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41
241. 에도의 고려인(4)
몇 시간에 걸쳐 이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야기는 일족 중에 누군가가 헤이안에서 와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말했고, 그 일을 만든 사람이 태영이었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헤이안으로 오면, 당분간 고려군이 지켜 주는 가운데,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말을 좀 해 봐.”
그러다가 태영의 그 요구에 선조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또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선조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당나라는 마치 고구려인들을 모조리 죽일 것처럼 살육을 하고 다녔다 합니다.”
태영도 역사 시간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당나라 이전, 수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켜 자국의 속국이나 자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수없이 공격해 왔다.
수양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끝없이 공격을 해 왔고, 무려 4차례나 공격을 했다.
그러나 매번 실패하여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하였고, 그것은 국력의 쇠퇴를 불러오게 되면서,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 역시 끝없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이 지키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당나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절대로 고구려를 꺾을 수 없었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두 아들이 권력 쟁탈전을 벌이면서 고구려는 패망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조카의 권력 싸움에 질려 버린 숙부, 연개소문의 동생이 군사들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고, 아버지로부터 막리지 자리를 물려받은 연개소문의 장남은 동생의 권력 야욕에 쫓겨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 투항해 버리면서, 고구려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역사에서 나당 연합군에 밀려 패배한 것처럼 쓰여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당나라를 욕하고, 신라는 욕할 핑계로 내세운 이유일 뿐, 내분으로 멸망했다고 봐야 한다.
매번 공격 때마다 처참하게 패했던 당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를 완전하게 멸망시키고, 나중에 조금이라도 힘을 규합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귀족들은 모조리 죽이거나 당나라로 끌고 갔다.
끌려간 뒤,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 군을 피해 도망쳐서, 그 작은 배에 수십 명의 목숨을 싣고 떠나서는 배가 침몰하여 죽은 이도 수천을 헤아립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은 일부의 사람들이 살아서 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배가 작았으니 침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지.
조금 전에 보여 준 이들의 행동은 괘씸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한없이 측은했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꺾지 못한 한으로 인해, 고구려 사람들은 살려 두지 않으려 했을 테니까.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곳까지 왔을까 싶다.
“해안에 상륙한 우리는 왜국에 도착해서도 당 군의 추격을 피해 다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랬겠지.
“우리 외에도, 당나라군의 처형을 피해 여러 지방에서 도망을 쳤고, 그들은 서로 먼저 온 무리를 몰랐고, 또 나중에 온 무리를 몰랐습니다.”
시기가 달랐으니, 그리고 오는 여정이 달랐으니 그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는 동안에 추위와 배고픔과 상처의 재발로 인해, 출발할 당시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사람들이 겨우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
이미 멸망하여 없어진 나라이지만, 이놈들도 그냥 둘 순 없다.
대체 얼마나 죽이고 또 죽였으면, 저들의 한숨이 방 안을 이토록 가득 채울까?
도저히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농사를 지을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정착하여 살고 있던 중에, 선조 중 한 분이 모두를 불러 모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당시 왜국 황실에 협조를 구하여 이곳 무사시 지역으로 일족의 대부분을 불러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군.
“그분의 힘으로 많은 동족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분의 유해는 사찰에 모시고, 이곳에 신사를 지어 매년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헤이안의 소식을 접하고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뭐지?
가마쿠라를 태운 이야기를 할 때,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태영을 바라보는 사람이 몇 있었다.
태영이 그쪽을 바라보면 고개를 돌리거나, 또는 방바닥을 내려다볼 뿐 화가 났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그래도 아무 말을 않는데, 너 왜 기분 나쁘게 쳐다봐? 하기도 그렇고,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 그냥 무시했다.
“고려왕 묘의 주인은 누구인가?”
“고구려 황실의 한 분으로 약왕이라 하옵니다. 이곳에 고구려 귀화인들을 불러 모으신 그분이시고, 그분의 뜻을 기려 신사를 지었고, 또한 사찰을 세우고, 그 입구에 그분의 유해를 모신 것입니다.”
“흠.”
