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동헌 앞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지를 모르고 저질렀다는 점을 참작하여, 장 쉰 대에 십 년간의 노역 형에 처한다.”
공짜로 부려먹기 위한 형벌이었지만, 울음소리가 조금은 잦아들고 가족들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서로 부둥켜안는 것이 보였다.
“다만, 향후에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할 것이니, 모두들 명심하여 규율을 지켜야 할 것이다. 신 부호장은 형을 집행하라.”
“네, 나리.”
신도익이 안되었다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눈짓을 하자 형을 집행할 장 틀을 준비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서둘렀다.
장 50대를 맞고 나면 아마도 며칠간은 걸어 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나리, 율촌에서 호장 나리께서 오셨습니다요.”
오한석을 형틀에 매달고 있는 바로 그때 하인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자, 기다리지 않고 문을 들어서는 정인구가 보였다.
정인구의 뒤에는 곽병선과 이름은 모르지만 산속에서 왜구를 죽이고 구해 준 장정 둘이 함께 들어왔다.
이제는 앉아서 정인구를 맞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다친 상처의 통증을 참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정인구를 향해 가지는 못했다.
“심하게 다쳤다 들었는데, 괜찮으오이까?”
역시, 이제는 태영에게 나리라고 하던 것이 사라졌다.
그게 맞으니까.
“오서 오십시오.”
“내, 잔디에게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오는 길이오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하연을 바라본다.
“갑자기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자, 사랑채로 가시지요. 정 실장, 앞장서게.”
“네, 나리.”
자초지종은 이미 잔디를 통해서 듣고 왔을 테니, 길게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연에게 내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괜한 일을 하였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하연이를 그런 위험 속에서 구해 주시더니, 이제 혼인을 한다 하니 그 무엇보다 기쁘오이다.”
“이제, 말씀을 낮추시지요.”
“하하하, 은인이 사위가 되다니 내가 복이 많은 모양인데, 사위가 되었으니 이제 말을 낮춤세.”
정인구가 호탕하게 웃었다.
고려의 결혼은 매우 간소하게 하는 것으로 배웠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처가에서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식 올리고, 가족들에게 인정만 받으면 끝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포의 새 호장인 데다, 사포와 율촌을 구한 귀인인데, 혼인 행사를 가벼이 할 수 없으니 사포와 율촌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성대히 진행하고, 어차피 생활은 사포에서 할 터이니, 혼인식 또한 이곳 사포 관아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사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결혼 날짜는 현대에서도 신부 측에서 잡는 것이고, 장소도 신부 측에서 정한다. 그렇기에 신부의 아버지가 저리 말하는데 뭐라 토를 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뜻이 그러시면 저 역시 좋습니다. 모든 것은 장인어른께서 알아서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아서 진행해 주는 것이 맞지.
그리고 뭐, 이 시대의 결혼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 아는 체를 하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식은 한 달 뒤로 정해졌다.
곧 농사가 시작되는 때이니,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좋다고 해 버렸다.
“그나저나, 계속 관아의 일을 시킬 것인가?”
정인구가 정하연을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그러려고 합니다.”
“여인이 관직에 있는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염려가 되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고려 시대가 아무리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사회라고 해도, 역사적으로 여인들이 관직에 있었다고 배운 기억은 없다.
태영이 사포의 관직을 정식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전에 있던 놈을 죽여 버리고 차지한 자리였다.
현대 사회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사포의 사람들과 다른 호장들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고, 정인구도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것을 보니 이렇게 해도 별문제가 없기는 한 모양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정된 호장이 임명한 자리인데 누가 뭐랄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초는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최초는 어디에나 있다라……. 허, 그것참, 마음에 드는 말일세. 그럼 우리 하연이가 관직에 오르는 최초의 여인인 셈인가?”
“다른 곳에는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장인어른께서 최초라고 보시면 최초일 것입니다.”
“내 기억에 없으니, 아마도 최초가 맞을 것일세.”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것이 좀 있습니다.”
“물어보시게.”
“사포의 인구는 일천에서 둘이 모자랍니다. 율촌의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그건 왜?”
