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31
231. 분노하다(7)
서윤의 허리를 손으로 잡자, 서윤 역시 태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잡았다.
몇 킬로 이내의 가까운 곳으로 저속 이동을 할 때는 공주님 안기를 하지 않고 이렇게 다니다 보니 이젠 척하면 알게 되었다.
태영이 걸음을 빨리하자 순식간에 일행과 멀어졌다.
“여기 온 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어 가네.”
모퉁이를 돌며 서윤의 옛집이 보이자 태영도 감회가 새로워 서윤에게 말했다.
“네, 그리고 서방님의 아내가 된 지 2년이 되기도 했구요.”
태영으로 인해 이젠 정하연이나 한서윤은 현대식 용어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어서 어색한 감도 없다.
“그래, 세월 빨라.”
“누가 와서 더 이상 해코지는 안 한 모양이네요.”
집이 다시 지어질 리는 없지만,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 그 지경을 치고도 그럴 수는 없었겠지.”
“네.”
서윤은 집 앞에서 베레모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묵념하듯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다가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 가족들도 없고 가족들의 유해도 없으니, 추억의 장소로 둘러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설이 좀 만나고 가요.”
“그래.”
제비골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해도 유일한 절친을 보고 가자는 말이다.
“잘살고 있겠죠?”
“그렇겠지. 서윤이 그렇게 엄포를 놨는데 무슨 해코지를 했겠어?”
태영과 서윤은 천천히 걸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변함없이 한적하고 한가로운 시골 동네 그대로의 정경이 보였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거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농사를 짓기 시작할 철도 아니고, 불을 지피기 위해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큰일은 없을 때이다.
마을로 들어섰을 때, 개 짖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던 사람이 있었지만, 태영과 서윤의 차림을 보고는 누구인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다닥 문을 닫았다.
그때의 기억이 공포로 남아 있긴 할 것이다.
“저 집이에요.”
서윤이 가리키는 집을 보자, 이 시대 시골의 집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출입구에 해당하는 자리가 비어 있을 뿐, 문이 달려 있지는 않다.
그래도 토담과 싸리나무로 둘러진 담장이 있는데, 담장이라기보다 그냥 경계를 잡아 둔 것처럼 성글게 나무들이 꽂혀 있다.
그런 출입구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지만, 뭔가 정리되지 못한 어수선함이 가득했다.
“설아, 설이 집에 있지?”
“…….”
서윤이 목소리를 제법 높여서 불렀지만, 반갑게 달려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집 안은 조용했다.
“설아, 나 서윤이야.”
다시 불렀다.
“…….”
그러나 여전히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설마요.”
“그때 은자를 많이 줬으니 문경이나 그런 곳으로 이사 갔을 수도 있지.”
21세기 현대도 아니고 씨족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대인 데다,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으니, 이사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돈이 있으면 가능한 일이니 이사를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그런가?”
“저기 봐, 마루에 먼지가 가득한 것이 이미 사람이 생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마당에도 치운 흔적이 없잖아?”
“확실히 그러네요.”
“가자.”
“이곳에 한 번 오기도 쉽지 않은데, 얼굴이나 보고 갔으면 좋았을걸.”
서윤은 발길을 돌렸다.
“설아~”
발길을 돌리고도 잠시 멈춰 서서 미련이 남았는지 한 번 더 큰 소리로 불러 봤다.
으……~
발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향하는 그때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가 태영의 귀에 살짝 들렸다.
태영이나 되니 들리는 소리였지만, 바로 발걸음을 멈추었고 서윤은 듣지 못한 상태로 출입구까지 갔다가, 태영이 멈춘 것을 알았는지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왜요?”
“집 안에 누가 있어.”
태영이 서윤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래요?”
서윤은 그렇게 질문을 함과 동시에 후다닥 달려 자신의 집과 비슷하게 생긴 움집의 문을 홱 열어젖혔다.
“설아, 설아~아~아~아~”
서윤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기절할 듯한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리고 바로 몸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 엄동설한의 산골 마을에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움집 안에는 약하지만 분명하게 시신 냄새가 풍겼다.
뒤따라 들어선 태영의 눈에 보이는 집 안의 풍경은 절대로 사람이 사는 집의 모습이 아니었다.
