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394
039. 뜻밖의 만남(1)
행인 한 명 보이지 않는, 밤이 깊은 시간.
그 길을 향해 꾸벅 절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수도 없다.
저 아이, 안재희의 절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이놈아. 잘 해라. 나로 인해 네가 입은 피해를 갚아 주는 것이지만,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다.”
터덜터덜 걸어서 공동 현관 앞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폰을 꺼내는 모습도 보인다.
폰의 액정에서 비치는 빛으로 얼굴이 보였다.
눈물 자국을 비벼서 닦고는 손끝이 타다닥 움직이다가 말았다.
“어이쿠, 저렇게 울면 눈이 퉁퉁 부을 텐데. 그만 좀 울어라. 그만 좀.”
~웅~
폰에 울리는 진동.
(가셨나요?)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리고 화면을 보니, 글씨는 곧바로 빛이 꺼진 액정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
이걸 열어 보면 숫자 1이 사라지겠지.
열어 보지 않아도 내용은 이미 봤으니까.
5분쯤 더 기다렸다.
그러다 안재희가 공동 현관 안으로 사라지자 태영도 옥상을 벗어났다.
***
대여한 회의실에서 기다리자, 강인목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얼굴이 잘생긴, 장신의 남자.
강인목이 이야기한 그 선배일 것이다.
“앉으십시오.”
“네, 반갑습니다. 김지열입니다.”
“최태영입니다.”
“TV나 신문에서 보던 분을 만나는 일도 있네. 오늘 채용 결정과 상관없이 반갑습니다.”
“팬심, 뭐 그런 겁니까?”
얼굴이 알려진 것은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이기도 하다.
“하하하, 인목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인목아.”
“응.”
어정쩡하게 서 있던 강인목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태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너는 이 아래 커피숍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있어라.”
“그래, 나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강인목이 회의실을 나가고 잠시의 적막이 흘렀다.
태영은 명함을 꺼내 김지열의 앞으로 밀었다.
“터니테크, 뭔가 생략된 이름 같은데 풀 네임이 따로 있습니까?”
명함을 받은 김지열의 질문이다.
“별 의미 없습니다.”
“뭐 하는 회사입니까?”
“이력서 가져오셨죠?”
대답 대신 물었다.
“아, 이거 참. 종이 이력서라면 없고, 폰으로 전달해 드려도 됩니까?”
“네, 상관없습니다.”
~웅~
김지열이 태영의 명함을 앞에 놓고 폰을 조작했다.
곧바로 이력서가 왔다.
태블릿과 연동되어 태블릿 화면에 이력서가 나타났다.
“인목이가 나이 이야기는 안 했는데, 32세이군요.”
사실상, 강인목에게 들은 몇 가지 정보면 충분했다.
또, 위니를 시켜 조사했기에 모두 알고 있다.
“네, 그전에 뭐 하는 회사인지 알 수 없습니까? 이름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조금 애매한데요.”
“우선, 답을 드리기 전에 내가 궁금한 것을 확인 후에 질문을 받기로 하죠.”
“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습니까?”
“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느냐고요.”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만.”
“다른 회사, 오라는 곳 있습니까?”
이력서도 넣어 보고,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도 해 봤다.
완곡한 사양이 답으로 돌아왔다.
일자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전과를 속일 수는 없어서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를 나온 사람의 자존심이 여전히 남았던 모양이다.
조금 힘이 든다고 일용직에 발을 들여 놓을 수는 없었다.
몇 달을 백수로 보내는 중이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이르고 있다.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일하는 거로 하죠.”
“……터니테크가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는…….”
“그게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곳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되지 않았나요?”
태영은 태블릿을 김지열 앞으로 내밀었다.
비밀 유지 각서.
“이건?”
“서명하시면 터니테크가 어떤 회사이며, 어떤 물건을 만드는지 설명 드리지요. 뒤에 연봉 계약서와 기타 서류들도 있습니다. 연봉이 적다 생각되면 말씀하세요.”
적지 않을 것이다.
김지열은 태블릿 화면을 이리저리 밀며 확인했다.
태영을 한번 쳐다보고 서명하고, 다시 넘기고 서명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연봉 계약서 부분에서 잠시 멈추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많다, 적다 표현 없이 서명을 했다.
마침내, 태블릿을 태영에게 밀어 주었다.
모두 서명하는 것을 보았기에 굳이 태영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왜 묻지 않는 겁니까?”
출근 일정 이야기까지 마치고 나자 김지열이 물었다.
“뭐를 말입니까?”
“인목이에게 듣지 않았습니까?”
김지열이 말하는 것은 폭행 전과 이야기다.
2년 전, 백화점의 가을 정기 세일을 하는 기간.
김지열은 모친 박은주를 모시고 백화점 쇼핑을 갔다.
