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39
039. 뜻밖의 방문객(2)
“분명 경고했었다, 우리에게 칼을 겨누면 모두 죽는다 했다, 방금 저기 죽어 넘어지는 문 교위라는 놈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우리는 너희 모두를 죽여 버리면 되니까.”
이성화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김웅겸이 말을 이었다.
“명을 내린 현감 나리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현감 나리에게 바로 책임을 물을 수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행동에 나선 문 교위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자, 누가 또 나설 것인가?”
“이…… 이…… 이놈들이.”
이성화가 이빨을 앙다물며 으르릉거렸다.
현감의 뒤에서는 관군들이 겁을 먹고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태영에게도 들려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는 모두들 들었겠지만, 그 바람 소리와 함께 문 교위가 죽었으니 동요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현감 나리, 관할 구분에 따르면 우리 사포는 현감 나리께 보고할 의무도, 명을 받아야 할 의무도 없는 곳이란 것을 잊으셨습니까? 또다시 저희를 핍박하시면, 이번에는 그 책임을 현감 나리께 직접 물을 것입니다.”
태영이 한참 뒤에 알았지만 사포와 율촌은 현감이 없는, 즉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현에 해당하는 고을이었다.
아무튼 따지고 들면 김웅겸의 말이 사실이지만, 저들은 애써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또 현대와는 크게 다른 점인데, 현대에는 관할권에 대한 개념이 비교적 철저한 편이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 봤다고 할 수도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태영이 있던 군부대에서의 관할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소속이 다른 곳의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경례는 하지만, 그 사람의 부하는 아니다.
소속이 다른 곳의 상급자가 부탁 정도의 지시는 할 수 있고, 그 정도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관할권과 상관이 있는 부분에 대한 명령이나 업무 지시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서 당연히 거부한다.
그런 것에 대한 정확한 구분을 사포와 율촌에서도 적용시켰는데, 이성화가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다.
“뭐라? 내 너희 놈들을 반드시 물고를 내고 말 것이다.”
김웅겸이 책임 운운하자 이성화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으르릉거렸으나 다시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다. 방금 문 교위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 자 그만, 그만하시오. 이곳 관아도 잘한 것 없지만, 관할권도 없는 현감 나리도 잘한 것 하나도 없소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최세헌이 다시 나섰다.
최세헌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이곳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급한 일 하나 없는 것처럼 여유 있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도 문 교위를 죽인 것은 과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현감 나리께서 시작한 일이니 부하 무관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에서 그만하기를 바라오.”
그렇게 말한 최세헌이 쓰러진 문 교위 곁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더니 문 교위의 상처 자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뒤집어서 후두부에 난 상처까지 손으로 비비면서 직접 확인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크게 닿은 듯하고, 그 이상함을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태영과 김웅겸을 번갈아 보며 한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리고 무엇으로, 어떻게 문 교위를 죽였는지는 모르나, 호장께선 문 교위를 죽인 무기에 대해 적어도 내게는 해명해야 할 것이오.”
하, 골치 아파.
이렇게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면 진짜 난감하다.
생각보다 상당히 똑똑한 놈이네.
“현감, 날 이곳까지 데려다주었으니, 오늘 늦었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돌아가시오. 밤길이기는 하나, 행여 율촌에 들어가서 숙식을 요구하거나 하지 말고, 곧장 돌아가시오.”
최세헌이 말은 현감에게 했지만 시선은 태영에게 향해 있었다.
“아울러 문 교위의 일에 대한 것은 알아서 처리하고,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치하시오. 만일 이 일이 논란이 되면, 내 결코 현감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알겠소?”
이성화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최세헌과 태영, 김웅겸을 번갈아 보았다.
“알았소이까?”
현감이 답이 없자 최세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상황이 조금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나쁜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네, 별장 나리.”
이성화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빨을 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건 신경 쓰지 않는다. 나중에 뭔가 해 보려고, 군사를 끌고 온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김웅겸이 태영을 쳐다보자 태영은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김 하사, 소대원들 인솔해서 현감 나리와 관군들을 사포 어귀까지 배웅해 드려라. 혹시, 네게 다시 책임을 물으려 하거나 그에 준하는 이상한 짓을 하거든 모조리 사살해도 좋다.”
“명 받자옵니다. 충성!”
김처인이 부동자세로 서면서 경례를 하려고 하는데, 김웅겸이 한마디 더 꺼냈다.
“단,”
김웅겸이 한마디를 더 하려고 말을 꺼냈다.
“네, 하명하십시오.”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았나?”
한 명을 죽이게 된다면 전원 사살하라는 말이다.
무서운 명령이지만, 그것이 정상이다. 현감이라고, 현감의 주위에 있는 군관들이라고 그 명령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넵, 알겠습니다. 충성!”
김처인이 다시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면서 호각을 꺼내 빼액 소리가 나도록 불고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들었나? 들었으면 즉시 시행한다!”
