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21)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21화(21/475)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21화
“으어어, 수고하셨습니다아아…….”
“이든이 형, 예현이 형 넋 놨는데요.”
“냅 둬. 나도 지금 저 인간 때문에 넋 나갈 거 같으니까.”
음원 녹음은 내가 “다시”를 백 번을 넘게 반복하고 나서야 무사히 끝났다.
회귀 전에 여러 아이돌을 프로듀싱한 경험이 있었기에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우리 멤버들은 그보다 훨씬 부담이 덜 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예현 한 명이 일당백이었다.
헤드셋을 벗지 않은 상태로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듯 몸을 기대고 녹음 완성본을 재생시켰다.
헤드셋을 통해 댄스풍의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꿈속에서 만나자고?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유감이지만 오늘 콘셉트는 all night이거든]
한때는 다른 놈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노래가 곡을 쓸 때부터 생각했던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마치 꿈만 같은 기분에 참지 못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현이 형, 어떡해요? 이든이 형이 결국 넋 놨나 봐요.”
“저게 나 때문이라고?”
헤드셋 너머로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소곤거림에 웃음을 뚝 멈추고 어금니를 깍 깨물었다.
쟤들도 불화 조장 어쩌고로 초심도 깎이는 고통의 맛을 보여 주면 안 되냐? 불화 조장은 지금 쟤들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
‘에휴, 내가 이러고 산다.’
처량한 내 신세를 한탄하며 다시 음악에 빠져들었다.
걱정스럽던 서예현의 파트도 원하는 수준이 나올 때까지 계속 굴린 덕분인지 꽤 자연스럽게 묻어갔다.
완성본의 전체적인 퀄리티는 해리포터식 성적표로 비유하자면 기대 이상(E)이었다.
내가 프로듀싱한 노래라도 얄짤 없이 보통(A)을 주던 평가를 돌아보았을 때 잘 뽑힌 편이라는 소리다.
참고로 회귀 전 레브의 노래는 하나도 빠짐없이 형편없음(P)이었다. 아, 미니 2집 타이틀은 끔찍함(D)이었던가?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방의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타이틀곡은 기가 막히게 잘 뽑혔으니까 이제 곡이랑 잘 어울리는 콘셉트만 잡으면…….
[어둠의 힘으로 영혼이 둘로 나누어진 다중우주…… 말은 되지…… 그래, 말은 되는데…….] [아니, 오마주도 적당히 해야지 오마주지!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표절이잖아, 그냥! 인터스텔라 그대로 옮겨 온 거잖아! 우린 망했어! 이제 표절돌로 불릴 거라고!] [와, 차라리 <내 우주로 와> 때 의상 입고 싶다. 그건 심플하기라도 했지, 이건, 시발.] [울 엄마가 쪽팔리데요…… 때려치울까…….]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회귀 전 이맘때쯤의 과거에 식은땀을 흘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망할!”
음악 완성본에 취해 잊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콘셉트 회의였다.
타이틀곡이 이미 나왔기에 곡에 맞춰 콘셉트를 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상대는 다크니스 블랙소울 부르짖는 노래에도 다중우주 콘셉트를 들고 왔던 대표님이었다.
기획실장은 대표 말이면 예예, 하는 자아 없는 인간이라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좋소와 인맥 조합의 폐해였다.
망할 소속사를 속으로 열심히 씹다가 벌떡 일어나 책상에서 공책과 펜을 꺼내 들었다.
[제1회 레브 회의]라고 쓰인 페이지를 한 장 넘기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휘갈겨 썼다. [제2회 레브 회의] [부제 : 미니 2집 콘셉트]“얘들아, 회의하자!”
쾅!
발로 김도빈과 류재희가 쓰는 방문을 걷어차며 외치자.
매트리스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던 류재희가 사람이 와서 말을 하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툴툴거렸다.
“회의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에요?”
“눈이 있으면 봐라. 제2회라고 써진 거 안 보이냐? 너는 두 번이 자주 하는 거냐? 아니면 숫자를 못 읽는 거냐?”