꼭 안 가 봐도 되겠군.
“좋아.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정리를 해 주지.”
고개를 끄덕인 태영이 이젠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생각이 들었다.
“…….”
가마쿠라를 태우고, 왜군을 평정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다들 묵묵히 태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면, 왜국 왕실이 이곳 에도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곳을 고려의 관할지로 지정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 주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명령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네…….”
반응이 시원찮다.
“너희들이 그곳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겠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만, 그래도 여기는 왜국 땅이고, 원래 왜국 왕실이 있던 헤이안은 이제 고려 땅이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좋지만,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너희가 지는 것이다. 그 전에.”
“네.”
태영이 말을 중단하자 사장과 고진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물한 명 중의 우두머리를 포함해서 모두가 태영을 바라보았다.
“후에후키와 미에바시 지역에서 왜국 왕실을 적대하는 세력이 오고 있다. 그로 인해 이곳은 당분간 전쟁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왜왕이 이기도록 손을 쓸 것이지만, 그 싸움에서 너희를 보호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너희들 스스로 해야 한다.”
“그러시면, 저희가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해야 하는데, 혹시 하루 정도 이곳에 머물러 주실 수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고진명이 말했다.
“기다려 주지. 내일 사시 경에 이곳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한다.”
“네, 그럼.”
모두들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 한 가지 더. 저 여인의 목은 내 것이다. 알고 있지?”
조금 놀라는 여인의 표정과 몸을 잠시 떠는 행동, 혹시 죽이려는 줄 아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
그 여인을 쳐다보는 다른 여인들 아홉 명.
그들을 제외한 스물두 명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약속까지 한 것은 순전히 저 여인의 청을 받아들여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책임져 주면 되지.
책임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사포로 데려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노인이 대답했고, 주위의 몇 사람의 입가에 비웃음이 살짝 맺혔다.
그 비웃음을 흘린 놈들이 대부분 가마쿠라 이야기를 할 때, 태영을 노려보며 분노를 표출하던 놈들이다.
아무래도 저 여인을 취하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여기서 보기에 저 여인들은 동격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리고, 저 여인의 뒤에 앉아 있는 여인들과 저 여인이 지명하는 사람도 포함한다.”
“네?”
“왜?”
태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인들과 노인의 반응을 잠시 둘러보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여인들을 향했다.
“들어라.”
태영은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모두 나와 내 옆에 있는 내 아내의 시종이다. 그러므로 나와 내 아내의 명 이외에 누구의 명도 들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지금 이 말을 무시하고 너희들에게 명을 내리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유를 묻지 않고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혹시 그런 일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고하도록. 알겠나?”
시종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한시적이다.
“……네, 나리. 명을 받자옵니다.”
서윤의 옆에 앉은 여인이 서윤의 재촉에 깊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리고 여인들 사이사이에서 방금 태영이 한 말을 서투른 왜어로 통역을 계속해 주고 있었다.
모두 다 고려 여인이 아니고, 왜국의 여인들도 섞여 있다는 말이다.
“되었다.”
이번에는 고진명과 신사의 사장 쪽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고로 한두 가지 더 이야기하겠다. 첫째,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칼끝을 들이민 자를 살려 둔 적이 없다. 그걸 명심하라. 두 번째,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이 전각을 우리가 사용하겠다. 이상이다. 모두 나가라.”
허~
세상에~
고려말과 왜어가 섞여서 탄식이 쏟아졌지만, 한 번씩 쳐다보기만 할 뿐 모두들 방을 나갔다.
***
다들 나가고, 태영을 제외하면 남자는 없는 곳에 서윤을 포함하여 열한 명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서윤을 제외한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이름이 어찌 되는가?”
서윤이 태영의 걸음을 막았던 여인에게 물었다.
“하…… 한이라 하옵니다.”
“한? 한이?”
“한이이옵니다.”
“성이 한 씨인 거야?”
“아니옵니다. 성은 송입니다.”
“그래? 고개를 들어, 그리고 날 봐.”
부드러운 서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예쁘네.”