“사포의 인구가 너무 적습니다. 장정을 기준으로 일천은 넘어야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율촌은 몇이나 될까 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이곳으로 날아와 왜구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이곳 사포의 호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구 증가이다.
태영이 생각하는 것을 진행하려면 인구가 좀 늘어나야 한다.
일할 수 있는 남자의 숫자가 끽해야 349명 수준으로는 가병으로 2백 명 정도를 뽑아내면 일할 사람이 부족해진다.
물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준비가 갖추어질 몇 년 동안은 태영이 추진하고 있는 일을 다른 지방이나 고위 관리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정하연과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실행이 가능할지에 대한 것을 정인구와 의논할 차례이다.
기억이 맞는지는 몰라도, 고려 초기의 인구는 아마 3백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고, 중국 역사의 기록에는 2백만 명이라 했단다.
현시대와 비교하면, 고려 전체 인구를 합쳐도 광역시 몇 개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가 그렇게 늘어나면 식량이 모자라게 될 걸세.”
“그것은 획기적으로 늘릴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식량을 획기적으로 늘린다고?”
“네, 그렇습니다.”
“대체, 어떤 방법이 있는가?”
태영은 말 나온 김에 조금만 설명했다. 아직 이앙을 하지 않고, 그냥 볍씨를 논에 그냥 뿌리는 방식으로 쌀농사를 짓는다.
왜?
몰라서?
이앙을 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니 나라에서 못 하게 했다는 설도 있는데,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과연 물이 부족해서 이앙법으로 농사를 짓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저수지와 수로 시설이 없었으니 딴에는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벼를 직접 뿌려서 키우는 것보다 모내기를 하면, 같은 면적에서 훨씬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은 네 배쯤 늘어난다고 알고 있다. 네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할 면적에 한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수확량까지 늘어난다.
벼농사에서 이앙법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농법이다.
그러니 지금은 분명 이앙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을 텐데, 이앙법으로 바꾸면 이모작이 가능해져서 벼를 수확한 후에 이듬해 다시 모내기를 하는 사이에 논보리라는 것을 심는 이모작이 가능하여 곡물의 수확이 그만큼 더 늘어난다.
창고에 쌓여 있는 곡물의 양으로 보건대 사포의 곡물 수확량은 충분한 편이긴 하지만, 농사 방법을 바꾸어서 수확량이 대폭 늘어나면 인구를 충분히 늘릴 수 있었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그 아이가 어른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다.
지금도 사포에는 개간하여 농토로 바꿀 만한 땅이 충분히 많다.
율촌은 사포보다 더 넓은 데다 율촌을 지나 사포로 흘러나오는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강의 상류에 저수지를 만든다면 농업용수의 확보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머릿속에 이미 있었다.
***
“고구려 유민들을 데려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매우 위험한 방법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정인구가 제시했다.
태영이 기억하기로 역사책에서 가르치는 천리장성과 실제 역사의 천리장성에 대한 역사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고 들었다.
역사책에서는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흥남 부근으로 연결된 천리장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그렇게 배웠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고려의 천리장성은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기는 중국 땅인데, 중국에서는 기를 쓰고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실제 고려의 역사 기록들은 여몽 전쟁 시기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집필한 시대가 조선 시대이니, 역사의 기록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 또는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제대로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조선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 기반의 통치 이념의 시대이고, 고려는 불교를 바탕에 두고 성리학이 일부 가미되는 수준이다.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고려를 배신한 반역의 무리들이 조선을 세운 꼴이기도 하거니와 유교를 숭상하는 집단으로서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으로 집필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집필하기보다는 안 좋거나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기록했다고 들었다.
태영이 역사학자도 아니고, 대학에 가려고 열심히 배운 정도이니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다만, 고려 시대로 튀어 날아왔으니 역사를 좀 더 많이 공부해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태영의 기억으로 고려 국경을 넘어서서 배가 닿을 만한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데려오려면, 현재 지명으로 흥남 이북 지역에 있는 유민들을 데려오면 된다.
