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20-second songwriting genius, a 200,000-second monster RAW novel - Chapter 36
20초 작곡천재, 200,000초 괴물 되다 36화
도른자의 예선(3)
작곡가는 끊임없이 지식을 흡입해야만 하는 직업이다.
악기든지 뭐든지 일단 배우고 봐야 한다는 거다.
비록 회귀하고 EL엔터랑 연이 닿으면서 나중으로 미뤄지게 됐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지식욕이 끌어 오르고 있었다.
‘참 좋은 수업이었어.’
임재철의 강의는 아주 훌륭했다.
기대를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말이다.
가르침의 시간은 짧았지만, 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짙었다.
-너도 알다시피 곡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아주 중요하단다. 작곡가든 연주자든 똑같아. 악보에 적힌 음표와 지시사항은 만든 사람의 고뇌의 흔적이니까.
-작곡가라고 해서 그것을 어기면 안 돼. 작곡가이니만큼 꼭 그대로 따르리란 생각을 해서도 안 돼. 미세한 분해와 조립이 필요하지. 원형을 망가뜨리지 않을 만큼.
-실연자와 작곡가의 연주법은 여기서 갈린단다. 실연자도 작곡가의 의도를 꺾을 수 있지만, 그 원리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넌 다 알아야 해. 잘되는데 원리는 모른다, 이런 건 안 통하지. 곡을 쓰는 사람인 이상에야 알아듣겠지?
요구 조건은 높았다.
그가 생각하는, ‘작곡가가 펼치는 연주’의 벽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원리를 이해하고 습득했다 하더라도 네 연주가 실연자보다 나으리란 법은 없단다. 자기 하기에 달렸어.
곡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므로, 피아니스트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만들 수는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한 악기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사람의 연주보다 좋게 들리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부여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함’뿐.
어떻게 발휘될지는 손끝의 테크닉에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내 테크닉은….
-완벽한 건 아니야. 하지만 터치의 다이나믹 레인지가 이상하리만치 넓구나. 다른 요소를 보완만 한다면… 특히 페달링을….
-기대되는걸.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7월 21일 금요일.
방학하고 하루가 지났다.
원서 접수할 때는 별 느낌 안 들었는데, 점점 날짜가 다가올수록 뭔가 두근두근거리더라.
처음에는 이게 긴장인가 싶었는데, 머릿속을 되짚어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
모든 것은 단 한 가지의 고민 때문이었다.
‘관심을 어떻게 끌까?’
클래식계에 첫발을 떼는 무대.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디 페인트….’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우리 학교는 방학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으니 쌔벼오는 것쯤이야 누워서 코딱지 파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아직 질릴 만한 타이밍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다만 영원히 보라색 피부만을 무기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
그때였다.
여동생이 하던 게임이 눈에 들어온 것은.
-오빠가 준 돈으로 스위치 샀당!
곡을 만들어 번 돈의 대부분은 투자에, 적당히는 가족에게 주었다.
물론 그 적당히도 우리 집 형편에서는 거금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정말 오랜만에 사치라는 걸 부렸고, 동생이 선택한 것은 게임기와 철권이었다.
그리고 그 여동생이 자주 플레이하던 철권의 캐릭터가 헤이하치.
‘X나 카리스마있어.’
현실에서 절대로 볼 수 없을 헤어스타일이 가슴에 팍 꽂히더라.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더라.
폴 피닉스 대가리를 거쳐서 헤이하치로.
물론 그 리버스 투블럭을 이 나이에 할 수는 없으니 ‘젊은’ 시절의 헤이하치 컷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충분한 것 같더라.
복장도 문제는 없었다.
‘콩쿠르에는 역시 양복이지.’
당근에서 2만 원짜리 상·하의 세트를 샀다.
팔 두께 때문에 좀 움직이니 터져 버리긴 했는데, 아까워서 그냥 민소매로 만들어서 입기로 했다. 여름이기도 하고.
버스를 탔는데 내 옆에 아무도 안 앉긴 하던데….
일상생활도 편해지고. 아무렴 다 좋았다.
그리고….
“뒤지고 싶니?”
괜히 시비 거는 양아치 새끼들 겁박할 때도 꽤나 효율이 좋은 것 같다.
“어… 어어….”
시간 딱 맞춰서 예선장에 도착했는데, 봄이 뒷담화를 하는 새끼들이 있더라.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는 참 적이 많은 것 같았다.
‘본인이 안 만들고 싶어도 적은 생기기 마련이니.’
특이하다고, 못 산다고, 너무 잘 산다고 등등.
속이 배배 꼬인 놈들은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며 공격성을 내비치곤 한다.
회귀 전의 나는 20초 장인일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질투하는 놈들이 약간이지만 있었다.
‘참 X같지.’
그리고 나는 그런 적대감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대신에, 꼭 그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줘야만 적성이 풀린다.
나는 양아치에게 점점 다가가 벽과 붙었다.
“벽콤?”
나 – 양아치 – 벽
더 다가갈 공간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철권이 아니니까.
붙으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붙을 수 있다.
“어, 어디까지 다가오는 거ㅇ….”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아무리 양아치 참교육하는 거라지만 여기서 폭력성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주 일순간,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의 고통을 줘야만 한다.
‘지옥 친구 만들 때가 생각나네.’
지옥 괴물들을 노예로 길들일 때 쓰던 방법.
그건 그냥 미는 거였다.
순식간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비명조차 안 나오도록,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
부들부들부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던 양아치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은.
“커헉.”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옴과 함께 헤이하치 압축 프레스를 해제하니, 그는 힘을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때리지도, 상처를 입히지도 않았지.’
