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251)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251화(251/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251화
토끼 모자를 머리에 얹고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비트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비트였지만 그게 딱히 반가운 사실은 아니었다.
갱스터 랩에 어울리는 비트라 내 랩 스타일로는 잘 살리기엔 난이도가 더럽게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쯤은 예상했던 범위였기에 당황하지 않고 박자에 맞추어 바로 첫 소절을 들어갔다.
심드렁한 얼굴로 삐딱하게 앉아 있던 프로듀서 몇몇이 내가 세 번째 소절에 돌입하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구리고 살리기 어려운 비트를 살리는 법? 간단하다. 랩 실력으로 비트를 압도하면 된다. 제일 쉽지만 제일 어려운 방법이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고 내가 준비한 벌스 16마디는 점점 동나고 있었다. 모니터에 하나씩 PASS가 떴다. 아직까지 선택 안 한 사람은 있어도 FAIL은 나오지 않았다.
‘오케이, 7 PASS.’
타이머를 등지고 있어 남은 시간은 알지 못했지만 대충 어림짐작으로 계산했다. 60초에서 앞으로 10초. 3마디 정도면 얼추 마무리되겠군.
[니들 벌스에는 항상 돈, 여자, 방송 타면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삐-그런 것 좀 집어치우고 판 깔아 줄 테니 센스 있게 디스나 해 봐 분위기 망치게 진지 빨지 말고]
내 좌우명인 선빵필승의 마음가짐을 반영한 가사를 내뱉으며 종지부를 찍었다.
다른 래퍼들이 나를 비롯한 아이돌 래퍼를 공격하면 다구리지만, 내가 다른 래퍼들을 디스하면 광역 저격이었다.
아이돌 래퍼로서 좋은 점이라곤 그거 하나 정도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거의 마지막까지 버튼을 누르지 않고 팔짱만 끼고 있던 영빌리가 버튼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영빌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 앞의 화면에 PASS라는 글자가 뜨고, 00:00이 떠 있던 내 등 뒤의 스크린 글자가 바뀌었다.
‘ALL PASS’
기쁨을 표현하는 대신 길게 늘어진 토끼 모자의 양쪽 끝 부분을 꾹꾹 눌렀다.
토끼 귀가 두 번 쫑긋하자 골 때린다는 표정의 용철이 형을 제외한 모든 프로듀서가 탁자를 치며 뒤집혔다.
“아, 토끼 귀로 감정 표현하는 거야?”
“귀엽네. 진짜 깜찍해. 토끼가. 토끼 모자가 귀엽고 깜찍하다고.”
껄껄 웃던 AJA가 저를 향한 다른 프로듀서들의 시선에 정색하며 뒷말을 강조했다.
“잘 들었습니다. 옷 꼴, 아니 옷차림이 랩에 묻히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 같네요.”
“반전 매력을 제대로 보여 줬어요. 누가 그렇게 입고 그런 랩을 선보일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어. 이야, 진짜 똑똑한 거 같아요. 랩 시작하자마자 분위기 확 바뀌는 거 보고 놀랐잖아.”
지원 형과 몰틱이 차례로 심사평을 말했다. 의도했던 대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제 남은 건 용철 형의 반응이었다.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용철이 형을 돌아보자 마이크를 든 용철 형이 입을 열었다.
“지금 덥죠? 땀 흐른다.”
용철이 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좀 많이…….”
“더위 먹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 같은데 얼른 모자부터 벗으세요. 여러모로 보고 있기가 좀 힘드네요.”
“아,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예예, 제 시력이 걱정돼서요.”
드디어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 준 용철이 형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제작진의 손짓에 적당히 만담을 끊고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마이크에 대고 짧게 인사를 한 후 무대를 내려왔다. 비트 빼고는 후회 없었던 무대였다.
여전히 나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보며 토끼 모자를 벗었다.
“어우, 머리에 땀이 잔뜩 찼어요.”
보지 않아도 잔뜩 눌리고 헝클어졌을 머리의 꼴이 눈에 선했다.
눌린 머리를 가볍게 헤집어 살리고 브이자 한 번 그려 주고는 안내에 따라 프로듀서 대기실로 들어갔다.
머리와 메이크업을 가볍게 정돈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자기소개 한 번 부탁드려요.”
“Dream of me! 아이돌 그룹 레브의 리더 겸 메인래퍼, 윤이든입니다.”
대기실에서 흘렸던 나와 최형진의 갈등 떡밥을 덥석 문 건지 제작진은 예상 범위 안의 질문을 했다.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의 견제를 받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아이돌 래퍼 무시하는 분들은 아이돌을 ‘안’ 하신 건지, 아니면 ‘못’하신 건지. 저는 그게 참 궁금해요. 그렇게 할 만해 보이면 한번 도전해 보시는 게?”
콧등까지 내려간 안경을 쓱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아, 예. 계급장 떼고 래퍼 대 래퍼로 어디 한번 붙어봅시다. 그거 떼면 누가 더 불리한지 봐 보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1차 예선 때처럼 겸손 챙길 때가 아니라 걸어오는 시비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 줄 때였다.
어차피 이 질문에 관한 악편은 예약되어 있으니 기왕 방송 나갈 거, 화끈하게 나가야지.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각오 부탁드릴게요.”
“앞으로의 각오요? 아이돌 래퍼보다 랩 못하는 놈이 욕이 아니게 되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욕으로 하려면 일단 저를 뛰어넘고 하시길 바랍니다-.”
느긋하게 마지막 말꼬리를 늘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마침 잠깐의 휴식 타임인지 프로듀서들이 줄줄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내가 아닌 내 옆에 놓인 토끼 모자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야, 나 이거 너무 탐나!”
