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367
012. 치열하게 사는구나
잠깐의 어색한 침묵.
“와, 선배. 한 카리스마 하신다. 저는 고예은이에요.”
그 침묵을 깬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함유림과 함께 온, 함유림에게 먼저 가라고 했던 그 여학생이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긴 하지만, 얼굴에는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다.
한 카리스마라니?
고려에서는 그런 거 너무 없어서 어려웠는데.
“그래, 반갑다. 너도 반말 기분 나쁘면 욕 한 바가지 하고 가라.”
“괜찮아요. 따지고 보면 나이도 한참 많은 예비역 오빠이신데.”
성격이 좋은 건지, 천성이 그런 건지.
따지고 보면 겨우 2살 차이.
속을 들여다보면, 한참 많다는 말이 맞다.
“와, 방금 너, 살짝 무서웠던 거 알아?”
배재혁이다.
“그래, 잠시지만 나도 간이 쫄리는 느낌이었다.”
권세훈도 그랬다고 한다.
“아, 미안.”
자신도 모르게 미세하게 기운이 새어 나간 모양이다.
친구들이 있을 때는 조심해야지.
간단히 사과하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조금 심했다.”
분위기가 다시 바뀌자 말한 친구는 강동우다.
“그래, 좀 그렇다. 다음에 만나면 미안하다고 해라.”
“그래도 쟤가 학교에서는 최고의 미인으로 알아주는 애인데, 너 보겠다고 따라온 것을 그리 면박을 줘서 보내 버리냐?”
다들 태영에게 사과하라는 뜻으로 말했다.
“아,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함유림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하면서 커피숍을 한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려 보이는 것만으로 반말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함유림이 커피숍을 들어오기 전.
친구들의 그룹 채팅창에 날려 보낸 내용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위니가 알려 준 톡의 내용을 듣고 저 애를 이곳에 있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태영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화제에 올리지는 않았다.
“복학은?”
“2학기에 할 거야.”
“하긴 1학기는 얼마 남지 않았네.”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친구들.
저녁때도 되지 않았는데 커피숍에서 치킨집으로 이동했다.
~쨍~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축하한다.”
아직 치킨은 나오기 전이다.
그보다 먼저 도착한 서로의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관종들이 많은데, 알아보는 사람 많지 않아?”
“선글라스에 마스크 쓰다보니까.”
“응, 그럼 잘 못 알아보겠네. 그래도 다행이다.”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고 하던데,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네?”
박준혁의 질문이다.
“기억은 못 했지.”
“그래? 그런데 어찌?”
“다행히 조별 과제 할 때 만든 파일에 조원의 연락처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조별 과제의 파일도 없고, 기록도 없었다.
이건 변명거리로 생각해 둔 것이다.
“아, 그랬던 적이 있었지.”
태영의 처지에 대해 그들이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래도 메인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매스컴에 등장하던 친구, 아니 같은 학교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 몇 명.
이런저런 질문에 적당한 대답.
대부분의 대답은 ‘모른다’였지만, 그래도 일방적인 흥밋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거야.”
“그래, 맞아.”
태영과는 무관하게 서로에게 말하기도 하고, 서로 동의해 주기도 했다.
창밖을 보니,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깔렸다.
그 어둠을 자동차 전조등과 가로등이 거리를 밝혀 주고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명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한 명은 산업 기능 요원으로 갈 예정이고, 또 한 명은 전시근로역이라고 한다.
면제 바로 아래 단계가 전시근로역, 그런 것도 있었나 싶다.
권세훈은 가을에 입대한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이 조의를 표한다는 말로 놀려 주었다.
참, 다양하기도 하지.
“그런데 너, 뭔가 모르게 어른스러워졌다?”
권세훈이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본인은 잘 모르지.”
박준혁의 말이다.
“선배, 그런 선배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난 어른스러운 사람이 좋더라, 뭐.”
고예은이 박준혁의 말끝에 슬쩍 바라본다.
“자, 시간이 늦었다, 이제 슬슬 일어서자.”
박준혁이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며 자리를 파하자는 신호를 한다.
“그래. 그래.”
박준혁은 태영이 내겠다는 것을 말렸다.
태영과 고예은을 제외하고 더치페이로 지불했다.
기억이 정확치는 않아도 박준혁은 가난했다.
무척이나 어렵게 사는 이 시대의 흙수저들 중의 한 명이다.
태영에게는 유재구로부터 빼앗은 넘치는 돈이 있다.
그런데도, 이제 막 전역한 친구에게 술이나 얻어먹는 나쁜 놈 만들 것이냐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자, 다들 내일 보자.”
치킨집을 벗어나 서로 인사를 하고 모두 헤어졌다.
“2학기 되려면 여름 방학도 지나야 하고, 제법 시간적 여유가 있네. 그사이에 뭐 할 거냐?”
단둘이 남게 되자 박준혁이 물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때까지 여행이나 하려고.”
“여행?”