현대에서 배운 역사의 지식으로 봤을 때 그 지역은 고려 국경 이북 지역이다.
“어렵지만, 시도해 봐야지.”
“그럼, 그렇게 데려올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 거죠?”
“혹시, 고려 말을 쓰지 않을까 봐 물어보는 거야?”
“네.”
“일단, 금나라는 과거에 패망한 여러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야.”
“…….”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는 표정이다.
“금나라의 발원지는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고, 지금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인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맞는지 몰라. 그리고 초기에 여진족의 추장은 신라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아. 그러니 금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고려 말을 쓸 가능성이 높아.”
“정말요?”
실제 그런지는 모른다. 그걸 어찌 알아?
역사책에 그 지역 사람들이 어느 나라 말을 사용했다. 뭐 그런 건 없으니까.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고려 말을 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데려오면 되지.”
“배는 언제쯤 완성될까요?”
“김 대목장이 돌아와 봐야 알겠지만, 한 척을 건조하는데 아마도 두 해는 걸릴 거야.”
“대체 얼마나 큰 배를 만드는 거죠?”
“궁금해?”
“네.”
“배도 배지만, 그 안에 실을 기관과 무기가 더 문제야. 온정 철소에서 그걸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칼이나 창은 온정 철소에서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거 아니야. 설명해 주기 힘드니까 만든 뒤에 봐.”
김하석이 떠나면서 작은 배와 달리 병선을 만들기 위한 목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스마트폰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 전화 한 통화 찍 해 보면 알게 될 일을 이미 십여 일이 지나가고 있어도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답답함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그러려니 해야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뭐가요?”
“까만 소하고, 까만색과 누런색이 섞인 색의 소도 보이던데, 까만 소가 있는 게 맞아?”
태영은 한우라고 해서 황소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비록 목장 같은 곳에 가 보지 않았지만, 영상을 통해 젖소를 키우는 것은 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귀농하면서 이사를 간 시골에서도 흑소를 본 적은 없다.
“네, 맞습니다. 까만 소도 있고, 얼룩덜룩한 것은 칡소라 하는데, 또 누런 소도 있어요. 그게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런데 왜 우리 농촌은 누런 소밖에 없는 거지?
그럼 국사 선생님이 흥분해서 했던 그 말이 맞다는 소린가?
일제 강점기 때, 흑소의 육질이 뛰어나 한국의 많은 흑소와 칡소를 실어 내어 일본으로 옮겼고, 그들은 그걸 화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누런 소 외에는 잡종이라고 구분 지어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도록 만들었다고 했던 것 같다.
“저는 흰 소도 보았습니다. 사포에는 없지만.”
태영이 말이 없자 정하연이 덧붙였다.
소를 키워야겠군.
어차피 목장을 만들 계획이 있으니 소를 키워 봐야겠다. 돼지나 닭도 목장에서 키우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
***
“먼 길,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김하석이 돌아오자마자 신도익이 대동하고 들어오는 것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나리.”
“그래, 다녀온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목재는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척을 만들 수 있는 목재를 사려고 하니 은 스물다섯 관을 달라고 하였사온데, 가능하신지요?”
은 스물다섯 관이라.
은자인 천상통보로 2만 5천 냥인 셈이다.
개경에서 최고급 주택 3채를 사고도 남을 만큼 큰돈이었다.
개경에 사는 귀족들은 집 안에 연못이 있고 전각이 수십 채라 했으니, 그 정도라면 제법 큰돈이긴 하지만, 현대와 비교한다면 은값이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를 가진 것 같다.
하긴, 이 시대에서의 은이란 것은 엄청나게 귀한 것일 수 있다.
이 시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은값이 금값보다 비싼 때가 있었다고도 했고, 중국은 은 본위의 화폐 제도로 서양과 무역을 했고, 조선 시대 후기에 일본이 서양과의 교류 증대를 통해 일찍부터 신문물을 도입하게 된 것도 은 본위 화폐를 도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가능할 것 같은데, 여기까지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네, 여기까지 가져다주겠다 하였습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두세 달 정도 걸릴 것이옵니다.”