오프라인 매장의 대표 격인 백화점도 온라인 매장에 밀려 점점 입지를 잃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구입해야 하는 품목들은 여전히 백화점이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세일 기간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사람들이 붐비다 보니 종종 부딪치기도 한다.
젊은 연인 사이로 보이는 둘이 격한 제스처를 하며 매장을 설치고 다녔다.
나근배와 추수연.
그 둘은 박은주의 곁을 지나면서도 여전히 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박은주가 든 핸드백 클립에 추수연이 손을 스쳤다.
그러자 손등에 상처가 나며 피가 흘렀다.
추수연은 비명을 질렀고, 박은주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일행인 나근배도 피가 흐르는 연인의 손을 보고 박은주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다.
박은주는 자신이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서서 옷을 구경하다가 당한 날벼락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너희들이 움직이면서 그랬지 내가 뭘 어찌했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나근배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손에 상처를 내게 한 것 아니냐며, 소리를 질렀다.
나근배는 박은주를 거세게 밀쳤다.
박은주는 철제 옷걸이들과 함께 밀려 넘어졌고, 골절상을 입었다.
박은주와는 다른 위치에서 옷을 보고 있던 김지열.
이 소란에 놀라서 돌아보다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앞뒤 따지지 않고, 나근배를 폭행했다.
쌍방이 주먹을 주고받았다.
김지열은 복부에 피멍이 들고 뺨에 상처가 났다.
나근배는 코뼈가 내려앉고, 이빨 2개가 나갔다.
이 일로 김지열은 징역 1년 6개월, 나근배는 집행 유예 2년으로 판결이 났다고 했다.
태영이 법은 잘 모르지만, 나근배에 비해 김지열에게 과한 벌이 주어진 것 같기는 하다.
그 판결을 내린 놈의 어미가 그 꼴을 당했으면 저는 어떻게 했을지 모르지만.
감옥에 가게 되었으니 회사는 당연히 잘렸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후에 꽤 여러 회사를 지원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불문하고 전과자 딱지는 언제나 김지열의 발목을 잡았다.
“폭행 사건 말이죠?”
“네, 맞습니다.”
“내 어머니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 정도로 끝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그 정도에서 참기를 잘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참나?
당연히 이성보다 본능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
다음 일은 머릿속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잘했다고 말을 해 주지는 못한다.
최소한 네가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만 말해 주면 된다.
입사하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
“…….”
김지열은 가만히 태영을 응시했다.
“되었나요?”
김지열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폴더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태영은 신용 카드 한 장, USB 메모리 하나, 그리고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먼저 입사한 분이 있습니다. 신정현이라고. 화학 공학 전공자입니다.”
“여자입니까?”
“네.”
“테크, 화학 공학, 그리고 재료 공학.”
“뭔가 언밸런스, 생각과는 다르죠?”
“네, 사실 그렇습니다. 이름만으로 보면 IT 회사 맞는데, 여기는 사무실도 아닌 대여 회의실이라니, 색다르기도 하고.”
“계약한 사무실에 아직 입주를 못 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정지영에게 했던 설명.
질문은 설명이 끝난 뒤에 하라고 했다.
30여 분에 걸친 제품 설명이 끝나자 김지열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장님.”
“네.”
“제가, 사장님보다 9년을 더 살았고, 명문 대학 나왔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건 말이 안 되는 제품입니다.”
“왜요?”
“지금 만들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현재의 기술로는 절대로 구현이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먼저, 이걸 누가 어디서 개발했는데요?”
“내가, 여기에서.”
태영이 자신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대답해 주었다.
“아, 정말 미치겠네.”
김지열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 안 되고, 절대로 수긍하지 못한다는 정도는 안다.
미래의 기술을 당겨왔는데, 이해가 되면 그것이 비정상이지.
“리튬 이온을 확보할 방안이 있습니까?”
“리튬 이온을 왜요?”
“필름형으로 된 디스플레이나 키보드는 그렇다고 해도, 충전 배터리의 필수품 아닙니까?”
“아, 그래서…… 우린 리튬 이온 안 써요.”
“리튬 이온을 사용하지 않고 충전 배터리를 만든다구요?”
“네.”
“아니 대체…….”
김지열에게 제품의 설명은 했지만, 이해는 시킬 수 없다.
그리고 이젠 마무리를 해야 할 단계다.
“자, 이해되지 않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이 정도 하고, 제품 나오면 알게 될 겁니다.”
“하아.”
“이제 강인목이나 보러 가죠.”
김지열은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눈이다.
하지만 태영이 마치자고 하니 억지로 일어선다.
***
학생회관의 카페에 박준혁과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2주 정도는 거의 못 나온다는 말이지?”
“그래, 아마 그렇게 될 거야.”
“학생증 카드 날 주면, 내가 대출해 줄게.”
“난, 알려진 얼굴이라 그거 안 돼.”