“응. 그런데 아까 군 문제 이야기할 때, 너는 아무 말 안 하던데 어찌 돼?”
“나…… 면제.”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고, 낮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면제가 좋기는 하지.”
“…….”
입을 다문다.
면제의 이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박준혁은 대학에 들어와서 알게 된 가까운 친구다.
그래도 입대 전에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궁금증은 잠시 눌러 두었다가 나중에 위니에게 물어보면 된다.
“혹시 민재나 정후 소식 알아?”
신입생 환영회 때.
서먹서먹한 상태에서 같은 조가 되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다.
“정민재, 김정후는 가을에 전역할 거다. 너하고 몇 달 차이 나니까. 그리고 임상규, 고청림이는 겨울은 되어야 나올 거야.”
“그럼 네 명 다 내년에 복학하겠네?”
“아마도.”
“네가 그 자리에 지키고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모두 연락이 되는구나.”
“지키고 있기는. 마지못해 사는 거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가슴 아프게 들린다.
말속에 진한 슬픔이 녹아 있는 것 같다.
“너는 군 면제이면 이제 4학년이라는 말인데, 곧 취업해야 하는구나.”
“아냐, 한 해 휴학해서 올해 3학년, 1년 더 다녀야 해.”
“그래?”
“그래도 취업이 걱정이다.”
“왜?”
“요금 취업이 장난 아니다. 특히 내 성적으로는…….”
말을 하다가 만다.
군에 있었던 것을 제외해도 취업 시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럴 것이다.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다.
“자, 아무튼, 나는 여기서 버스 타고 간다. 너는?”
“나 지하철.”
“그래, 다음에 보자. 복학하기 전이라도 종종 와라.”
“그래, 또 보자.”
박준혁이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왜 저리?’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태영은 지하철역 방향으로 향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보니 박준혁은 방금 도착한 버스에 서둘러 몸을 싣는다.
태영은 폰을 꺼내서 지도를 불러냈다.
가까운 곳에 중랑천이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나 좀 쐬고 갈까.’
“유재구 상황은 어찌 되어가?”
천천히 중랑천 방향으로 걸으며 물었다.
“알았어.”
혹시 고소인 있어야 되는 건가 싶다.
“그냥 기다려 보자고. 그리고 내 친구 말이야.”
[어느 친구분 말씀이십니까?]“박준혁.”
[네.]“면제 사유가 뭔지, 집은 어딘지 좀 알 수 있어?”
본인이 알려 주지 않는 것을 조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나른한 느낌이었다.
말에서도 염세적인 느낌이 풀풀 묻어 나왔었다.
[확인해 찾아보겠습니다.]“가족 사항도.”
[네, 마스터.]동부 간선 도로.
보행자나 자전거가 산책로에 접어들 수 있도록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도로가 있는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네.”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밝다.
중랑천 산책로로 내려섰다.
자전거 도로와 보행자 도로가 나란히 뻗어 있고, 가로등이 그 길을 비추고 있다.
중랑천을 흐르는 물길.
건너편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일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친구분 상황 말씀드리겠습니다.]“응.”
[집은 상계동인데 중심지가 아닌 산골짜기의 쪽방에 월세로 살고 있고, 병든 모친을 모시고 있습니다.]“그럼, 군 면제 사유가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다른 가족은?”
[없습니다. 가족은 모친과 친구분 둘입니다.]“모친이 일을 못 하시나?”
대학에서 겨우 1년 반 정도의 친분으로 거기까지 알기는 쉽지 않다.
[중증 장애 1급으로 일을 전혀 못 하고 있습니다.]“중증 장애?”
[네. 또한 기초 생활 수급자에 해당하고, 기초 생활 수급으로 지원되는 돈과 친구분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이유가 뭐야?”
[수년 전 겨울, 출근길에 빙판길 언덕에서 넘어져 발생한 사고로 인한 질환으로 진료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소득이 없습니다.]많지 않은 정보이지만 충분히 추정이 된다.
그래도 위니이기에 그 짧은 시간에 그 정도의 내용을 파악해 낸 것이다.
“보험이 없었나?”
[네, 없었습니다.]가난해서 그랬을 것이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말이네.”
중증 후유 장애가 남을 정도의 사고.
보험에 가입할 돈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삶.
치료비는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추정됩니다.]“혹시, 오늘 날 만나느라 알바 빼먹은 거 아냐?”
갑자기 머리를 번개처럼 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물었다.
[빼먹은 것은 아니고, 심야 근무자와 교대했습니다. 집에 갔다가 잠시 후에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으로 가서 오늘 밤새 일할 예정입니다.]“금방 온다고 하더니, 그래서 늦게 온 거구나.”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시간을 바꾼 모양이다.
일정이라는 것을 갑자기 바꾸기란 쉽지 않다.
“맥주 5백 한 잔으로 끝낸 이유가…….”
[그렇습니다.]“더 있어?”
