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117)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117화(117/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117화
정규 활동도 끝났겠다, 연말 시상식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오랜만에 레브에게 휴식기가 찾아왔다. 소속사에서는 우리에게 2주라는 긴 휴가를 주었다.
추석 연휴는 훌쩍 지난 지 오래였지만, 휴가 기간이 오히려 명절이 아니라서 좋았다.
“저는 집 갈게여, 형들!”
제일 먼저 숙소에서 튀어 나간 건 김도빈이었다.
말만 들으면 본가가 서울에서 차 타고 한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지방인 줄 알겠지만 김도빈의 본가는 인천이었다.
“곰탕 끓여 놨으니까 그걸로 밥 먹어. 싱거우면 소금이랑 후추 좀 치고.”
수원이 본가인 견하준 역시 숙소를 떠났다. 남은 건 본가가 서울에 있는 나랑 류재희, 그리고 경남 양산이 본가인 서예현이었다.
견하준이 한솥 가득 끓여 놓고 간 곰국 냄비의 뚜껑을 닫으며 류재희가 물었다.
“형들은 집에 안 가요?”
“날짜를 착각해서 비행기 표를 나흘 후로 끊어 버렸거든. 나흘 후에 가.”
서예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든이 형은요?”
“나? 나는 꼭 숙소에서 모레까지 버텨야 할 이유가 있어서 나도 사나흘 후 정도에나 가려고. 그런데 재희 너는 집에 안 가냐?”
내 물음에 류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투덜거렸다.
“저는 그냥 숙소에 있으려고요. 어차피 가 봤자 제 방도 없고 동생들 저녁밥까지 제가 챙겨 줘야 해요. 제가 숙소 생활한다고 엄마가 제 방 동생한테 줬대요. 아, 왜 중학교는 학교에서 석식도 안 줘서.”
“아, 동생들이 중학생이야?”
서예현이 묻자 류재희가 긍정하며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와 등을 축 기댔다.
“그래서 전 제가 여기에서 막내인 게 좋았어요. 첫째는 너무 힘들어요…….”
막내 생활이 편한가? 언더 크루에서의 막내 시절을 떠올려 봤지만, 별 공감은 안 됐다. 그 판에서 막내라고 마냥 우쭈쭈 받고 살지는 않았으니까.
서예현이 걱정 가득 담긴 얼굴로 류재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윤이든이랑 나까지 숙소에서 나가면 막내 너 혼자 있는 거 아니야?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에이, 제가 일곱 살짜리 애도 아니고. 그리고 어차피 도빈이 형은 주말만 보내고 다시 올걸요. 아직 학교 방학 안 했잖아요.”
그랬다. 김도빈은 휴가 중에도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 등교해야 하는 고등학생이었다.
류재희랑 김도빈을 단둘이 숙소에 두는 것도 걱정되긴 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씩 숙소 들려서 잘 있는지 살펴보고 가야 할 듯싶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에 들어가 겉옷을 걸치고 모자와 마스크까지 꼼꼼하게 착용하고 나오자 류재희가 물었다.
“형, 어디 가요?”
“군대 간 친구가 휴가 나왔대서.”
“헐, 형 친구 군대 갔어요?”
“얌마, 내가 스물한 살이다.”
군대 다녀오기 전에 회귀시켜 준 게 이 망할 시스템에게 제일 고마운 일이었다.
군대 두 번 가는 비극을 만들어 주지 않아서 정말 고맙다!
* * *
“곰국 질려요…….”
아침 식사가 놓인 식탁에 널브러진 류재희가 중얼거렸다.
“나도…….”
괜히 숟가락으로 뽀얀 국물을 휘적거리며 동감을 표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다들 대학 다니느라 바빠 저녁 약속만 잔뜩 잡힌 나 역시 아침과 점심은 숙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덕분에 지금 곰국만 다섯 끼째 먹고 있었다.
