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466
111. 혼외자를 데려가라
맞아.
“그때, 문제가 좀 있었지.”
그랬다.
그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지만, 너무 오래전이다.
“혹시 몸이 이상하면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닌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화가 오긴 했나? 내가 그냥 무시했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연예인 지망생, 예쁜 아이였던 것 같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판사직을 내려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예쁜 아이였었다는 생각이나 하다니.
그 전에 와이프에게 뜯겨 죽고, 장인에게 맞아 죽게 될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내가 미쳤군.”
빈털터리로 쫓겨나도 좋다.
와이프와 헤어질 수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그놈에게 친자 확인서를 와이프에게 보내라고 할 텐데.
그전에 장인에게 맞아 죽을 거다.
호텔 문 안쪽에 서 있는 안내원에게 담배 한 개비를 빌렸다.
물론 갚지는 못한다.
자신도 알고, 안내원도 알 거다.
~후욱~
~빠아아아앙~
누군가가 울리며 달리는 경적 소리.
“개새끼들, 클랙슨 울릴 일이 뭐가 있다고.”
괜히 짜증이 났다.
연기를 하늘로 길게 뿜어냈다.
하늘에는 별빛 대신 도시의 조명만 눈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담배 연기가 목으로 넘어가며 매캐하고 알싸한 느낌이 오히려 반갑다.
“인생이 왜 이래.”
재떨이를 향해 담배꽁초를 집어 던졌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
(좀 만납시다. 인간적으로.)
문자를 보냈다.
“씨발, 인간적으로라니, 내가 미쳤지.”
보내 놓고도 웃겼다.
전화기가 꺼졌으니 보나 마나 읽지 않겠지만, ‘인간적으로’라는 그 말에 넘어와 줄까?
제발 넘어와 주면 좋겠는데.
‘좀 만납시다’라니, ‘좀 만나자’ 이렇게 써야 하는데, 왜 손가락이 제멋대로야?
“제기랄.”
***
태영은 여주로 방향을 잡았다.
누나도 여주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이제 연내에 해야 할 일들은 모두 끝마쳤다.
가족들과 연말을 보내면 된다.
이새봄에게 며칠 집을 비울 거라는 말을 해 주지 못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뭐 어떠랴.
[마스터.]“응.”
[김명준 판사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읽어 줘 봐.”
[‘좀 만납시다. 인간적으로.’라고 써 보냈습니다.]“너 누구야 했던 놈이, ‘만납시다’라니. 거기다 ‘인간적으로?’ 돌아 버린 놈이군.”
웃음이 나왔다.
[답신을 뭐라고 할까요?]“내일 오후 4시, 청계산 국사봉 정상에서 보자고 해.”
[네, 보냈습니다.]새해 첫날.
일출을 보는 것도 아니다.
일몰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산 정상에서 보자고 하면 미쳤다고 할까?
겨울이라 오후 4시면 1시간 안에 일몰이다.
국사봉의 높이는 높지 않고, 쉽게 오르고 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오기는 하려나?
렌터카라도 차를 이용하니 편리하기는 하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의 새 차와 누나의 차가 마당에 주차해 있다.
전역하고 왔을 때도 사용하던 아버지의 낡은 RV카는 여전히 마당 한곳에 서 있다.
“어서 와.”
현관은 잠겨 있지 않았고, 문을 열자마자 누나가 반긴다.
“저 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저녁은?”
“먹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안주와 소주병 하나, 그리고 맥주 캔 몇 개가 보인다.
“내일 아침에 떡국은 같이 먹겠구나.”
“네, 그러려고 왔습니다.”
“가볍게 한잔?”
“네, 저는 좋습니다.”
“그래, 차 소리 나던데?”
“렌터카입니다.”
그저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된 한 해의 마지막 날.
“올해는 정말 파란만장하고 스펙터클한 한 해였다.”
누나가 던진 한마디다.
식구들 모두가 격하게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래, 맞아. 파란만장이라는 말로 시작된 것이 맞지.”
“군부대 병사 수백 명이 통째로 증발되었다는 뉴스를 볼 때만 해도, 네가 거기 포함된 줄은 몰랐다.”
“그래, 너희 부대에서는 소식도 하나 전해 주지 않았고.”
“나중에 너희 부대라는 것을 알고 달려간 부모들을 부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래, 정문에서 강압적으로 제지하고…… 말로는 다 못한다. 당시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누나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왔다.
“그런데 네가 살아서 돌아왔고, 우리가 이렇게 바뀌게 될 줄 알았겠니?”
“맞아요, 엄마. 쟤가 이상해졌어.”
“뭐가 이상해? 난 정상인데.”
“그나저나 태영아, 지난번에 네가 어깨에 무슨 주사인가 놓고 난 뒤에…….”
“맞아, 엄마도 느끼죠?”
“그래 느껴, 너희 아버지도.”
가족들 모두 바이호르미어 주사를 맞았으니 서로 그 이야기를 하는데 부담이 없다.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10년은 젊어진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누나는 원래가 젊은 사람이다.