서윤은 그리 말하면서 눈물이 흘러 있는 볼을 만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서윤같이 비교 불가의 예쁜 아내가 옆에 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태영이 보기에도 송한이는 보통 미인이 아니었다.
솔직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미인이다.
“…….”
“말투로 보니 이곳 태생이 아닌 것 같은데, 고향이 어디야?”
“…….”
“말해, 괜찮아.”
서윤의 말은 시종일관 부드러웠지만, 이들이 그다지 쉽게 입을 떼지는 않았다.
“곡용이라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사온데 영선현에 있사옵니다.”
소이와 이미설, 그 애들이 살던 곳도 영선현이었는데, 21세기를 기준으로 고성 지방 어디쯤일 것이다.
그런데 영선현을 알아?
왜국으로 잡혀 온 여인들은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경남과 전남 해안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흔치 않게 경북과 전북, 그리고 충남, 더 흔치 않게 경기나 황해도 지역 사람들이 있긴 해도 압도적으로 경남과 전남이 많다.
잡혀 오는 사람은 모두 이십 세 이하의 여인이고, 이들을 지키려다 죽어 간 사람은 남자들과 여인들의 어머니다.
“다들?”
“아, 아니옵니다. 저기 저 아이가 김해에 살았고, 저 아이는 울주현 어딘가, 저 아이는 남해 쪽, 다들 자기가 살던 마을 이름은 알지만, 어느 지역인지는 잘 모르는데, 같은 마을에 산 아이들은 없사옵니다.”
그렇겠지.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은 알지만, 경남인지, 전남인지 아니면 그 어느 다른 곳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왜구에게 잡혀 왔어?”
“네, 마님.”
“부모 형제들은?”
“…….”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한이를 지키려다 죽은 거야?”
서윤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한숨을 푹 쉬고는 천천히 물었다.
서윤은 정하연과 잔디를 포함해서 사포와 율촌의 여인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왜국에서 구해 온 수많은 여인들의 한 맺힌 이야기들을 너무나 많이 들었었다.
어떻게 잡혀갔고, 그들을 지키려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왜구들의 칼에 죽임을 당했는지 들었다.
그리고 왜국에 잡혀가서 당한 일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서윤도 왜구라 하면 이를 가는 사람이다.
“끄헉, 으흐흐흑, 새, 생사는 모르옵니다. 흐으윽.”
잡혀 왔으니 모르는 것이 정상이겠지.
기어이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아픔이 목을 넘어와서 잇새로 터져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몇몇의 아이들도 고개를 숙이고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그게 쉽게 참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구들.
정말 이 새끼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렇게 동쪽으로 내쫓는 선에서 마무리하려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일까?
모조리 죽여 씨를 말려 버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서윤이 송한이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을 있다가, 고개를 들고 송한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자신은 왜구들에게 부모 형제를 잃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지켜 주려 하던 부모 형제가 모두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제일 언니야?”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서윤이 물었다.
“소인이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 나이 몇인데?”
“올해 열여덟이옵니다.”
“그래? 나보다 두 살 적네. 그럼 다들 어리다는 말인데. 말해 봐. 아까 왜 목을 걸겠다고 한 거야? 물론 서방님이 한이의 목을 치지도 않을 것이고,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실 거야. 그러니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서윤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되었구나.
열여덟 살에 만났으니.
“소인은 이제 석 달이 지나면 신녀(神女)의 자리를 떠나게 되옵니다.”
“신녀?”
대웅전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도 없었고, 불상도 없어서 사찰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지만, 신녀라니.
이거야말로 샤머니즘의 극치가 아닌가?
중세의 암흑기는 샤머니즘이 판을 치는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봐도 이 멀고 먼 왜국 땅에 고려말을 하는 신녀라.
서윤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었다.
“네, 마님.”
서윤이 반문하였기에 서윤을 마님으로 칭했다.
“신녀라, 그게 어떤 자린데?”
“신사를 돌보고 정갈하게 관리하는 일과 매월 정해진 날에 제를 지내는 일을 돕고, 매년 가을에 대제를 지내는 것과 그 외의 행사를 돕는 것이 신녀의 일이옵니다.”