“이거 그거잖아요. 요즘 유행하는 인싸 토끼모자.”
“나 이거 쓰고 심사할래. 랩 마음에 들면 귀 쫑긋쫑긋하게.”
“아니, 형님. 나잇값 좀…….”
토끼 모자를 어느새 제 머리에 얹은 원백이 나를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이든아, 나 이것 좀 빌려도 돼?”
“예, 편하게 쓰셔도 괜찮아요.”
“오오, 땡큐. 디아이 통해서 돌려줄게.”
“아니요, 아예 가지셔도 상관없어요. 그 모자는 이제 쓸모를 다 했기 때문에.”
내가 저걸 다시 머리에 얹을 때는 아마 팬사인회나 팬미팅 때가 아닐까. 일단 DTB에서 저걸 다시 쓰고 나올 일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또 한 번 더 안 쓰고 나와?”
묘하게 실망하는 것 같은 AJA의 물음에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저는 한 번 한 컨셉은 다시 하지 말자는 주의라…….”
반응 존나 좋은데? 오늘 저거 안 쓰고 나왔으면 이 형님들 섭섭해서 어쩔 뻔했어.
“형, 나 오늘 좀 얌전한 모범생 같지 않아?”
“범생이는 모르겠고 보는 내가 더 더워 보였다, 인마. 그리고 너 랩 시작 전에 순하게 웃을 때 소름이 다 돋기는 하더라.”
내게 생수병을 내미는 용철이 형에게서 물을 받아 들며 묻자, 용철이 형이 팔을 문지르며 질색했다.
“그럼 다음 컨셉은 뭔데?”
“맞아, 우리한테만 슬쩍 말해 줘 봐. 아무 예상 못한 것처럼 리액션 충분히 가능하다니까.”
나를 쿡쿡 찌르는 지원이 형과 원백, 그리고 아닌 척 이쪽으로 신경을 기울이는 프로듀서들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제 또 생각해 봐야죠.”
다음 콘셉트가 뭐가 될지는 당사자인 저도 아직 모릅니다.
* * *
3차 예선까지 무사히 올라가며 이제 온전히 내 것이 된 합격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당당히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뭐라고 했냐! 2차 예선까지는 무조건 붙을 거라고 했지!”
“나는 딱히 네가 떨어진다고 한 적이 없거든?”
제 눈앞에서 달랑이는 합격 목걸이를 툭툭 치며 서예현이 투덜거렸다. 물개 박수를 보내던 김도빈이 슬쩍 물었다.
“그래서 형, 3차 예선 때도 그 머리로 갈 거예요?”
“아니? 다시 검정으로 덮어야지. 계속 핑크 머리면 보는 사람들도 질리잖아.”
염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깝긴 했지만 이미 분홍 머리는 한 번 선보였기에 신선함이 죽어 버렸다.
내 기억으론 DTB 시즌 4의 3차 예선은 1대1 매치였다.
다만 방송 측에서 랜덤으로 짝을 지어 주었던 시즌 3까지의 매치들과 달리 래퍼들이 직접 상대를 지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시즌들과 다른 점 또 하나.
시즌 4는 유일무이하게 2차 예선 평가에서의 하위권부터 지목 우선권을 주었다.
그나마 비벼 볼 만한 놈을 선택하거나, 명죽(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거나. 선택권을 가진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덕분에 자극적이고 반전인 매치들도 많이 나왔지만 욕도 바가지로 먹고 시즌 5부터는 조금 덜 자극적인 방식으로 조정했지.
단적인 예로, 회귀 전 DTB 시즌 4의 우승자인 유피는 2차 예선 때까지는 실력을 숨겨 최하위권을 차지했다가 지목 우선권을 받고 2차 예선부터 주목받던 최상위권 래퍼를 지목해 압도적으로 이김으로써 단번에 제일 주목받는 반전 래퍼로 치고 올라갔다.
후에 인터뷰로 자기는 그냥 초반에 견제를 받고 싶지 않아 적당히 2차 예선까지만 실력을 숨기려 했을 뿐이라 룰이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했지. 대단한 운발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지목 우선권이 필요 없었기에 이걸 알고 있음에도 하위권을 차지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누구를 지목하든 뒷말이 나올 게 당연하거든.
내가 상위권 래퍼를 지목하면 아이돌 래퍼 놈이 여기에서 떨어질 사람이 아닌 후보를 지목해서 떨어뜨렸다고 뒷말이 나올 것이고.
하위권 래퍼를 지목하면 실력에 자신 없어서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혹은 프로듀서와 친해서 미리 변경된 방식을 듣고 실력을 조정한 게 아니냐고 뒷말이 나올 터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욕을 먹을 운명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상위권에 올라 누가 나를 지목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잠깐, 유피가 나를 지목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과거의 우승자가 벌써부터 떨어진다고? 회귀 전 유피의 무대를 꽤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었기에 제발 유피가 이번에는 나를 지목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무대를 다시 보고 싶었으니까.
그 양반 성격을 봐서는 한 80%의 확률로 나를 지목할 것 같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쉽게 이겨 버리는 것보다는 아슬아슬한 매치 상태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만약 나를 지목해서 떨어지더라도 패자 부활전에서 올라오쇼. 파이팅. 나는 내가 올라갈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1대 1 매치니까 역시 패션으로 기선제압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럼 이제 3차 예선의 기선제압룩을 고민할 차례였다.
분명 마음껏 랩하려고 나간 서바이벌인데 왜 랩보다 패션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