“넵,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소대원 중의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고, 뒤이어 경례 구호가 합창처럼 들려왔다.
최세헌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가 태영이 바라보자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 현감. 이제 교위의 시신을 수습해서 출발하시오.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만 당부를 하자면, 절대로 이들에게 조금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마시오. 만일 내 충고를 무시하고 조금 전과 같이 했다간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내 장담할 수 있소.”
현감이 여전히 어이없어하면서 다음에 두고 보자는 표정이었다.
“내 느낌은, 지금 이 사포의 가병들은 북방의 어떤 부대보다 군기가 잘 확립되어 있고, 그들보다 훨씬 강하오. 그러니 30인의 관군을 믿고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오. 알겠소?”
“……네, 나리.”
마지못해 답을 했지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고, 최세헌의 말이 이어졌다.
“아울러 30이라는 숫자는 현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내 말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오.”
30대 후반이나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고, 현감보다 젊어 보이는데 그 모든 상황을 간파했다는 말이야?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혜라는 것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에 뒤따르는 실천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게 태어나서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이 배워서 지식이 충만한 사람의 지혜를 넘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저 별장의 지혜의 깊이와 상황 판단 능력이 가늠되지 않는다.
이제 20대 중반에 불과하긴 하지만, 태영이 보기에 정말 대단하다 느껴진다.
하긴 온갖 음모와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개경 땅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니 말해 무엇 하랴 싶다.
태영이 기껏 살아 봐야 25년을 살아왔지만,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온 어린 시절 8년, 세상 물정 모르고 천방지축이던 초등학교 6년을 지나고, 그다음에는 대학을 가기 위해 준비하느라 중·고를 합쳐서 6년을 보냈다.
그리고 두 해 동안 대학 생활을 하다가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의무 사항인 군에 가게 되었고,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군대 생활을 하다가 전역을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 시대, 고려로 튕겨져 왔다.
이곳에서 2년이라는 기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머리싸움을 할 일이 없었다.
그저 알고 있는 지식을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고, 모든 사람들은 태영에게 마음으로 복종했다.
그러니 사회생활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될 시간도 없었고, 인생살이의 지혜라고 할 만한 것들이 발휘될 틈도 없었다.
그런데 최세헌이라는 저 사람의 행동을 보니 태영의 머릿속에서 위험 경보가 계속해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조심해야지, 조심해야 해.
***
관아의 대회의실에 최세헌과 마주 앉았다.
그 옆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별도의 테이블과 의자에 정하연과 잔디가 앉고, 김웅겸이 태영과 나란히 앉았다.
태영과 김웅겸은 간단하게 이름을 말하는 정도로 소개를 했고, 최세헌은 이미 밖에서 죽은 문 교위가 소개를 했으니 추가로 소개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저기 앉은 여인도 가병이오?”
최세헌이 물었다.
“우린 가병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처이기도 하고 군인이기도 합니다.”
“군인?”
“네, 우린 군인이나 병사라 부릅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소만, 대단하군요. 개경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신 데다, 기도가 보통이 넘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한 남자들은 완력으로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아니, 내가 보기에는 그렇소이다. 그리고 여기 앉은 것을 보니 중책을 맡고 있는 모양이지요?”
최세헌의 감탄 어린 말에 정하연이 조심스레 일어서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 실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이 아이는 비서실의 병사입니다.”
정하연이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잔디를 포함한 비서실 병사들에 대해 알렸다.
“비서실? 실장? 그건 어떤 직위이오?”
“우리 고을은 중앙 정부의 조직 체계를 따라갈 수는 없고, 지방 행정 조직과도 달라 우리 나름대로 정한 체계입니다. 실장이란 최상급자를 보좌하며 관련되는 행정 처리를 하는 자리로 알면 되겠습니다.”
“흐음, 그래요? 여인이 가병이라는 것도 처음이고, 요직에 있다는 것도 처음이라 상당히 의외인데 이유가 있겠지요?”
“뭐, 특별하진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고을에서는 남녀의 차별도 없고, 신분의 차별도 없이 오직 능력으로만 기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된 것이고, 실제로 여군이 제법 있습니다.”
“남녀의 차별이 없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은 아주 의외이군요. 사실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고.”
태영은 그냥 웃기만 했다.
더 이상 뭐라고 말을 해?
그때, 별이가 차와 곶감을 들고 들어와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다른 고장에서는 이미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포에서는 지금까지 곶감이 없었는데, 지난 가을에 태영이 곶감 만드는 것을 가르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 이게 무엇이길래 이렇게 맛이 있는 것입니까?”
곶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최세헌이 감탄을 했다. 최세헌도 모르는 것을 보니 처음 먹어 보는 모양이다.