“그리고?”
뭔가 미진한 여운을 남기는 어투에 서윤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신녀일 때는 혼인을 할 수 없고 남자와 접촉해서도 아니 되옵니다.”
“그래?”
“네, 하오나 열여덟이 지나 열아홉이 되는 생일에 신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고, 그때는……, 그……때는…….”
뭐지?
뭔데 갑자기 말을 더듬고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거야?
“그때는?”
“…….”
“다들 이리 모여 봐.”
송한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서윤은 나머지를 모두 불러 모았다.
역시 서윤의 말을 서툰 왜어로 옆사람에게 말해 주는 여인이 꽤 여럿이었다.
“자, 모두 고개를 들어라. 앞으로는 지금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도록 하고, 나하고 이야기할 때는 항상 나를 쳐다보도록 해라.”
몇 번의 채근에 고개를 드는데, 헛. 세상에.
어디서 예쁜 미녀들만 고르고 골라서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평안경에서는 고려에서 잡혀 온 여인들 383명을 구했을 때, 고려 땅 어느 곳에나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평범한 우리의 이웃인 여인들이었고, 개중에 간혹 눈이 자연스럽게 돌아갈 정도로 예쁜 여인들이 섞여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여인들.
기껏 열 명인데, 그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미인이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지만, 마치 세계 미인 선발 대회 자리에 최고의 미녀들이 한 줄로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들은 의느님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 미인인 셈이다.
그런데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귀여운 모습이다.
아직 어린 탓이다.
아무래도 신녀의 첫 번째 조건은 미모인 듯했지만, 여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들이다.
제일 어린아이는 그냥 보기에 열서너 살로밖에 안 보였다.
진짜 어린 것인지, 아니면 보이는 것만 앳되어 보이는 것인지.
“사야?”
태영의 입에서 걸그룹의 멤버이면서 일본인 가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태영의 말에 서윤이 잠시 돌아보았지만, 다시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가 좀 어렸을 뿐, 저 아이는 정말 그 가수와 쌍둥이인 것처럼 닮았다.
태영도 군에 있을 때는, 여느 군바리들처럼 걸그룹의 춤과 노래에 환장하던 때가 있었고, 그 걸그룹의 노래를 광적으로 따라 한 적도 있었다.
같은 내무반의 동료들끼리 누가 제일 예쁜지 투표를 하고, 누구와 연애를 해 보고 싶은지, 또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투표도 해 봤다.
물론,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루어질 수 없는 한순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사야라고 불린 아이가 잠시 동안 태영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눈을 내렸다.
“자, 그럼 신녀의 자리를 떠나면 어찌 되는 거야? 그거 말해 줄 사람?”
“かまくらばくふやほかのきぞくのめかけにうらます。 (가마쿠라 막부나 다른 귀족의 첩으로 팔려 갑니다.)”
사야처럼 생긴 아이의 옆에 있던, 역시 예쁜 아이가 대신 말했다.
눈이 조금 사납게 생기긴 했지만, 얼굴 전체에서 섹시미가 넘치도록 흐르는데, 그 아이 역시, 똑같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미인이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それは、よりりょういはずなのに、なぜきらい? (그게, 더 좋은 것인데, 왜 싫어해?)”
태영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동료들에게 하는 말인데, 발음으로 봐서 저 아이는 고려인이 아닌 완전한 왜인이다.
“みんな、しんにょになりたいのに。 (다들, 신녀가 되고 싶어 하는데.)”
신녀가 되고 싶어 한다?
저 아이는 신녀가 된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싫어하는 표정이 뚜렷한 여섯, 그 속에 송한이가 포함되어 있고, 그리고 무표정 셋, 나머지는 그게 더 좋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신분 상승의 수단?
고위 귀족의 첩이 된다는 것은, 21세기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지만, 시대가 다르다.
저 아이들의 출신이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이 시대에 천민의 집안에서 저렇게 예쁘게 태어나기만 해도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거기에 반해 고려인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분명히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