[멤버들과의 불화를 조장하는 말이 감지되었습니다.] [초심도 –1]그래그래, 알겠다. 좋게 말해 줄게.
“사랑하는 막내야, 이 2라는 숫자가 보이지? 두 번은 자주 하는 거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지 않을까?”
“왜 이러세요, 형. 무섭게.”
내 다정하기 그지없는 어조에 류재희가 파드득 떨며 질색했다.
좋게좋게 말해 줘도 저 지랄인데 내가 꼭 부드럽게 말해야 할까?
어느새 류재희와 김도빈의 방 앞에 도착해서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던 서예현이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다.
“그냥 회의해. 윤이든 독재 시절보단 낫잖아.”
“아니, 이 형은 맨날 사람 섭섭하게 말하네? 내가 언제 독재했다고 그래?”
“전에 우리가 언성 높이고 싸운 원인은 머릿속에서 싹 지웠어?”
“하, 형은 상식적으로 한 번이 자ㅈ…… 사랑하는 맏형아, 한 번은 자주 하는 거라고 보기엔 어렵지 않을까?”
“……너 뭐 잘못 먹었니?”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서예현을 보며 참을 인(忍)자를 새겼다.
참자, 참을 인(忍) 세 개면 초심도 –1점을 면한다.
우리가 또 싸울까 봐 부리나케 달려온 견하준이 나와 서예현의 등을 떠밀어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좁은 방의 작은 매트리스 위에 다섯이 스케치북 하나를 중간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무슨 수련회라도 온 느낌이었다.
스케치북 위에 적힌 글자를 읽은 김도빈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런데 콘셉트 회의 곧 있지 않아요? 굳이 지금 저희끼리 할 필요가 있어요?”
“맞아, 직원분들이랑 대표님 의견도 들어 보고 그때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견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물론 이해는 한다. 그게 상식적인 절차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상식과 현실은 다른 법이라서 말이지.
“너희 다중우주 콘셉트로 인터스텔라 표절 뮤비 찍고 싶어?”
표절돌로 낙인찍힐까 봐 초조해하던 기억이 부러 묻어 두었던 저 심해에서 되살아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망돌의 뮤비 따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뮤직비디오는 이슈도 되지 않고 그냥 너튜브 조회수 921으로 조용히 지나갔다.
레브가 뜨고 나서는 팬들도 미니 2집을 없는 노래, 없는 뮤비로 취급해서 무사히 묻혔다.
노래가 달라져서 뮤직비디오 내용도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표님의 우주 세계관 집착은 달라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몇 년 후에 세계관이 아이돌판 기본 콘셉트로 자리잡는 걸 보면 선구안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고집하는 콘셉트들이 죄다 거지 같은 걸 보면 감은 확실히 없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무슨 그렇게 확신하고 그래. 회의 때 더 나은 콘셉트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
“준아, 세상은 그렇게 긍정적인 곳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이때까지의 콘셉트 회의 생각해 보면-”
말하다가 멈칫했다.
회의 때 끔찍한 콘셉트를 막기 위해 아무 의견이나 꺼내다가 우리끼리도 말을 맞추지 못해.
결국 방어에 실패했던 경험들은 모두 회귀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멤버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게 오직 나만 기억하는 추억이라는 게 참 씁쓸했다.
당장 끔찍한 콘셉트를 막아야 하는데 단합이 안 되어서 속 터지던 그 감정.
무대 위에서 그 끔찍한 의상을 입고 어둠의 중2병 가사를 부르던 나날들.
표절돌로 낙인찍힐까 봐 초조해하다가 결국 위궤양까지 온 고통스러운 기억.
이 모든 그 엿 같은 추억들을 이제는 나 혼자만 기억해야 한다는 게 존나 꼽고 입맛 써서 뒈지겠다고!
몰려오는 억울함과 짜증을 겨우 내리누르고 입을 열었다.