쪽구들 한쪽에 얇은 이불이 깔려 있고, 덮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불은 흙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쪽구들에 깔린 이불 위에 앙상하게 말라, 뼈와 살이 거의 들러붙다시피 해서 마치 미라를 연상시키는, 바짝 마른 몸의 여인이 퀭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눈가에 눈물이 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렇게 마른 몸에서도 눈물이 되어 나올 수분은 몸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는 반쯤 백발이 되어 있고, 반은 빠져 없어져 버린 것 같은데, 빠진 머리는 베개 너머에 소복하게 쌓여 있다.
시신 썩는 냄새는, 미라처럼 보이는 여인이 누운 쪽구들 아래로 떨어져 아궁이 쪽으로 기어가 엎어진 채 땅바닥의 흙이나마 긁어서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배고픔으로 죽어 간 아이의 몸에서 나는 것이었다.
태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사내자식이 눈물을 자주 보이면 안 되는데, 저렇게 아이가 죽어 간 모습을 보면 처음 이 시대로 떨어져서 왜구의 손에 발목을 잡힌 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마치 짐승처럼 죽어 간 수은이의 기억이 떠오른다.
태영은 친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인, 설이.
외자로 설인지, 설이인지, 설아인지 모르지만, 한서윤이 그리도 반가워하며 정겹게 이름을 불렀던 여인, 친구다.
도대체 이 여인에게, 그리고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단 불부터 좀 피우자. 그리고 의무병 데려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네, 서방님 빨리 다녀오세요. 미음을 끓일 쌀도 좀 가져오시구요.”
“그래, 그리고 시신이 같은 곳에 있으면 안 되니까, 애 시신은 밖으로 옮길게.”
“네.”
하, 으으……~
태영과 서윤의 움직임을 본 여인 설이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가래가 끓듯 긁히는 목소리로 내는 작은 신음과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숨소리만 입 밖으로 나왔다.
태영은 쪽구들 너머의 벽에 걸려 있는 활대(옷을 걸어 두기 위해 벽에 가로로 걸린 장대)를 덮은 천을 당겼다.
활대를 덮은 천을 걷어 내자 옷 한 벌이 걸려 있었지만 남자의 옷은 아니다.
그 천으로 아이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도르르 말았다.
그나마 겨울인 데다가 집 안도 바깥이나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싸늘했고, 아이가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았는지, 시신의 부패는 이제 막 시작되는 정도였다.
아이의 시신을 밖으로 들고나와 절구 옆에 놓여 있는 지게의 바지게(발채)에 얹었다.
장작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불을 지필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집안일을 한 거야, 안 한 거야?
이 시대의 산골에서는 남자가 산에 가서 불을 지필 나무를 해 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본채와 마주 서 있는 작은 행랑채의 문이나 지붕이라도 뜯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혹시 남편이 행랑채 안에 같은 모습으로 있으려나 싶어 방문을 휙 열어젖혔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기거했던 흔적이 없는, 그냥 창고였다.
와장창~ 쩌적~
행랑채의 나무문을 발로 차서 깨트리고 그것을 발로 밟아 조각내고, 지붕으로 덥혀 있는 짚을 뽑아내 본채로 옮긴 후에 아궁이에 쑤셔 넣고 불을 붙였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은 라이터에 불이 붙어서 짚으로 옮겨붙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깨트려서 장작이 된 나무문 조각에 붙도록 했다.
“집에 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 물 가져다줄게.”
서윤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나와 옹기라고는 몇 개 있지도 않은 장독대에서 장독 한 개를 꺼내 들고 바로 강가로 달렸다.
훙~ 후웅~
태영의 움직임으로 주변에 흙먼지가 마구 날렸지만, 그걸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물이 가득 찬 독을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서윤은 눈가에 눈물을 제대로 닦아 내지도 못하고, 친구의 몸을 조심스럽게 주무르며 몸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지만, 그걸로 되려나 모르겠다.
“가서 의무병 데리고 올게.”
“네, 어서 다녀오세요.”
살아날 수 있으려나.
후우우우웅~ 파아아앙~
태영은 마당을 벗어나자마자, 주위가 날리건 부서지건 상관없이 질풍같이 내달렸다.
