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8
008. 율촌으로(1)
“왜?”
“귀인의 존함과 거처를 알려 주십시오.”
태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묻자 김윤경이 말했다.
“내 이름은 최태영이지만, 다들 최 병장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당분간 율촌에 있을 거요.”
특별히 율촌에 있으리란 생각을 해 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거처를 물으니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김윤경은 대문을 벗어나며 다시 한번 돌아보고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다른 곳은 마당이라 할 곳도 없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집은 그래도 마당이 제법 넓었다.
소녀들이 다 떠나자 집 안에는 죽은 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그럼,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도망이라도 가서 살아 있으면 돌아오겠지 생각하고는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하니 그 사이에 관병 복장이 모두 여덟이었다. 그 와중에 여덟이 살아남았으면 제법 산 셈이다.
“나리 오셨습니까?”
김처인이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체를 한다.
이 사람들은 어려워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나리인 모양이다.
“여기는…….”
김처인이 소개를 하려는데,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신도익이라 하옵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눈앞으로 올리는, 사극에서 보았던 정중한 인사를 한다.
신도익의 손안에는 장검이 검집에 든 채로 들려 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최태영이요. 최 병장이라 부르시오.”
태영에 비해서는 한참 어른이지만, 이곳이 시대를 거슬러 온 곳이라 신분이 높은 것처럼 해야 했기에 하대 비슷하게 답을 했다.
“왜구를 물리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리.”
“그래, 내가 뭐라 불러야 되는 거요?”
“신 부호장으로 불러 주십시오.”
얘도 부호장이야?
“신 부호장이 왜구와 싸운 거요?”
“네, 소장과 함께 열일곱이 왜구들과 싸웠는데, 다 죽고 겨우 여기 있는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주위를 빙 둘러본다. 그럼 9명이 죽은 셈이다.
호장인 박한과 그 일당은 도망쳤는데, 남아서 왜구들과 싸웠다고?
일단 쓸 만한 사람이네.
“호장이 도망쳤다면서요?”
신도익이 무언가 말을 계속하려는데 태영이 먼저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혹시 아까 그 기와집의 무리가 관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왜구들을 보면서 뛰어다녔기에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넓은 집에 기와로 지붕을 이은 건물이 꽤 여러 개였고, 집 안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가는 대문도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는 죽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 셋과 아이들이 마당에 쓰러져 있었고, 쓰러진 아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기와집에서는 죽은 이들이 무척 많았는데, 왜구가 없는 것을 보고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었다.
“왜구들은 다 죽은 거요?”
“네, 그러한 것 같습니다. 나리께서 다 잡아 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이다. 아직 소총에 총탄이 제법 남아 있는 상태로 적들이 모두 죽었다면 그것도 다행이었다.
“그럼, 여긴 평정된 것 같으니, 신 부호장이 수습을 잘 하고, 왜구들이 타고 온 배는 불태우지 말고 잘 묶어 두시오. 나는 율촌에 머무르고 있을 테니, 박 호장이 다시 오거든 여기 김처인을 시켜 내게 보내시오.”
“네, 알겠사옵니다.”
저들이 태영을 뭐로, 아니 누구로 생각할까?
속에서는 궁금한 것이 정말 많을 것이다. 수습은 신도익이 할 것이라 생각하고 율촌으로 향했고, 율촌의 입구에 접어들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지 사위가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쁜 하루가 저물고 있는 것 같은데, 부대에 있으면 지금쯤 슬슬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는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내무반에 엎드려 책을 보거나, 아니면 병기고를 점검하고 병기고 한쪽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김정표 일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침을 생 버섯 몇 개로 때우고 점심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러고 보니 율촌으로 발길을 돌리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막상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정인구의 집을 염두에 두고 발길을 재촉하여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제법 어둑어둑해졌는데, 정인구가 처음 안내한 집으로 가자 주위에 횃불이 몇 개 켜져 있고, 사람들 몇몇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리, 오셨습니다요.”
누군가가 태영을 보더니 안으로 뛰어들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정인구와 곽병선이 마중을 나오고 정하연이 뒤따라 나왔다.
“묻어 주었소?”
태영은 죽은 아이 생각이 나서 정하연에게 물었다.
“네, 나리.”
그래, 묻어 주었으면 되었다. 부모들도 모두 죽었다 했으니 부모 곁에 묻혔으면 저세상에 가서라도 가족들끼리 모여 오순도순 살면 되겠지.
“나리, 그쪽은 어떠했습니까?”
태영이 잡혀가던 처자들과 함께 오지 않은 이유를 들었을 것이리라.