“곶감이라 하는데, 별장 나리께서 개경으로 돌아가실 때 한 상자 드리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잘 먹고 주위에 자랑도 좀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들어오면서 보니, 다른 고을과는 달리 백성들의 모습에 활기가 차 있고 모두 웃는 모습이던데, 이 역시 호장께서 치세를 잘했기 때문이겠지요?”
“굶는 사람 없이 모두가 풍족하기에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래요? 율촌과 사포 중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큰 집들이 있던데, 그곳은 무얼 하는 곳이오?”
“아, 그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학당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요?”
“네. 율촌과 사포 사람들은 모두가 그곳에서 글을 배웁니다.”
“하, 이런이런, 이런.”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태영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하고도, 굶는 사람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구요?”
“네, 그러합니다.”
별걸 다 꼬치꼬치 물어온다.
그냥 박한 때문에 왔으면, 박한의 일이나 알아보고 가지.
“이거 내가 너무 여러 가지를 물은 모양이오.”
태영의 찡그린 표정을 보아서일까, 말을 돌렸다.
“우선, 박한 전 호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소이다.”
태영은 간략하게 요점만 설명했다.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가병들에게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호위하게 하여 도망을 쳤기에 그로 인해 많은 양민들이 죽었으며, 그사이에 태영이 왜구를 모두 물리쳤고, 그 뒤에 박한이 돌아오자 남아서 왜구들과 싸운 가병들을 처벌하려고 했기에 자신이 참했다고 했다.
박한을 참하는 것에 격분해서 덤비는 다른 가병들도 함께 참하고, 자신을 암살하려 한 가병들을 처단한 뒤 자신이 호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암살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박한의 처의 친척인데, 박한의 처와 가족들도 암살하려는 무리에 합류했기에 모두 참했다고 했다.
박한의 가족들이 살아 있고, 노비가 되었다고 하면, 혹시나 그들을 만나겠다고 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
“잘하였소이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했다면 죽어 마땅하오.”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말을 이었다.
“박한과 나는 한두 번 만난 정도인데, 선대의 어른들끼리는 인연이 좀 있었소. 박한은 중앙 정계로 나아가고 싶다고 했고, 그 일환으로 내게 군부의 요직에 천거해 달라고 했는데, 위인이 워낙 옹졸하고 욕심이 많은 데다, 어리석기까지 하여 천거하기를 꺼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2년 동안 소식이 뚝 끊어지기에 마침 휴가를 받았고 해서, 유람을 하면서 와 본 것이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말에는 모순이 없는 것 같다.
“그러시군요.”
그러다가 회의실 내부에 한글로 쓰여 걸려 있는 족자와, 사포와 율촌을 중심으로 하여 인접의 고을까지 그려진 대형 지도에 눈이 갔다.
“허, 이것이 무엇이오?”
최세헌이 지도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지도 앞으로 가서 섰다. 지도에는 한자가 아닌 한글로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포와 율촌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지도입니다.”
“아, 이렇게 상세한 지도라니, 그런데 여기에 쓰인 것들은 글자도 아니고 이게 무엇이오?”
“그건 글자가 맞습니다. 사포에서 사용하는 글자인데, 고려 글이라 합니다.”
“그럼 이 글자들은, 그리고 이 지도는 누군가가 만든 것이오?”
김웅겸과 정하연이 태영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는 태영이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 한글이다.
세종 대왕께 정말로 죽을죄를 지은 것이지만, 세종 대왕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조선왕조가 세워지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찌 설명하나?
“그래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최세헌이 대답을 들은 것처럼 반문한다.
아무도 태영이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최세헌의 질문은 태영이 만든 것으로 인정하고 태영을 쳐다보며 확인하는 과정 같았다.
“그 글자들은 한어와 달리 글을 배우는 데 며칠이면 충분합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옆에 있던 김웅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별장 나리께서 하문하신 그 말 그대로 한어로 쓰실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라는 말?”
“네, 그렇습니다.”
“이 말을 어찌 그대로 쓴단 말이오? 말과 글자는 엄연히 다른데.”
한자를 빌려다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김웅겸은 펜을 들어 먹물에 찍더니 회의 탁자에 놓인 종이에 그대로 써 내려갔다. 그러고는 최세헌의 앞으로 종이를 돌려놓고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었다.
최세헌이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아 김웅겸이 가리키는 글자에 시선을 주었다.
“그. 게. 무. 슨. 말. 이. 오. 라는 글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쓰고, 쓰인 글을 그대로 읽습니다.”
김웅겸이 손끝으로 글씨를 짚어 가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 주었다.
총을 숨기고 비밀을 유지하라고 했을 뿐, 한글에 대한 비밀 유지를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랬더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랑스러웠던지 얼굴에 환한 웃음까지 띠고 최세헌에게 가르쳐 주었다.
최세헌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 큰일 났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때리고 지나간다.
아까, 김웅겸이 펜을 들 때부터 신기한 듯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보았는데, 한글을 써 내려갈 때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 태영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