푸아아아아앙~
몇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아서 도착했고, 태영을 뒤따라온 바람 소리가 그때서야 들렸다.
“대장님.”
신도익을 비롯한 병사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군 의무병 둘. 유시완, 잔디.”
“넵, 대장님.”
태영의 다급한 목소리 이전에 빛살처럼 쏘아져 온 모습 때문인지 병사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실장님이 다쳤습니까?”
“아니다. 잔디야, 유시완하고 두세 명만, 전에 거기 한 실장 고향으로 와라. 저쪽 모퉁이 돌아서 6킬로쯤 계속 가면 보일 거야. 쌀 한 말과 육포 한 포대와 부식도 좀 들고 오고.”
그렇게 말하고 보니 시차가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좀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의무병, 수액 가져온 거 있나?”
“네, 다섯 포 있습니다.”
“그거 다 챙겨라. 그거하고 일단 쌀 한 되하고 육포 몇 조각만 먼저 날 줘. 그리고 의무병 한 명은 지금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다른 사람은 잔디가 데리고 와라. 올 때 대천막 하나 가지고 오도록 하고, 태블릿은 진이 줘서 대대장 수행하게 하고, 대대장은 그대로 사포로 이동하라.”
“넵, 대장님.”
“무전기 아직 동작해?”
“네, 되다 안 되다 합니다.”
하긴, 전기가 없는 개경에서 충전을 못 했으니 그럴 것이다.
“그럼 그거 하나를 줘. 나와 같이 갈 의무병 누구?”
행동이 빠른 여군 의무병 둘이 이미 구급 군장을 메고 태영의 옆으로 와 있었다.
민초현과 송이안이다.
“상병 민초현, 제가 지금 동행하겠습니다.”
“좋아, 송이안은 잔디와 함께 오도록.”
“넵, 일병 송이안 명받습니다.”
“민초현, 미안하지만 내가 널 좀 안고 가야겠다. 괜찮지?”
“넵, 영광입니다.”
설마, 위급 상황에서 안고 가는 것으로 뭐 관계가 어찌 된다는 등의 이상한 생각은 안 하겠지?
와~ 민초현, 대장님 품에 안겨 가는 거야? 부럽다~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탄성을 내지르는 여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 전방으로 돌리지 말고, 내 옷 안에 얼굴 파묻고, 꽉 잡아.”
“넵.”
약간 얼어붙은 민초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영은 수액과 쌀 몇 홉을 넣은 주머니와 육포를 넣은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바로 민초현을 안았다.
후우우우웅~
발을 움직이자마자 바람을 밀어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민초현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처음부터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도착까지 2분쯤 걸렸다.
민초현의 비명이 들려왔었지만, 마당에 내려놓자마자 잠시 휘청거리긴 해도 태영이 가리킨 방향을 보더니 바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실장님.”
“그래, 초현아. 얘 좀 살려 줘. 얘 죽으면 안 돼, 절대 죽으면 안 돼. 으흐흐흑.”
서윤의 목소리에는 습기가 가득 묻어나고 있었지만, 민초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몸속에 남아 있는 감정이 폭발한 듯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말밖에는 못 할 것이다.
어찌 장담을 할 수 있을까?
태영이 보기에도 살아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살아난다면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리라.
“대장님, 수액이 필요합니다.”
민초현이 고개만 내밀고 말했다.
태영은 수액과 쌀 등이 들어 있는 배낭을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싸늘한 날씨이지만, 오후의 햇살이 그나마 따스하게 비춰들고 있는데, 태영이 움직이면서 소란스러워져서 그런지 사람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대체 이 마을 제비골과는 무슨 악연일까?
단 하나, 서윤을 만난 좋은 인연을 맺은 것을 제외하고는 좋은 일이 없었다.
그나마도 서윤과 태영을 일대일로 봤을 때 좋은 인연이지만, 사실상 서윤을 만난 것도 이 마을의 악연과 연결되어서 만났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음 냄새가 마당에 서 있는 태영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아주 작지만,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잔디 일행이 오는 모양이다.
집을 모르고 있을 것이기에 마을 입구로 천천히 나갔다.
태영의 움직임에 따라 드문드문 인적이 느껴지던 것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말을 탄 네 사람과 아무도 태우지 않은 말 두 필, 그리고 말을 타지 않고 걸어오는 병사 열 명이 태영의 시선에 잡혔다.
