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172)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172화(172/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172화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저는 잘하는데요, 왜요?”
“우리도 이제 슬슬 미국 진출 한번 해 봐야지. 이번에 도 해외 반응 괜찮다고 했고.”
그래, 이때쯤은 대표님의 미국병이 도질 시기였다. 회귀 전보다는 이르게 도졌군.
회귀 전, 레브가 서예현 원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간당간당한 2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구린 노래와 뇌절에 뇌절을 반복하던 세계관도 컸지만.
그놈의 미국 진출로 인해 국내 팬덤을 탄탄하게 다져놓을 골든타임을 놓친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그 미국 진출? 물론 거하게 실패하고 그 투자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해외 투어만 엄청 돌았다.
해외 반응은 오히려 북미보다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쪽에서 더 터졌다.
애초에 곡들이 미국 쪽에는 안 들어 먹힐 스타일이었다니까. 하도 미국 미국 해서 나는 무슨 이 빌보드 차트인이라도 한 줄 알았다.
그냥 대표님의 아메리칸 드림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비슷한 시기에 선배 걸그룹이 빌보드에 차트인하여 미국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이슈가 된 게 퍽 부러우셨던 모양이다.
제법 국내 입지를 다져 놓은 지금 상황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미국으로 가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입지 없는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우리 소속사가 대형이기를 해, 아니면 빌보드 차트 1위 곡이 있기를 해?
미국 진출에 성공한 그 걸그룹 선배님들은 대형 소속사이기라도 했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 해 봐라. 가랑이만 찢어지지.
“대표님,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조금 돌려서 말씀드릴까요?”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일단 조금 돌려서 말해 봐라.”
심호흡을 한번 한 대표님이 손짓했다.
“빌보드 차트인한 노래 하나 없이 미국 진출하는 건 시기상조 같은데요.”
“음, 이든아. 혹시 빌보드 노리고 곡 하나 쓸 생각 없냐? 왜, 가사 다 영어로다가. 랩도 팍팍 넣고.”
“너무 속보여도 밉상으로 찍힙니다. 어쨌든 저희 기반은 한국인데 벌써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빌보드 노리는 거 보이면 팬들 입장에서는 좀 그렇죠. 차라리 히트 친 곡이 자연스럽게 빌보드 차트까지 올라가면 몰라도.”
해외 활동이 늘어나면 한국 활동이 줄어드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어떤 한국 팬들이 그걸 반기겠는가. 그리고 한 번 터진 거로 계속 자리 잡기도 쉽지 않고 말이지.
입을 꾹 닫았다가 한숨을 내쉰 대표님이 다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무슨 입지도 반응도 없는데, 미국 진출해 봤자 망합니다.”
나는 그 개고생했던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 쪽 프로듀서들이나 래퍼들과 인맥 쌓고 협업했던 경험은 물론 충분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내 경험과 인맥 쌓자고 다른 멤버들까지 고난의 길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이든이 너는 너무 청춘다운 패기가 없어. 한번 부딪혀도 보고 그래야지!”
“부딪혀서 단단해지는 경우가 있고 개박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후자예요, 대표님.”
청춘도 개박살 나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참, 스파이는 잡으셨어요?”
“신월엔터에 있었던 놈이라는데. 그런데 혼자 한 짓이 아니라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놈 부서가 도저히 음원을 빼돌릴 수가 없는 곳이라.”
“그럼 그 조력자까지 잡아야 음원 유출 시즌 2가 안 돌아오겠네요.”
아무래도 류재희가 낸 그 아이디어를 활용해야 할 것 같았다. 퀘스트 기간도 다음 앨범 전까지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 나도 색출에 전력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대표님이 든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전혀 든든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 스파이도 무슨 계책도 못 써서 흥신소 도움을 받아 잡아냈다고 들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우리 LnL은 정말로 대충 돌아가는 소속사였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대표님의 아메리카 드림을 꺾은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예능 촬영을 간 김도빈과 향수 화보 촬영을 간 서예현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나를 반겼다.
공백기인 지금 제일 바쁜 이는 개인 스케줄이 쌓인 서예현이었다.
CF부터 의류 엠버서더, 화보까지 모두 섭렵 중이었다. 역시 특성이 모델인 인간다웠다.
물론 드라마 제의는 들어와도 자신의 연기 실력의 한계를 느낀 서예현이 모두 거절했다.
제게 들어온 개인 스케줄 목록을 훑던 견하준이, 막 숙소로 돌아온 내게 물었다.
“대표님이 뭐래?”
“지금 미국 진출 겨우 막고 왔어.”
“와우, 큰일하고 오셨네.”
류재희가 혀를 차며 박수를 쳤다.
솔직히 미국 진출? 딱 듣기만 하면 아티스트로선 솔깃할 일이긴 하다.
나야 직접 미국에서 개고생하고 온 덕에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으므로 이런 판단을 내린 거지만, 류재희는 직접 미국 활동을 겪지도 않은 어린놈이 바로 위험성을 계산해 냈다니, 하여간 난놈은 난놈이었다.
물론 견하준이야 눈치가 빨라서 논외지만.
“우리 보고 영어 잘하냐고 물으신 거 봐서는 영어만 되면 언제든지 미국으로 날려 버릴 것 같은데, 다들 영어 못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망할, 나는 이미 잘한다고 이실직고를 해 버렸는데 어쩌지.”
“일단 미국의 ‘미’자도 당분간 대표님 앞에서 꺼내지 않는 거로 합시다.”
“그래, 일단 도빈이 입단속부터 시키자.”
견하준이 내가 간과하고 있던 걸 짚었다.