슴슴한 곰국을 떠먹고 있자니 해장국이 간절했다. 망할 숙취.
“그래도 하준이가 우리 생각해서 해 놓고 간 건데 다 먹어야 하지 않을까. 버리는 것도 그렇잖아.”
견하준의 성의를 생각해야 한다며 다이어트식도 포기한 서예현이 죽은 눈으로 곰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표정만 보면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준이도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그럼 하준이한테 전화해서 곰국 버려도 되느냐고 물어보든지.”
“형이 해. 나는 못 해.”
서로에게 미루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꾸역꾸역 곰탕을 퍼먹었다.
“여기에다가 라면 사리 넣으면 사리곰탕면…….”
“소면이랑 편육을 사 와서 설렁탕으로 해 먹을까요…….”
“야이씨, 설렁탕이나 곰탕이나.”
저녁을 먹지 않는 서예현을 제외하고, 점점 다가오는 저녁 식사 시간에 류재희와 나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곰국을 활용한 요리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이제 곰국에 밥 말아 먹는 건 질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크게 심호흡했다. 올 게 왔구나.
-윤이든! 너 이놈의 자식, 빨리 안 와!
전화를 받자마자 버럭 울리는 목소리에 휴대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어 놓으며 투덜거렸다.
“아, 왜! 안 간다고 했잖아! 나는 오지 말라 했다며!”
-시끄러워, 빨리 와! 집 안 들릴 거면 호텔로 바로 와!
뚝 끊긴 엄마의 전화에 화면을 보며 혀를 비죽 내밀었다.
내가 가나 봐라. 회귀 전에 그곳에서 당했던 수모를 나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아니, 잠깐.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그때는 망돌이었고, 지금은 망돌 신세 벗어난 라이징이니, 회귀 전의 복수를 할 아주 좋은 기회 아닌가.
“형, 재희야. 저녁은 호텔 뷔페 먹으러 안 갈래?”
“갑자기요?”
“어, 내가 쏜다.”
계속 거절하던 서예현은 형 혼자만 숙소에 남아 있으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는 류재희의 땡깡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윤이든 이 미친놈아…….”
도착지인 호텔 연회장에 큼직하게 붙은 현수막 글자를 읽은 서예현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류재희는 해탈한 듯한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희 조부님 팔순 잔치에 우리를 데려오면 어쩌자는 건데……!”
그랬다. 호텔 뷔페의 정체는 바로 내 할아버지의 팔순연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울 어머니한테 물어봤는데 두 명 정도는 괜찮대. 친할아버지도 축하해 주는 사람 머릿수 늘어서 기뻐하시겠지.”
차마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는지 이를 악물고 말하는 서예현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서예현이 연신 뒷목을 주물러 댔다.
“그런데 형이 쏜다고 안 했어요?”
“울 부모님 돈도 들어갔으니까 내가 쏘는 거나 다름없지, 뭐.”
“형은 진짜 또라이가 맞아요.”
류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탄했다.
한복을 입은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회귀 전에 보았던, 내 마지막 기억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감회를 느낄 새도 없이 엄마가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너는 세상에, 할아버지 팔순연 오면서 추리닝을 입고 와, 추리닝을?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진짜!”
“악! 이거 추리닝 아니라 스포츠 저지라고!”
“귀에 주렁주렁 달고 온 건 또 뭔데! 빨리 안 빼!”
“아, 패션! 패션!”
이제는 피어싱으로 방향을 바꾼 화살에, 필사적으로 귀를 사수하며 변명했다.
“너, 당장 그 피어싱 빼고 겉옷 벗고 있어. 남들이 보면 엄마를 욕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TPO는 맞춰서 입고 와야지.”
“안에 반팔인데? 계절감이 없는 게 더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엄마의 미간이 꿈틀하는 걸 발견하고는 잽싸게 류재희와 서예현을 엄마 앞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 여기는 우리 멤버들. 이쪽이 서예현이고, 이쪽이 막내, 류재희.”