그러니 외형상 눈에 띌 정도로 도드라진 변화는 없다.
대신, 반지르르한 피부가 효과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니, 입이 근질거려서 미치겠다.”
“그래도 이야기하시면 안 돼요.”
“같이 일하는 본부장이나 임원들이 젊어진 비결을 물어오는데 말을 해 줄 수가 없잖니?”
이것은 어머니의 말씀이다.
“그래, 그건 나도 그래. 우리 회사 직원들도, 친구들도 신기하대.”
“그렇지?”
“네, 엄마. 내 볼을 만져 보고 당겨 보고 하면서 물어보는데, 죽겠다니까요.”
이번에는 누나의 말이다.
어머니와 누나가 장단 맞춰 태영을 압박해 온다.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하는데, 이거 정말 어찌 된 거니?”
“그거 혹시 더 없어?”
어머니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나가 물어온다.
“그거?”
“내 어깨에 붙였던 거 말이야.”
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한다.
“없어.”
“진짜?”
“진짜 없어.”
때때로 선의의 거짓말도 해야 한다.
“준혁이 어머니에게 하나 드리고…… 구…… 음…… 그걸로 끝.”
하마터면 ‘군 동기 여동생이 사망 선고를 받아서 하나 쓰고’라고 말할 뻔했다.
조심해야지.
‘그럼 불치의 환자도 살 수 있는 거야?’라고 물으면 대답이 난감해진다.
숨이 멎고, 심장이 멈춘 지 3분이 지나지 않았으면, 죽음에서 되돌릴 수 있다고 했다.
시험해본 적은 없지만.
“뭐야? 너 말하다가 대충 얼버무린 거 그거 뭐냐고?”
이런 때는 좀 조용히 넘어가 주지.
“하여튼 이젠 없어.”
***
겨울의 오후 4시.
대부분 하산을 해서 정상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등산로에는 잔설이 얼어붙어 있어서 아이젠을 끼지 않으면 이동이 불편하다.
그래도 겨울바람이 심하지는 않아서 한기가 몸을 훑고 지나가지는 않는다.
태영은 일부러 국사봉 비탈 아래에서 기다렸다.
이미 4시에서 30분이 지났다.
“왜 안 오는 거야, 대체.”
약속 시간이 많이 지나자 김명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이 오를 시간 정도는 지났네.”
이 정도면 적당하게 기다리게 했다.
태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산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발 아래로 밟힌 얼음 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국사봉 표지석의 양쪽에는 두 개의 긴 의자가 있다.
좌측 의자의 귀퉁이에 등산 배낭이 놓여 있다.
국사봉의 정상의 바위에는 반쯤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잔설이 얼음이 되어 있다.
그 의자 앞에 일어선 자세로 김명준이 있다.
블랙의 등산용 패딩 점퍼.
동절기용 헌팅 캡.
그리고 안이 보이지 않는 편광 고글 차림이다.
태영이 김명준에게 다가갔다.
“거기 서.”
등산 스틱을 들어 태영의 얼굴을 겨누었다.
일부러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을 고른 것인지 끝이 뾰족하다.
“자신 있어?”
“…….”
“그걸로 찔러 볼 거야?”
태영은 우측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두 의자 사이에 갈라진 바위가 적당한 높이로 솟아 있다.
갈라진 틈과 바위 주변은 얼어붙은 잔설이 사람들의 발자국을 만들어 두었다.
태영이 의자에 앉자, 김명준도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다.
“너는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네 아들보다?”
“…….”
“다섯 살, 이름은 하일, 사진 보여 줘?”
태영이 스마트폰과 앳윗플레이를 꺼내 사진을 올린 후, 앳윌플레이를 김명준에게 던졌다.
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고글을 벗는데 얼굴이 판박이다.
“후우…….”
“…….”
“어디 살고 있나?”
“아들로 인정?”
“……부정하고 싶은데, 날 쏙 빼닮아서 부정할 수가 없네.”
고함 소리는 사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다.
태영도 도하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김명준을 무조건 압박할 생각은 없다.
가능하면 슬슬 구슬려서 애를 데려가게 해야 한다.
“애 엄마가 오래 살지 못해.”
“무슨 소리야?”
“암이 재발했어.”
“뭐?”
“남은 기간이 3개월 정도야.”
“하…… 씨발.”
욕이 이해된다.
그래서 욕쟁이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2개월 정도 지나면 눈뜨고, 숨쉬고, 아파서 비명 지르고, 그 외는 아무것도 못 해.”
“……넌 얘 엄마와 무슨 상관이야?”
“야제가 죽이려 드는 것을 구해 줬는데, 그 꼴이야.”
“야제…… 지금 검찰에서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그 일과 상관있나?”
“맞아. 그 애 엄마를 보살펴 주던 자가 정보를 제공했어.”
“그럼?”
“그자는 곧 경찰에 연행될 것이고, 아마도 수십 년은 밖에 나오지 못할 거야.”
“하…….”
“어떻게 할까?”
“어……떻게?”