괜히 합의금으로 돈 쓰기는 아깝다. 아마 여기서 힘을 더 줬다면 그때부터는 어반 판타지를 찍어야 한다. 그러기는 싫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양아치 친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로 뛰어왔다. 다만 당사자는 그저 일생 최대의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며 멍한 표정을 띨 뿐이었다.
“떨거지들아 들어라.”
나는 이어서 일렀다.
“떠, 떨거지?!”
“우리가?”
“그래.”
팔짱을 끼고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지어본다. 진짜 헤이하치가 된 것처럼.
“내가 친히 너희한테 진짜 음악을 알려줄 것이니, 고맙게 생각해라.”
“뭔 소릴 하는 거야?”
“네가 뭔데?”
“피아노 전공인 사람?”
두 명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너희 둘은 오늘 순위가 한 칸씩 뒤로 밀리게 될 거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눈을 피할 뿐.
“가, 가자.”
“으응….”
한 명이 종용하니 다른 놈들도 우르르 대기실에서 나갔다.
나와 봄이의 승리였다.
“봤지?”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는 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일아.”
“나쁜 놈들 있으면 당당하게 나가는 게 좋아. 내가 때려도 흉 안 지고 아프기만 한 부위를 알려줄게. 잘 들어.”
회귀 후 처음으로 친하게 지내게 된 아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인체의 비밀을 조근조근 설명했다.
“….”
봄이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듣고만 있다가,
“고마워.”
마치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알아들었어?”
“알아들었어.”
“그래, 장하다.”
무대 전에 괜히 컨디션 망치면 안 되는데. 너무 주절주절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했나?
나는 크흠,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고마워…. 나 있잖아, 조금만 더 힘낼게.”
“음. 좋은 자세야.”
눈에는 이미 수분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표정은 딱히 슬퍼 보이지 않았다.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상가 2층에 위치한, 원래는 오케스트라의 연습실로 보이는 공간.
그곳에서 예선이 진행된다.
아쉽게도 봄이와는 반대방향이었다.
“화이팅!”
나는 대기실의 문을 박찼다.
“어으씨 깜짝이야!”
지나가던 직원이 놀랐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 * *
고은혜는 어릴 적부터 줄곧 어른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네 살에 처음 피아노라는 악기를 접하며 영재 소리를 듣고, 각종 유소년기 콩쿨에서 수상을 하고 이름을 알렸다.
‘열 아홉살 라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아이.’
굳이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내려본다면 이렇지 않을까?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하든, 자신은 재능이 뛰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 예선장의 주인공은 나야.’
갑작스런 불청객의 방문은 심히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김봄.
자신과는 전공이 전혀 달랐지만, 어릴 적부터 유명세를 떨치던 바이올린 전공생.
그녀는 영재 아닌, 천재라고 불렸다.
거슬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평소 콩쿠르에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애가 왜 지금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슬쩍 친구들한테 운을 띄웠고, 다들 동조해주었다.
몰래 쥐라도 잡아먹은 듯한 표정에 고소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근데….
불청객은 김봄 하나가 아니더라.
김도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행색이었다.
‘머리가 이상했어.’
머리카락이 이상했다. 무슨 오락실 격투 게임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는데, 근육 때문인지 재현도가 좋은 게 열 받았다.
물론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진짜 그냥 머리도 이상했다.
양복 팔 부분이 아예 다 찢어져 있더라.
‘도대체 왜 입은 거야…?!’
숨막히는 패션.
그저 가까이 다가간 것뿐인데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린 남자애.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
패배감에 울화도 조금 올라왔지만, 오늘은 중요한 예선전이다.
신경을 쏟으면 쏟을수록 자신의 손해였다.
‘…우선 연주만 생각하자. 좋은 연주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주목은 자연스럽게 쏠리겠지.’
이상한 행색을 해도 관심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실력’이지 않은가?
보니까 이제 막 피아노 콩쿠르 좀 다니려고 하는 것 같은데, 피아노 연주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보나마나 실력은 형편없을 것이다.
“다음 34번 고은혜 학생.”
고은혜는 마음을 다잡고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오오.
곡의 하이라이트에 도달하자마자 울리는 함성.
다른 예선 참가자들은 받아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니, 애초에 끝까지 연주한 사람이 적었다. 몇 소절 치지도 못하고 탈락하던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짝-!
대기자들과 심사위원들의 박수. 정말 짜릿한 관심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자신이 이 예선장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음 번호가 호명되기 전까지는.
“35번. 김도일 학생.”
…그였다.
“김도일 학생… 아니, 학생 맞아요?”
“맞는데요.”
퉁명스러운 대답. 다시 보아도 퉁명스러운 수준이 아닌 행색.
“옷은 또 왜… 아니, 머리가… 아니, 아니에요 앉아요.”
심사위원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쓸며 그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지정곡이나 제대로 칠 수 있을까?”
지정곡은 총 세 곡이었지만 딱히 쉬운 것이 없는데.
관심 끌러 온 거 같은데, 비행기나 안 치면 다행일 거 같은데?
“흐흡.”
고은혜는 언제든지 빵 터뜨리며 웃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장송 행진곡,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예선 지정곡 중에 가장 어려운 타이틀에 한번 놀라고….
두우웅-!
깊이감 있는 터치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어…?”
이상한 날이었다.
…가장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이곳에서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희 둘은 오늘 순위가 한 칸씩 뒤로 밀리게 될 거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헛소리라 치부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허세가 아닌….
“아니… 이 무슨….”
“누구예요? 어디 학교예요?”
“왜 지금까지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봤지?”
그저 꾸밈없는 ‘팩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