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131)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131화(131/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131화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보다가 내가 먼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류재희는?”
“재희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해서.”
이 자식이, 일이 생겨서 대타를 보낼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들자 견하준이 선수 쳐 입을 열었다.
“가이드녹음은 내게 맡기는 게 제일 편하다면서 이번에는 재희한테 맡긴 건 조금 의외였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섭섭하다는 표정에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소파 한쪽에 제 머플러와 코트를 벗어 둔 견하준이 소파에 앉았다. 작업실 의자를 끌어 소파 앞에 가져다 두고 견하준을 마주했다.
견하준이 무어라 더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먼저 한숨 쉬며 말했다.
“이 말부터 들어. 내가 너한테 부채감 가지지 말라고 했던 건 뉴본에서의 인간관계도 포함한 거야.”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뉴본을 나온 건 내 선택이었고, 인간관계 끊어 낸 것도 내 선택이라고. 그리고…… 너도 알잖아. 권윤성이랑 절교한 건 단순히 너 때문이 아니라 걔가 ‘우리’한테 했던 잘못 때문이라고.”
한 마디로 너 때문에 걔랑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냥, 권윤성이랑 절교하면서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새삼 다시 느꼈고,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끝을 미리 준비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번에는.
입 밖으로 영영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 말이 네게 불안을 심어 주었다고 해도 나는 이미 우리의 끝을 한 번 보고 와 버렸는데 어쩌겠냐. 그저 이번은 그때와는 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지.
“그러면 왜 끝을 내가 먼저 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리한 물음에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내가 먼저 낼 일은 없으니까.”
“이제 우리 사이에 부채감이 없더라도, 나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내게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은.”
묵직한 한숨을 내쉰 견하준이 맞받아쳤다. 글쎄, 1회차의 나는 네게 큰 잘못을 했기보단 서서히 너를 지치게 만들었지. 결국 커지고 커진 부채감이 너를 짓눌러 먼저 끊어 내도록.
이게 네가 말한 큰 잘못이었을까.
“미안하다. 정확히 말을 했어야 했는데. 권윤성이랑은 깔끔히 절교했고, 이제 아무런 유감도 미련도 없어, 그쪽에는.”
멋쩍게 건네는 사과에 견하준 역시 깔끔하게 내게 사과했다.
“나도 미안.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네.”
지금까지 지속된 냉전이 우스울 정도로 빠른 화해였다. 하지만 나도 알고 견하준도 알았다. 이 사과로 끝난 게 아님을.
그 밤의 짧은 대화만으로는 풀지 못했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음을.
“궁금한 게 있어.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더라고.”
견하준이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마주했다.
“왜 날 따라서 뉴본을 나왔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원망도, 버거움도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 물음의 무게에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이전에 왜 제게 먼저 다가왔냐고 물었을 때 괜히 머쓱해서 던진 대답이 바로 음색이었다.
그게 첫 이유는 맞았지만 지금에서도 그 답을 내뱉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네가 내게 이 길을 걸어도 된다는 확신을 줬으니까.”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에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과거를 내뱉었다.
“네가 그랬잖아. 누구였지…… 이름도 기억 안 나네. 뉴본에서 댄스 트레이너 쌤한테 혼나고 아이돌이 내 길이 맞는 건가 고민하고 있던 나한테, 후회 없는 선택으로 만들면 된다고 말해 줬잖아.”
언더래퍼든 아이돌 연습생이든 미래는 불투명했고, 다시 언더로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태였던 내게 네 말은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다른 녀석들은 내가 그 말을 꺼내면 자기 버리고 가는 거냐고 징징거리거나, 정 안 맞으면 때려치우고 다시 언더 래퍼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무성의한, 딱 그 나이 대의 대답만을 던져 주었으니까.
내 불안과 후회를 읽지 못하고 무신경한 대답만을 던지는 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내 속내를 읽어 내고 나를 그 늪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 녀석이었으니까.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견하준이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나보다 권윤성이랑 더 친하다고 생각했어.”
당시에는 우정의 무게를 굳이 재지 않아서 나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권윤성이 쫓겨났으면 고민하고 미래 좀 저울질해 보다가 따라서 뉴본을 뛰쳐나왔겠지.”
어쨌건, 그 당시의 나는 미래보다는 의리가 더 중요했으니 낙하산에 밀려난 게 권윤성이라도 뉴본을 뛰쳐나왔을 거다.
단, 그 경우는 고민을 곁들이고,
“3년 전? 4년 전? 아오씨, 헷갈리네…… 아무튼 그때는 고민 없이 뛰쳐나왔고. 그냥, 그 차이야.”
견하준을 따라 나올 때는 고민 없이 나왔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이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말없이 내게서 가사가 적힌 악보를 건네받은 견하준이 가사를 쭉 훑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너무 우정 찬가 아니야?”
“아오씨, 그 정도야? 류재희도 그 비슷한 소리 하더니…….”
괜히 뒷머리를 헤집으며 투덜거렸다.
“이리 줘. 가사 다시 뜯어고치게.”
“한 번 불러는 봐야지. 무려 윤이든이 쓴 우정 찬가인데.”
“돌겠네. 딱히 너 생각하고 쓴 건 아니거든? 착각은 곤란하다, 준아.”
“아, 정말? 나 말고도 같은 곳을 향해 뛰어가는 친구가 있었어?”
또 권윤성이라고 오해하는 거 아니야? 걱정을 한가득 담고 돌아본 얼굴에는 숨기지 못하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어 안도하고 견하준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왜, 있잖아. 우리 멤버들.”
“세상에, 네가 예현이 형이랑 도빈이까지 친구 범위에 넣는 날이 오다니.”