“하준이는 안 왔대?”
“걘 집에 갔지.”
두 사람이 엄마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다가 이미 자리가 꽤 찬 테이블을 쭉 둘러보았다. 잽싸게 앉을 만한 자리를 스캔했다.
멤버들을 끌고 그나마 비어 있는 테이블로 향하자 옆 테이블에 있던 사촌들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 이든아, 오랜만이다?”
여기는 로스쿨 합격한 사촌 형.
“정아한테 들었는데, 데뷔했다며? 정아 친구가 너네 그룹 팬이라더라. 어디에서 데뷔했어? TK?”
여기는 의대생 사촌 누나. 지금이면 예과 2학년이려나.
3대 기획사 중에서도 제일 큰 TK만 알고 있는 이 누나가 좆소인 LnL을 모를 확률은 100%였으므로 그냥 고개만 젓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정아는 안 왔어?”
“학원에서 바로 온대. 정아도 벌써 고2잖아. 여기서 고졸 또 나오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역정을 내시겠어.”
내 물음에 S대 합격을 무슨 장원급제 정도로 생각하던 동갑내기 사촌 놈이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어릴 적 명절에 모일 때마다 성적으로 지겹도록 비교당한 녀석이었다.
물론 녀석도 내게 비교당한 악감정이 있긴 했다. 녀석의 키가 171cm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해 주고는 다시 어색하게 앉아 있는 류재희와 서예현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그러게 누가 시비 걸래?
“진짜 살다 살다 식사하러 남의 조부님 팔순 잔치에 온 건 처음이다.”
서예현의 허탈한 중얼거림에 가볍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니까. 밥 한 끼 먹는 건데, 뭐. 울 어머니도 뭐라 안 하시잖아.”
“그런데 형, 어머니랑 대화할 때는 엄마라고 하면서 저희한테 말할 땐 어머니라고 하네요.”
“이 나이 먹고 남 앞에서 엄마라고 지칭하긴 좀 그렇잖냐.”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곧 팔순연이 시작되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식순에 하품을 하고 있다가 손주들 절 올리러 나오라는 사회자의 말에 사촌들과 함께 뭉그적뭉그적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의자 앞으로 걸어가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회귀 전이야 그 표정과 말에 상처받아서 곧바로 뛰쳐나왔지만, 지금은 한 번 겪은 일이라 딱히 상처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인자한 얼굴로 사촌들의 얼굴을 쭉 훑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험악하게 굳었다.
판사 출신으로 자식, 손주들 다 명문대 진학시키고, 직업에도 사(士)자 붙게 만들어 놓은 할아버지한테. 대학 진학도 하지 않고 ‘돌’자 붙은 직업을 선택한 나는 최고의 눈엣가시였다.
그래 봤자 회귀 전에 당신 손자들 중에서 최고로 유명해지고, 많은 돈을 번 건 나였는데도 말이다.
“내가 딴따라 짓 집어치우기 전까지는 얼굴도 비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든이 네 절 받을 생각 없으니 들어가라.”
회귀 전에는 그렇지 않아도 망돌 신세라 친척들의 수군거림도 서러워 죽겠는데, 할아버지까지 축객령을 내리니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정도 말로 상처받은 과거의 윤이든이 아니다, 이 말이다.
눈을 부릅뜨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향해 심드렁하게 말대꾸했다.
“왜 그러세요. 저도 나름 ‘사’자 들어간 일도 하고 있는데요.”
“뭐? 뭔 일을 하는데?”
“작사요.”
옆에 서 있던 사촌 누나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딴따라가 아니라 아티스트예요. 직업 비하 발언은 자제 부탁드려요. 연예인 병크 목록에 가족 병크도 들어간단 말이에요.”
합장 자세를 취하며 말하자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초스피드로 절을 하고 자리로 잽싸게 튀었다.
아직 피날레를 장식하지도 못했는데 지금 쫓겨나면 곤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