“두세 달이요?”
“네, 나리.”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굵은 통나무를 트럭이나 대형 컨테이너 차량 같은 것도 없이 가지고 오려면 바다로 오는 길 외에는 없는데, 싣고 오는 것이 아니라 뗏목처럼 만들어서 끌고 오는 것이리라.
“물건을 가지고 오라 하시지요.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그러시면, 이제 소인은 경험 많은 목수들을 데리러 갈 것이옵니다. 그런데 병선을 건조할 조선소가 필요한데, 그건 어찌하실 요량이신지요?”
부지는 배를 만들 생각을 하면서부터 점찍어 둔 곳이 있다. 신도익을 불러 시키면 될 일이다.
“그건, 조만간 해결해 주겠소,”
“혹시, 사람을 좀 추천해도 될는지요?”
“사람?”
“네, 나리.”
“말해 보세요.”
“소인이 거제에서 배를 만들 때, 조선소의 확장 공사를 할 때 만난 사람인데, 그 재주가 참으로 난 사람이옵니다. 땅을 고르고 석축을 쌓고 집을 짓는 일을 그 사람처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사옵니다. 그런 사람이 조선소 공사를 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어서 드리는 말씀이온데…….”
이온데? 그럼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군.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소?”
“신분이, 거제에 사는 양반집의 노비인지라 소인처럼 마음대로 이곳으로 올 수가 없사옵니다.”
“김 대목장이 추천을 하면 데려와야지요. 혹시 좋은 생각이 있소이까?”
“이놈이 성정이 거칠지는 않는데, 주인 양반이 뭐라고 하기만 하면 대들기도 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데다, 사고를 자주 치는 통에 아주 골치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주인 양반을 설득해서 사 올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노비는 매매가 되는 시대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면 아주 골치 아파지지 않나요?”
“그런 공사의 일에 그 사람처럼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사옵니다.”
“그래요? 어느 마을에 누구인지 소상하게 말해 보세요.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
주인도 학을 떼는 노비인지라 주인이 팔 수 있다는 거지.
팔기만 한다면 신도익을 보내서 사 오라고 하면 될 일이다.
사고뭉치여서 여기 데려다가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더군다나 사포와 율촌에 해야 하는 토목 공사들이 줄지어 있으니 그런 쪽의 능력자라면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
“신 부호장.”
“네, 나리.”
“박 호장이 많은 재물을 모아 두었을 때는 무언가 계획이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드는데, 알고 있는 바가 있는가?”
태영은 은병과 은자, 그리고 몇 년을 먹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곡물을 저장해 둔 박한이 무언가 계획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신도익과 정하연만 앉은 자리에서 물었다.
“소인에게는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아서 다는 모르오나, 개경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짐작을 하긴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촌구석에서 그 많은 돈이 왜 필요했을까?
“일이 잘 진행되면, 나리를 습격했다가 죽은 오중현에게 사포를 맡기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오중현은 나로 인해서 좋은 기회를 놓친 거라고 봐야겠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중현에게 사포의 재산을 다 넘겨주지는 않겠지만, 오중현이 직접 관리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도 많아질 것이고, 또 사포의 최고 권력자가 될 찬스였는데, 태영으로 인해 망친 것이니 얼마나 억울할까?
“네,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개경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을 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거기까지는 모르옵니다. 다만, 금오위의 별장으로 있는 누군가에게 줄을 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오위는 뭐고 별장은 또 뭐야?
그러고 보니 정하연의 작은아버지가 낭장으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별장이 높은 거야 낭장이 높은 거야?
도대체 고려 시대의 관청과 직제들은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금오위는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 조직이고, 별장이면 정7품 무관입니다.”
뭔 소린지를 몰라서 답답한 마음에 정하연을 쳐다보니 정하연이 짤막하게 설명을 해 준다. 역시 정하연을 비서실장으로 채용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금오위가 치안 담당이면 경찰청인데, 군사 조직이라고?
이해는 안 가지만, 정하연 덕분에 신도익이 그런 것도 모르세요, 라고 물을 수 있는 민망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니 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