“상병 황준호, 연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동행해 왔습니다.”
태영이 말한 외에 1개 소대와 남군 의무병이 한 명 더 따라왔다.
“충성, 소대장 전대기, 대대장님이 대장님을 지원할 소대 차출을 지시하셔서 지원했습니다.”
전대기 소대장.
한규장의 중대에 소속된 개경의 걸인 출신인데, 걸인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똑똑했다.
소대장급이다 보니 태영과 자주 얼굴 맞댈 일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똑똑하고 배려심이 많다고 칭찬을 했다.
“그래, 환자가 여인이니까 황준호는 여기 있고, 송이안은 들어가 봐.”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누가 다쳤습니까?”
송이안이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의 침묵 뒤에 황준호가 물었다.
“그래, 한 실장 친구. 이 마을에 살 때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아마 한 열흘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아. 진즉에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뼈와 가죽만 남았어.”
“왜 그런 것입니까?”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전대기가 물었다.
“이제 알아봐야지. 일단 본인이 깨어나 봐야 하는데, 말도 못 하고 숨은 겨우 쉬는 것 같아.”
“아.”
“아마 하루 이틀 요양해서는 일어서지 못할 거야. 우리도 여기 며칠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져온 천막을 마당에 펼치겠습니다.”
몽골식 천막인 게르이다.
“그래, 그렇게 해. 아 참, 저기 지게 위에 죽은 아이가 있어.”
“아이요?”
“응, 한 실장 친구 아들인데, 얼마나 굶었는지 흙을 파먹은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야. 애가 먼저 죽고, 그 친구도 오늘내일 죽을 운명이었는데, 마침 우리가 온 것 같아.”
“이 마을, 말씀은 들었는데 참 비정한 마을이었군요. 아이 시신은 제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이 엄마가 함께 장례를 치르고 싶을 수도 있어. 그러니 관을 만들어서 밖에다 두도록 해. 날씨가 추워서 시신 부패 속도가 좀 느리니까 며칠은 괜찮을 거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여인 설이는 사흘이 지나서야 몇 마디라도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바짝 마른 몸은 여전하고, 말을 하긴 했지만 몇 단어를 말하는 정도에 그쳐서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의 기력을 회복해서, 이젠 하루 중에 몇 시간 정도는 깨어 있었다.
그사이에 서윤은 정말 지극 정성으로 설이를 돌봤다.
이해는 간다.
마을 사람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다른 남자들에게 틈만 나면 추행을 당할 뻔한 이 척박한 곳에서 자신과 친했던 친구다.
물론 거기까지만 들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21세기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름대로 절친이었던 모양이다.
의무병 둘이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지만, 서윤은 잠시 눈을 붙일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무로 대충 만든 수액 걸이에서 떨어지는 수액이 여인 설이의 팔에 감긴 줄을 따라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저 수액이 마지막이지만, 맑은 미음을 끓여서 입에 넣어 주면 그래도 목으로 넘기기 시작했고, 조금씩 기력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최소한, 이제는 살아났다.
차츰 시간이 경과하여, 말랑한 미음을 먹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강가에서 생선을 잡아 와 잘 익힌 후 잘게 부숴서 미음에 같이 넣어 주기도 하고, 육포를 갈아 넣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몸이 빨리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하루가 더 지나서 나흘째가 되자 말을 조금 더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닷새째가 되던 날이었다.
“설아.”
“……서유, 서윤아. 흐윽.”
잠에서 깨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설이는 자신을 부르는 서윤의 목소리에 눈물부터 쏟아 냈다.
“이제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질 거야.”
한참이 지나자 눈물이 흘러내린 설이의 얼굴을 서윤이 닦으며 말했다.
“주, 그만 죽었어야, 흐으윽, 그, 그대로 죽어야 했는데.”
“사정 이야기는 나도 궁금한데, 아직은 아니야. 몸을 좀 더 회복하고 말해도 돼.”
“우리 정이는 죽었지?”
아이 이름이 정이인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며칠만 더 빨리 왔더라도.”
“아, 하아, 아니야. 내가 죽기 전에 널 만난 것만 해도…….”
그래, 말을 이을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