서예현이야 머리가 굴러 가므로 걱정은 없지만 김도빈은 ‘미국 진출’ 소리를 들으면 눈을 빛내며 긍정적인 의견을 마구 보여 줌으로써 대표님의 아메리칸 드림에 다시 불을 지를 확률이 높았으므로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럼 저희 하반기에도 계속 한국 있어요?”
“올해 아마 일본 활동 정도는 할걸? 아니면 태국이나. 하반기에는 아마 앨범 컴백은 못 하고 디싱 정도나 내겠지. 공백기 너무 길어지면 안 되니까. 음방은 모르겠지만.”
일단 현 상황에서 미국만 안 가면 된다, 미국만!
* * *
술 사 준다는 용철이 형의 연락을 받고 쫄래쫄래 나가자, 나처럼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용철 형이 손을 흔들었다.
“뭐야, 벌써 연예인 됐어, 형?”
빵 터져서 등짝을 퍽퍽 치며 묻자 마스크를 쓱 내린 용철 형이 대꾸했다.
“DTB 나온 거 알아보시는 분들이 몇몇 있더라고.”
“이열, 인기남. 겨우 2화 방영했는데 이 정도 인기라니. 거봐, 내가 오디션 보기 전에 머리 자르고 가라고 했지. 대걸레머리였으면 인기 없었어, 형.”
“그래, 고오맙다.”
용철 형이 내 뒤통수를 가볍게 치며 투덜거렸다. 마주 앉아 내 잔에 술을 따라준 용철이 형이 입을 열었다.
“한 달 후에 세미 파이널 무대 있다.”
“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형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점점 내려가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이든이 네가 맡아 주라, 피처링.”
용철 형이 회귀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제안을 건넸다.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인연이 그렇게 끊어지고, 홧김에 지워 버린 연락처와 문자함을 뒤적이며 지새우다가 겨우 잠들었던 꿈에도 가끔 나오던 순간이었으니.
내가 그때 세미 파이널 무대 피처링을 받아들였다면.
한 번이라도 그 뒷담이 진짜냐고 물어봤다면.
그렇게 분노로 포장했던 내 열등감을 내지른 이후, 그 이튿날이라도 바로 사과했다면.
수많은 가정을 해 대다가 후회하면 뭐 하느냐고 자조하며 눈을 감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왜 나야? 형이 피처링 부탁하면 줄 설, 내로라할 다른 래퍼들 많은데 왜 하필 아이돌 래퍼를 피처링으로 쓰려고 해?”
애써 가볍게 낸 목소리로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이 인간은 그때와 똑같이 씩 웃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 곡에, 그리고 내가 짠 이 무대에 제일 어울릴 만한 사람이 너니까.”
회귀 전의 상열이 형이 내게 전해 줬던 말이 겹쳐졌다.
‘참, 이용철이 이 말은 꼭 전해 주라 했다. 너한테 DTB 세미 파이널 무대 피처링 부탁했던 건 정말로 그냥 그 곡에, 무대에 제일 잘 어울릴 만한 사람이 너여서였다고.’
그때의 나는 왜 그 진심에 이유를 붙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동정심도, 아량 베풀 듯 내민 선의도, 네가 지레짐작했던 그 어떤 이유도 아니고 오직 그거뿐이었다고. 그걸 왜 해석하고 자빠졌냐고. 덕분에 평생 그 무대에 미련이 남게 생겼다고도 전해 주란다.’
내가 뭐라고. 이 병신 같은 새끼가 뭐라고 그걸 평생의 미련으로 남겨 놔.
대중들이 이름도 모르고 겉멋 든 실력으로 으스대던 아이돌 래퍼 묻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툭툭 털어 내지는 못할망정.
그때의 나는 G1에게 실력 지적받기도 전이라 그 좆 같은 습관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을 텐데.
표정을 일그러뜨린 나를 본 상열 형이 한 소리 역시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에휴, 등신 새끼. 더 늦기 전에 사과하고 화해나 해라.’
그때의 나는 그 충고에 뭐라고 답했던가.
‘늦었어, 이미.’
버석하고 건조한 내 대꾸가 귓전에 환청처럼 울렸다.
맞아, 늦었지. 아주 많이. 나와 형의 손절이 없었던 일이 되고, 다시 피처링을 제안받기까지 나는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
“……형.”
가라앉은 목소리로 용철 형을 불렀다. 도저히 입 밖으로 쉬이 나오지 않는 말에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미안.”
너무 오래 묵히고 짓씹고 삼켜 너덜너덜해진 그 한 단어를 드디어 토해 냈다. 지독한 해방감에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먼저 손을 뿌리쳐 놓고 상대가 손 뻗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머저리 새끼. 먼저 사과할 사람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뜬금없는 사과를 받은 용철 형은 그것을 피처링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못하겠냐?”
“아니, 해. 한다고.”
“그럼 왜 미안해? 무대에서 실수할까 봐 미리 밑밥 깔기냐?”
“아니, 내가 실수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형 세미 파이널 무대에서. 그냥, 그냥…….”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네가 나한테 미안한 게 한두 개냐.”
부러 묻지 않고 씩 웃은 용철이 형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피처링 부분 가사나 써 와. 조오온나 까리하게. 알겠냐?”
잔과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용철 형의 미련 남지 않는 무대를 위하여!”
“야, 다시 해. 다시. D.I의 최고의 무대를 위하여! 로.”
“내가 누군데. 내가 피처링으로 선 이상, 최고의 무대 정도는 당연히 만들어 주지. 그냥, 이번에는 이 무대에 미련 남기지 말라고.”
“하여간 윤이든 저 근자감 진짜.”
픽 웃으며 잔을 비우는 용철 형을 따라 나 역시 잔을 비웠다. 과거의 내 미련도, 형의 미련도 술잔에 흘려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