“네가 친부임을 부정하면, 애는 고아원으로 보낼 거야.”
“고아원?”
“그 결정을 하기 전에 네 의사를 물어보려고 벌인 것이 지금 이 짓거리야.”
“흐읍, 와이프와 기자 이야기는?”
“애가 고아원으로 가는데, 너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맞지.”
“아무 상관도 없다면서, 그것 때문에?”
“싸지르기만 하고 책임을 안 지면 돼?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래 젠장, 이러나저러나 나는 망한 거네.”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김명준.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너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지.”
“…….”
“하일이 엄마는 이제 겨우 스물아홉인데, 너 때문에 인생을 통째로 망친 사람이야.”
“…….”
“더 웃기는 것은 뭔지 알아?”
“……?”
“하일이 엄마의 암을 치료하고, 하일이를 부양한 사람은 건달이야.”
“하, 건달…….”
“비교를 하자면 넌 건달보다 못한 벌레, 아니 그건 벌레에 대한 모욕이지.”
“…….”
“판사? 웃겨 정말. 네깟 놈이 판사라니. 그런 네가 판결을 내려? 개도 웃을 일이다.”
“…….”
김명준은 앳윌플레이에 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며 긴 한숨만 내쉬었다.
한겨울의 짧은 해는 서쪽 산 너머로 사라졌다.
그곳에 남아 있는 붉은 노을만 오히려 찬란하다.
“생각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어젯밤,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정은 자네를 만나서 하자고 생각했지.”
태영의 질문에 느릿느릿 말이 나왔다.
“…….”
“……내게 딸이 하나 있네. 제 어미와 얼굴도 성격도 똑같은…….”
딸이 뭐?
그건 궁금한 사항이 아니야.
“……시골 출신의 내가 사시에 패스하자 동네잔치가 벌어졌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태영이 김명준의 말을 그냥 들어 주었다.
요즈음은 사법 시험이 사라지고 로스쿨 제도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전설이 되어 버렸다.
김명진은 사법 시험 세대일 것이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사람도, 사법 시험을 쳐서 법조인이 될 수 있던 시절.
머리가 좋고 독하게 공부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법조인을 만드는 것은 돈이다.
“……마담뚜, 사시를 패스한 젊은이들은 마담뚜의 먹잇감이 되었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네.”
뭔가 변명을 하려 한다.
저런 놈의 변명은 가치가 1도 없다.
그래도 그 애를 고아원에 보내는 것보다는 저놈이 데려가는 것이 낫다.
애비이니까.
그래서 저 말을 들어 주는 거다.
먼 산 너머의 붉게 물든 일몰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이 주는 여운이 좋기는 하다.
저 붉은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만 저놈의 변명을 들어 주자.
산을 내려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바쁜 일도 없으니.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다.”
김명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순진무구한 내게 마담뚜는 자동차와 아파트 같은 것들을 내밀고 끝없이 달려들었다.”
뭔가 당했다는 말 같은데, 당한 놈이 바보 아닌가?
“마담뚜는 달콤한 유혹과 함께 환상을 무한정으로 충족시켜 주었지.”
마담뚜 이야기나 3개의 열쇠 같은 것은 글로만 읽었다.
거기에 넘어간 놈이라는 거다.
“지옥문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데는 결혼하고 한 달도 걸리지 않았네.”
세상에 시련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지.
똑똑한 판사 나리도 그래?
“그래도 1년쯤은 모든 것을 인내하며 와이프와 잘 살아 보려고 애를 썼네.”
“…….”
“그때 딸아이가 생겼고.”
“…….”
“1년이 지나면서 차츰 퇴근하면 집으로 가기보다는 술집을 찾는 일이 많아졌고, 세상을 겉돌았지.”
“…….”
“집으로 들어가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고…….”
어, 가만? 집에 들어가면 이새봄이?
조금 다르지.
“겉돌면서 보니, 밖에는 내가 보고 듣지 못했던 세상이 있었네.”
“바보였네.”
“그래 바보였지. 맞아, 바보.”
“…….”
“차츰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지.”
신세 한탄.
아마 저런 이야기를 풀어낼 대상은 없었을 것이다.
“이혼하지 않고 산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닌데?”
“이혼? 판사가, 법과 함께하는 사람이 할 줄 몰라서 못했겠나?”
“…….”
그건 말 되네.
“법은 정의롭지 않네.”
“그럼 법은 뭔데?”
정의롭지 않다는 말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스크.”
“마스크?”
“피에 젖은 강자의 얼굴을 가리는 물건.”
판사의 입에서 저딴 소리가 나와?
이거 언젠가 한번 들어 본 말이기는 하다.
그건 판사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드라마였다.
“왜 피에 젖어?”
이건 정말 궁금하다.
집히는 것이 있지만,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약자들을 물어뜯고 피를 빨았으니까.”
“…….”
거참, 말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또 뭐가?
“아주 우습게도 와이프와 그 집안사람들 모두 상관없는 일처럼 행동했지.”
그건 진짜 빡치는 일이지.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