“다들 <내 우주로 와> 때보다 더 끔찍한 콘셉트와 의상이어도 견딜 수 있냐?”
“그거보다 더 끔찍할 수가 있어?”
“이미 저희는 스펀지 실험복 점프슈트로 단련되어서 무슨 의상이든 충격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요.”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무대 의상 직접 보기 전까진.
“검은 깃털 달린 겉옷에 체인 주렁주렁 달린 촌스러운 블랙 셔츠에 징이나 스트랩 잔뜩 달린 고딕 바지에 개목걸이 초커 조합을 소화할 수 있으면, 회의 때 나온 콘셉트로 가던가.”
<내 우주로 와>가 극한의 심플함이었다면 그다음 활동은 극한의 투머치였다.
괜히 팬들도 묻은 흑역사가 아니었다.
“어림짐작하는 것치곤 너무 자세한데? 꼭 본 것처럼 말한다?”
“꿈에서 증조할머니께서 증손자 망하는 건 차마 못 보시겠던지 스포해 주시더라.”
남의 증조할머니가 나왔다는 꿈을 차마 개꿈이라고 할 순 없었는지 서예현은 더는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증조할머니, 팔아먹어서 죄송합니다. 올해는 꼭 성묘 갈게요.
“회의 때 무슨 의견이 나올지 모르니까 우리끼리 미리 정해서 입 맞춰 놓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다들 후속곡 활동 때 대표님 안목 봤잖아.”
두고 <내 우주로 와>를 밀고 있던 대표님이 떠오른 건지 멤버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우리 사랑하는 멤버들이 회의 때 내 의견에 동조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내 의견으로만 끌고 가면 또 독재 소리 나오실 거고. 그러니까 회의하자고, 오케이?”
어깨를 으쓱하자 표정을 찡그린 서예현이 물었다.
“다 좋은데 그놈의 ‘사랑하는’은 왜 계속 붙이고 난리냐?”
“왜긴. ‘사랑하는’ 붙이면 말이 조금 부드럽게 들리잖아. 안 그래?”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딱히 부정은 안 하는 걸 보니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이다.
그렇게 제2회 레브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류재희가 손을 번쩍 들고 의견을 냈다.
“클럽 콘셉트 어때요?”
“우리 막내, 클럽은 가 봤고?”
“아뇨. 저 미성년잔데요.”
클럽 콘셉트. 나쁘진 않다. 가사도 밤새도록 놀자판인 데다가 노래 장르 역시 댄스이니.
회귀 전, 곡을 받아 갔던 그룹도 클럽 콘셉트로 활동했다.
다만 뮤직비디오를 클럽 콘셉트로 찍기에는 팀에 미성년자가 둘이나 있어서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리고 클럽 콘셉트는 돌판에서 제법 많이 우려 먹힌 소재라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다.
“아니면 굳이 클럽 말고 외국에서 사람 모아 놓고 길거리 공연하는 건 어때? 이것처럼.”
노트북을 가져와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던 견하준이 너튜브 동영상이 열린 창을 띄웠다.
랩/힙합 장르 노래로 활동했던 선배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였다.
담벼락에 그려진 화려한 그래피티와 이국적인 길거리 풍경.
스트릿 패션으로 차려입은 선배들과 간이 무대 앞에 모여 노래 무대를 즐기는 외국인들.
우리 노래 분위기에도 맞고 이미지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데뷔곡 뮤비도 그렇게 가성비 챙겼는데 외국까지 가서 뮤비 촬영할 예산이 될까?”
서예현의 의심 어린 물음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도 우리가 2군으로 뜨기 전까지 뮤비 촬영은 항상 저예산 국내 촬영이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해외 촬영이 가능할 리가.
외국? 파주 영어마을이라도 섭외하면 다행이지.
그리고 국내 촬영은 저런 분위기를 내기가 어려울 터였다.
“프로듀서 의견이나 듣자. 윤이든, 곡 만들면서 콘셉트 생각한 거 없어?”
내게 돌아온 발언권에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