정인구가 정하연의 대답이 끝나자 물끄러미 딸을 쳐다보다가 태영을 향해 물었다.
“박한이 병사 서른둘과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가고, 나머지는 가병들 중에 아홉이 죽고 신도익 부호장을 포함하여 여덟이 살아남았소. 신도익에게 정리를 하고, 박 호장이 돌아오면 나한테 알리라고 했소.”
“어찌?”
왜 알리라고 했느냐는 질문인가?
“호장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을의 관리이며 우두머리라는 자가 고을의 백성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소. 내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오.”
태영의 어투도 그새 이곳의 어투를 많이 닮아 갔다.
사포에서 율촌으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마음속으로 정리를 해 둔 것이 있어서 대답이 쉽게 나왔다.
느낌상으로는 호장이 분명히 지방 향리가 맞다.
역사책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분명 향리가 맞고, 향리는 관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현대와 달리 이 시대에는 관리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 즉 공무원이 무조건 갑이다.
현대의 공무원과는 그 격이 완전히 다른 상황이고, 공무원들의 직급처럼 비슷한 직급의 차이가 있겠지만 관직의 높이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시대이다.
국법이 있다고 하지만, 정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시대인 탓에 관직에 있는 놈들이 제 입맛대로 국법이라 들먹이며 백성들을 핍박하던 시대이다.
아직 태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인지라 호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는 대한민국 육군의 말단 병장이지만.
물론, 태영이 가진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들 보았을 테니,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겁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피해가 어떻습니까?”
“율촌도 피해가 크긴 하지만, 더 커지기 전에 마침 나리를 만나 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구명 지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곧 식사가 준비될 것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서 정인구가 몸을 돌려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앞장섰다.
“그보다, 혹시 목욕을 좀 할 수 있는 곳이 있소? 피 냄새가 진동을 하여 견딜 수가 없소이다.”
시대가 현대가 아닌데, 목욕탕 같은 곳이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도 없겠지만, 며칠째 샤워를 못 했더니 정말 죽을 맛이기에 물었던 것이다.
“목욕물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하나 목욕물을 데우는데 시간이 지체될 터이니 식사를 먼저 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네.”
오전에 안내되었던 방, 아니 사무실, 아니 창고?
뭔지 모르지만 그곳으로 안내했고, 정인구도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잠시 기다리시면 곧 준비가 될 것 입니다. 한데.”
태영이 의자에 앉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인구가 여전히 선 채로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어투가 이 시대의 어투에서 현대의 어투로, 또다시 이 시대의 어투로 왔다 갔다 한다. 아무래도 이곳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터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인구의 눈이 계속해서 총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궁금증 중에 총에 대한 것이 가장 클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율촌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대검은 빼서 다시 대검 집에 넣었고, 개머리판은 총 안쪽으로 밀어 넣었기에 길이가 사정없이 짧아진 상태이다.
“네, 그 천둥소리가 나는 무기가 혹여…….”
“총이라는 것이오. 그나저나, 나도 궁금한 것이 있소.”
총에 대한 이야기나 태영의 이야기를 깊게 나누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역으로 궁금한 것을 꺼냈다.
“나는 얼마 전부터의 기억이 없소이다. 내가 어느 곳에서 왔고, 어떻게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어떤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은 듯하오.”
“그런?”
태영이 말을 하자 정인구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것만큼 좋은 핑계가 어디 있어?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의사를 데려다 진찰을 해 보자고 할 수도 없을 테고, 진찰을 해 본들 어떻게 증명할 건데?
“그래서 혹시나 기억이 날까 하여 물어보는 것인데, 지금 어느 임금이 재위 중이오?”
“그렇사옵니까?”
정인구의 의문은 방금 한 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좀 전에 말했던, 기억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점인 것 같았지만, 태영은 정인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것은 내 말은 진실이니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4년째 되는 해이옵니다.”
태영의 질문에 잠깐 망설이던 정인구가 대답했다.
황제? 고종?
대체 고종이고 황제라 칭하면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머릿속은 초음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구한말의 고종 황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라는 말인가?
정말 고려 시대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고려 시대에 원의 간섭기 전이라면 황제라고 칭했을 테니, 아마도 맞지 않을까?
“그럼 혹시, 지금 교정별감이 누구이시오?”
고려 시대의 고종이 재위 중이라면, 역사의 기억으로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이고, 교정도감의 최고 수장인 교정별감으로 그 권력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도 관리라면 최충헌 정도는 분명 알 것이다.
정인구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사람이 최충헌을 물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대어서 그런 것일까?
“혹시 최충헌 대감을 말씀하는 것인지요?”
눈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약간은 놀란 모습으로 최충헌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맞네.