박준혁은 한숨을 다 쉰다.
~우우우웅~
‘인룸프로.’
사무실 이전을 하는 회사다.
주로 정밀 장비들의 이전 설치를 전문으로 한다.
일반적인 이사와 다른 방식이다.
사무실과 공장의 정리.
클린 룸 시설과 공조 시스템.
무진동 운송.
정밀 장비의 설치 등을 종합적으로 하고 있는 회사다.
무척이나 비싸지만, 태영이 입주할 사무실 겸 공장의 정리부터 클린 시스템 설치와 설비 세팅까지 담당하고 있다.
“네, 최태영입니다.”
박준혁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주고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기성 시스템에서 납기를 이틀만 당기면 안 되겠느냐고 문의가 와서 연락드렸습니다.]“왜요?”
[이미 제품을 다 만들어서 이제 시험만 완료하면 된다는 것은 이미 보고 드렸지 않습니까?]“네, 그랬죠.”
[시험이 완료되어 현장 설치 검수만 남은 상태인데요. 다음 작업을 해야 하는 문제와 조금 복합적인 이유로, 납품을 당기자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아, 이것도 참 그렇네.
이 일정이 틀어지면 전체적으로 틀어지는데.
“당기는데 혹시 문제가 있나요?”
[그러려면, 휴일에 작업을 해야 하고, 투입 인원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의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결론적으로 돈이 추가로 들어가는데, 더 줄 거냐는 말이다.
“추가 비용을 지불해 드릴 테니 그렇게 진행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저기…….”
통화 중에 여학생 둘이 카페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차를 주문하는 대신 태영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린 사람이다.
“네, 누구?”
이런 일이 간혹 있기에 또 연락처를 받아 가고 싶은 여학생이리라 생각되었다.
“최태영 씨 맞죠?”
“네, 그런데요?”
“저는 백정연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던 박준혁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네, 그런데요?”
“정연이?”
박준혁의 물음에 자신의 이름을 말한 여학생의 시선도 돌아갔다.
“너……?”
태영은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듯.
“신상계 초?”
“맞아.”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다른 곳으로 이사 갔나 했다.”
백정연의 말이다.
“너도 우리 대학에 다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같이 두 사람은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기억에 일치되는 부분에서는 맞아, ‘그래, 나도 기억나.’라며 장단을 맞추었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초등학교 다닐 때, 친한 사이였다.
중학교 가면서 연락이 끊어졌고, 백정연은 박준혁을 많이 찾았다는 것이다.
“준혁아, 나중에 연락해.”
잠시 말이 끊어진 틈에 태영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저…….”
백정연이 함께 일어서며 태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
“사실은 최태영 씨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워서 실례를 했어요.”
“말씀하세요.”
“잠시 앉으시면…….”
백정연이 태영과 박준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가 비켜 줘야 하는 자리 같네.”
이번에는 박준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냐, 준혁아. 그게 아니고…… 희영아, 너도 앉아.”
백정연의 말에 함께 온 여학생 한 명도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정희영입니다.”
남자 둘, 여자 둘이 앉은 모습은 미팅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희영이가 지난번에 교정에서 외국인들이 최태영 씨에게 말을 걸었을 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고 해서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주변에 꽤 여러 명이 있긴 했다.
“그런데요?”
“희영이는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영어를 무척 잘하는데, 최태영 씨 영어는 거의 완벽한 영어라며, 우리 영어 동아리에 초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학교와 사업, 양쪽을 진행하면서 늘 시간이 부족한데 무슨 동아리.
동아리는 1학년 때부터 시작하는 거 아닌가?
2학년 2학기에 신입 동아리 회원이라니.
앞으로 2주에서 3주는 태영의 회사가 건물에 입주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바쁘다.
어쩌면, 대부분의 수업을 펑크 내야 할지도 모른다.
“Is it only English there? (거기는 영어만 해요?)”
“어……어…… 네?”
“봐요 언니, 얼마나 유창해요?”
정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정연에게 말했다.
한 문장인데 그걸로 유창한지 아닌지 어찌 아니?
“Que tal el espanol? ????? ?? ????? ??? (스페인어는 어때요? 힌디어도 좋고.)”
“…….”
백정연도, 정희영도 두 눈만 껌벅껌벅한다.
박준혁조차 ‘야, 너?’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건 아주 단순한 문장인데.
“음…… 아, 흐음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말을 못 알아들어도 ‘에스파뇰’이라는 말과 ‘힌디’라는 말은 알아들어야 정상이지.
“난 동아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굳이 여기까지 왔으니 설명이나 한번 들어 보죠.”
“아, 근데 왜 꼭 교수님하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죠?”
“나야 모르죠.”
살아온 기간이 길어서 그렇다.
현실 나이에 조금씩 패치가 되어 가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은연중에 표출되는 연륜은 감춰지지 않는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