“그게 그렇게 감격할 일이야……?”
녹음 부스 앞까지 견하준을 데려다주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한다.”
견하준의 가이드녹음을 들으며 턱을 까딱이다가 점점 웃음기가 섞이는 견하준의 음성에 이마를 짚고 스톱 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가사는 뜯어고쳐야겠어. 너무…… 너무 감성적이다, 내가 들어도…….”
이래서 새벽 감성이 무서운 거구나. 새벽에 잠 안 와서 메모장으로 써 내려가며 찢었다고 감탄하던 가사였는데 귀로 들으니까 정말로 찢고 싶긴 했다.
아무튼, 그런 사유로 가이드녹음을 중단하고 나란히 숙소로 들어오자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류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헐, 두 분 드디어 화해하신 거예요? 와, 살았다, 진짜.”
“얌마, 너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대타를 보내면 미리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해야지.”
내가 가볍게 헤드록을 걸자 버둥거리던 류재희가 눈을 크게 뜨고는 따졌다.
“엥? 무슨 소리세요? 제가 갑자기 일이 생긴 건 맞는데 저는 녹음하고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준이 형이 자기가 대신 간다고 해서 오케이한 건데요?”
뭐지. 분명히 견하준은 류재희한테 일이 생겨서 대타로 왔다고 했는데? 견하준은 이미 쓱 방으로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견하준이 류재희가 대신 보냈다고 말을 했던가?’
점점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고 있었다.
“연락은 왜 안 했는데?”
“하준이 형이 하지 말라고 해서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섭섭해서 찾아온 건지는 상상도 못했네, 내가.”
내가 히죽거리며 견하준 방을 힐긋거리자 류재희가 충고를 던졌다.
“그걸로 건수 잡고 놀리면 또 2차 냉전 발발하는 건 알죠?”
“야이씨, 내가 애냐? 그런 거로 사람 놀리게?”
투덜거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못 놀리는 건 좀 아쉽네.
* * *
민족대명절, 설날이 다가왔다.
데뷔하고 나서 맞이하는 두 번째 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명절 연휴에 맞추어 닷새의 휴가를 받았다.
본가가 지방인 서예현은 숙소에 남기로 했고, 류재희 역시 집에 가지 않고 남기를 택했다.
견하준은 설 당일에만 본가에 들리기로 했고, 김도빈은 휴가를 받자마자 바로 본가로 갔다. 외가랑 친가 둘 다 들려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너는 휴가를 받아도 집에를 안 간다?”
저번 휴가에 이어 이번에도 남아 있기를 택한 류재희를 툭툭 치며 물었다. 집도 서울에 있는 놈이 집을 거의 안 들어갔다.
“차례 지낼 게 뻔한데요, 뭐. 제사음식 지긋지긋해서 안 가요.”
“지난 휴가는 명절 휴가도 아니었잖아?”
내 대꾸에 류재희가 여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집이 편안한 공간이 아닌 사람도 있어요, 형.”
그렇지. 모두에게 조부모가 좋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런데 형은 왜 남아요?”
“지금 집에 가면 친가 끌려가. 울 할아버지 꼰대인 거 봤잖아. 무조건 명절에는 모여야 하고, 설날에 집안 큰 어른으로서 세배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마인드의 소유자라니까.”
[비속어가 감지되었습니다.] [초심도 –2]시발, 꼰대도 비속어였냐. 제발 쌍욕만 잡으면 안 되냐.
오늘도 어김없이 시스템에게 업그레이드 문의를 넣으며 초심통을 견뎌 냈다.
“게다가 지금 무조건 나 데려오라고 성화시라는데, 내가 미쳤다고 가겠냐.”
“왜요?”
“그때는 손님들 눈도 있고, 내가 먼저 뷔페로 튀어서 못 잡았으니까 이번 설에 세배 핑계로 불러서 제대로 잡겠다 이거지.”
집안 망신시켰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찍어서 올린 놈이 더 집안 망신에 일조한 거 아닌가? 내 디스랩에 허구는 없을 텐데?
작년에는 활동 기간과 설 연휴가 겹쳐서 무사히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그 핑계를 대기도 어렵다.
그러니 그냥 설 전날과 당일까지만 버티다가 설 다음 날에 외갓집 간다고 할 때 슬쩍 가면 된다.
왜 그렇게 세배에 집착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디스랩에 그 내용도 넣었는데 할아버지가 그걸 들으시고 느끼신 바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넷이서 설날 첫 연휴를 보내고, 다음 날.
숙소에 남은 셋이서 견하준이 끓여 놓은 떡국을 먹던 도중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엄마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부모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시끌시끌한 걸 보니 아마 성북동 친가에 있는 것 같았다.
-이든아, 할아버지께서 팔순연 일로 뭐라 안 하실 테니까 새베라도 하고 가란다.
“와우, 시간 낭비 레전드.”
혀를 차며 감탄사를 내뱉자 엄마는 한숨을 내뱉었다.
-너희 아빠, 지금 너 잡으러 숙소 간다고 옆에서 난리다. 아빠 쫓아가기 전에 빨리 와.
“어떻게든 시간 맞춰서 세배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빠한테는 괜히 숙소 오는 수고 하지 말라고 해. 어차피 문 안 열어 주면 장땡…….”
-윤이든!
옆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호통에 움찔하며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얘들아, 준비하자.”
수저를 탁 내려놓고 손짓하자 나를 따라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은 류재희가 물었다.
“뭐를요?”
씩 웃으며 까치집 상태인 머리를 쓱쓱 정리하며 대꾸했다.
“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