구한말의 고종 황제 시대라면 교정도감이 없고, 당연히 교정별감도 없을 것이며,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최충헌의 이름은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모를 것이다.
그럼 서기로 따지면 몇 년도이지?
아, 이거 계산 복잡해지네.
정인구가 복잡한 눈으로 태영을 쳐다보았다.
태영이 자신을 최 병장이라 부르라고는 했지만, 고려 시대이니 병장이라는 계급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졸병이지 졸병.
거기다가 태영이 들고 있는 무기가 총이라고는 했지만, 고려 시대에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말을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태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라마 어디에선가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제스처인데 이들이 알려나?
“익숙한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태영도 최씨다.
혹시 태영이 최충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정인구가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다. 그것이 오해이건 아니건 일부러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언제쯤 기억이 돌아올지, 아니면 영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없는 상태로 어딘가로 다시 가는 것도 여의치 않고 하니, 당분간 이곳 율촌에 머무르면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내가 기거할 만한 곳이 있겠소?”
내 질문에 정인구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니,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누추하지만, 마침 그런 집이 있사옵니다.”
”그래요?”
“네, 왜구의 침입으로 온 가족이 참화를 당해 비어 있는 집이 많기는 합니다. 다들 좁지만, 그 중에 나리께서 기거할 만한 규모의 집이 있습니다.”
“그럼 빈집입니까?”
“아닙니다. 집 주인과 하인 몇은 왜구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하인들은 마침 들에 일하러 나갔다가 화를 면해서 하인들만 남아 있는 형국입니다.”
거참, 주인은 없고 하인들만 살아남았다고?
이런 해괴한 상황이라니.
그나저나 고려 시대 같으면 골치가 아프네.
고려 시대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막이나 여관 같은 곳도 없으며, 여행의 자유가 없던 시대이다.
여행의 자유가 없다고 사람들이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많은 제약이 있었던 때이다.
그리고 여행을 하지 않으니, 주막이나 여관이 필요하지 않았고, 꽤 여러 차례 화폐 도입을 시도했는데도 번번이 물 건너갔다.
화폐로 통용되는 것은 마포와 쌀이 전부이다.
물론 보리와 다른 작물들도 있지만, 조세로 걷는 것이 마포와 쌀을 위주로 하다 보니 다른 작물들을 많이 심지 않았고, 특히 중요한 식량원인 밀의 재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태영이 대입 공부를 하느라 습득한 얕은 역사 지식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렇다.
그와 아울러 신분증도 없고, 물자는 모두 다 자급자족하고, 없으면 굶어야 하는 시대이다.
아, 진짜 골치 아프다.
“아, 그럼 염치 불고하고 그 집에 거주하도록 하지요. 한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셈을 치르기가 여의치 않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이까?”
태영은 사실상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화폐인 쌀은 단 한 톨도 없고, 또 다른 화폐인 마포 역시 단 한 뼘도 없다.
“아닙니다. 나리께서 이 율촌을 왜구로부터 구해 주신 은혜가 있는데 어찌 셈을 하라 하겠습니까? 또한, 저뿐만이 아니라 율촌 사람들은 나리가 이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하고 또한 대단히 기뻐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집의 원 주인이 부치던 논이 스물다섯 마지기에 밭도 열 마지기 정도가 있으니, 그것 또한 나리의 것으로 땅 문서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어차피 주인이 죽어서 공중에 뜬 재산이라 이건데.
그런데 호장이 그걸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인가?
그나저나 스물다섯 마지기의 논이라면, 그게 얼마큼이 되는 것인가?
하긴 논밭이 없으면 먹고사는 일이 꽤 곤란하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려면 호장이 주는 이것을 그냥 받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집을 안내해 주겠소?”
속내와는 상관없이 정인구에게 물었다.
“네, 하인을 시켜 미리 집을 정리해 두라고 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식사 후에 가시면 될 것이옵니다. 그리고 목욕물도 미리 준비하라 해 두겠사옵니다.”
거참, 이런 때는 참 좋단 말이야.
척하면 착착 알아서 챙겨 주니 하필 이런 사달이 난 그때, 짜잔 하고 등장한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인구는 태영에게 말한 것을 시키려는지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들어왔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하인이 들어와 호롱불을 밝히고 나갔다.
호롱불이라니.
뒤이어 그다지 밝지 않은 호롱불이 밝혀진 방 안에서 단둘이 밥상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먹는 모양이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밥이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를 모르겠지만, 고려 시대이니 어쩔 수가 없지 않는가?
스위치 하나 딱 올리면 대낮처럼 밝아지는 현대의 생활에 길들여진 몸이 쉽게 적응이 안 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