[새벽에 쓰레기 수거 용역 회사에 시간제 아르바이트 나가고, 주말에 이삿짐센터에서 일합니다.]“치열하게 사는구나.”
박준혁은 자존심이 강했던 것으로 태영은 기억한다.
아마도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런 사실은 몰랐다.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평범한 흙수저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까.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중랑천 산책로를 따라 한강 방향으로 걸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사람이 많지는 않다.
드문드문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일 뿐이다.
~후웅~
전동 퀵보드가 제법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저거, 에어로 만들어서 누나에게 팔아 보라고 할까?”
[퀵보드 에어는 여러 단계를 거쳐서 앞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야 실현됩니다.]“그렇겠지. 지금의 기술로는 어림도 없으니.”
[맞습니다.]“그래도 조사는 좀 해 봐.”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안 되지만…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사해 줘.”
[범위를 약간은 한정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인정. 너무 막연했건 것 같다.
생필품, 옷, 약, 전자 제품도 있다.
자동차도 있고, 편의 상품들도 있고 VR제품도 있으니 너무 광범위하긴 하다.
“범위라. 다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데, 1차로 그것과 관련된 부분부터 찾아봐.”
[넵, 마스터.]***
다음 날.
용인 면허 시험장.
PC 앞에 앉아 필기시험을 치렀다.
만점을 받을 필요가 없어서 한 개만 틀려서 합격했다.
합격 여부는 바로 나왔다.
태영은 다시 기능 시험을 신청했고, 단번에 합격했다.
연습 면허.
도로 주행 시험 접수를 하니 이틀 후에 가능하다고 한다.
[마스터 에뒨.]면허 시험장을 나서는데 위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그래? 당분간 신경 좀 끄고 살아도 되겠는데, 반응은 어때?”
[국회의원 제명을 해야 한다, 아니다로 시끄럽습니다.]“권력자들의 속성은 잠깐 시끄럽게 한 뒤에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이 슬그머니 사라질 거야.”
[…….]“그냥 쇼로 생각하면 돼. 기소되면 더 좋지만, 아닐 거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슬그머니 사라지면 내가 따로 조치를 할 거니까, 자료는 계속 추적해서 모아 두도록 해.”
[네, 그리하겠습니다.]“그나저나 안재희 치료는 어때?”
[안재희 모친이 보호자로 수술 동의해서 수술했습니다.]“궁금해하지 않아?”
[원무과장이 어떤 독지가로부터 수술비와 회복 때까지의 비용은 이미 해결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납득해야 할 텐데. 그리고?”
[경과는 아직 확인 불가능한 상태입니다만, 담당의가 모친에게 설명한 내용으로는 아주 잘 되었다고 합니다.]“다행이네.”
[그런데, 안면 함몰이 좀 있다고 합니다.]“안면 함몰?”
[네.]“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그 어린 여자애가 안면 함몰이 발생할 정도야?”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함몰 부위의 복원 수술이 가능한지는 경과를 좀 더 봐야 하는데, 안면 괴사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경과 나오는 대로 좀 알려 주고, 병원에는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야?”
[재활 치료 하고 퇴원까지 6주 예상됩니다.]젊어서 그런가?
부상이 상당히 심하다고 했는데.
“안면 함몰 치료가 포함되지 않은 기간이지?”
[네, 그렇습니다.]‘아, 씨. 이것도 해결해 줘야 하는 문제이네.’
***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누나가 함께 저녁 준비를 하고 있다.
“어? 오늘도 소고기?”
“그래, 일요일에 먹고 남았잖아? 생고기는 냉장고에 오래 보관하면 안 된다고 하네. 그래서 오늘 또 먹으려고.”
그런가? 그렇구나.
“태영이 왔구나?”
아버지가 씻고 얼굴과 손을 닦은 수건을 목에 걸고 세면장에서 나왔다.
“네, 아버지. 혹시 소주 한잔 하실래요?”
아버지가 식탁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집에 사다 놓은 술이 없어.”
“그래, 여기서 술 사러 다녀오려면 30분은 걸려.”
아버지의 아쉬움이 묻어나는 대답에 어머니도 덧붙였다.
“제가 오면서 몇 병 사 왔어요.”
“그래?”
반가워하는 표정이다.
“잠시 기다리세요.”
태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종이 박스를 가져왔다.
소주 여섯 병이 들어 있다.
고기 익는 냄새.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모처럼 만에 온 가족이 술잔을 놓고 함께하는 저녁 식사다.
복권에 대한 이야기, 누나의 취업 이야기.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결론 없이 떠돌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좀 있어요.”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식사가 막바지로 갈 때 태영이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뭐가?”
“우선,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시다가 귀농을 하신 이유도 궁금하고, 친척이 없는 이유도 궁금해요.”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보여 준 어머니의 놀란 표정.
“…….”
감추려고 했지만 놀라움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아버지의 표정.
“…….”
누나의 얼굴에 나타난 궁금함과 미안함.
하지만, 태영의 질문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