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254)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254화(254/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254화
백지 종이를 구겨 겉옷을 던져 놨던 무대 옆편에 휙 던져 놓고, 계속 랩을 이어 나갔다.
‘종이 챙겨 가서, 가사를 못 외워서 종이에 써진 가사 읽는 척하다가 마지막에 백지인 거 보여 줘.’
데뷔 초반, 가사를 외우지 못하여 내게 몇 번 쓴소리를 들었던 서예현이 제공한 아주 좋은 사이다 아이디어였다.
나한테 갈궈지면서 속으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니. 존나 발칙하네.
“얌마, 식겁했잖아!”
비트가 멈추자마자 벌떡 일어난 용철 형이 발끈한 얼굴로 내게 삿대질했다. 다른 프로듀서들이 낄낄거렸다.
“엌, 디아이 빡쳤어.”
“그런데 저도 진짜 뒷면 보여 주기 전까지 저기에 가사가 적혀 있는지 알았어요.”
옆에 앉아 있던 원백이 용철이 형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그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섬주섬 내가 버린 백지 쓰레기를 주운 겸 겉옷도 주워 다시 입자, 지원이 형이 지퍼를 올리는 시늉을 하며 나를 재촉했다.
“잠가, 잠가. 다시 지퍼 올려, 얼른.”
가슴골도 힘겨워하던 저 형님들한테는 너무 큰 자극이었던 것 같아 순순히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저 옷이, 퍼포먼스 때문에 기가 막혀서 눈에도 안 들어왔어.”
“혹시…… 그 복장 타겟이 우리야?”
원백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색하며 즉답했다.
“설마요.”
우리 데이드림을 위한 팬서비스를 그렇게 곡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타겟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데이드림이 되시면 됩니다.
“그렇지? 아니지?”
원백이 안도한 얼굴로 마이크를 내렸다. 대체 왜 안도하는 건데.
“아니, 막 그 조명 비추면 보이는 잉크로 쓴 거 아니야? 종이 좀 줘 봐.”
“애초에 그 특수 조명이 제 손에 없는데요.”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펴서 최록에게 전달했다. 이리저리 조명에 비추어 본 최록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백지 맞네. 퍼포먼스 미쳤다.”
내 어그로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디셈브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도 유피한테 그렇게 당해 봐서 그 마음 잘 안다. 그래도 어쩌겠냐, 경쟁인데.
“쓰읍, 후공 어그로가 너무 강력했어.”
“그래도 역시…….”
팀 파트너와 함께 의논을 하던 프로듀서들이 투표를 마쳤다.
“두 사람 다 쭉 올라가면서 얼마나 더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 터라 한 명만 선택해야 하는 이 상황이 참 안타깝고, 아쉽고 그러네요.”
BQ9이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게 담담한 위로를 건넸다. 역시 같은 서바이벌 준우승자 출신이라 탈락자한테 위로되는 말을 해 줄 줄 알았다.
“이번 패자부활전에서 올라갈 승자는…….”
잠시 말을 멈춘 몰틱이 나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이든. 저희랑 다음 스테이지에서 뵙겠습니다.”
당연한 결과에도 겸손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패자부활전 경쟁자였던 디셈브와도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백스테이지로 돌아갔다.
역시나 본방에서 삽입될지 아닐지 모르는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나는 그 인터뷰에서 좋은 경쟁이었다고 입을 털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하고 싶은 말이요?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우리 레브 맏형, 땡큐.”
카메라 렌즈를 검지로 가리키며 가볍게 윙크를 날렸다.
만약 이 인터뷰가 본방에 나온다면 방송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질색을 할 서예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게 바로 은혜를 원수로 갚아 주기, 뭐 이런 건가?
* * *
“형, 형, 부활했어요?”
“그래, 인마. 부활했다.”
다시 나를 우러러보는 김도빈의 정수리를 두드려 주며 당당하게 숙소로 귀환했다.
아마 3차 예선 다음이 게릴라 미션으로 시즌 4에 처음 나온 싸이퍼였던가.
본선 무대 전, 디스전을 넘어서서 최고의 시청률을 찍었던 싸이퍼 미션을 상기하며 턱을 까딱였다.
왜 최고의 시청률을 찍었냐면, 시간제한 탈락을 건 마이크 쟁탈전이 진짜 싸움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랩하다가 중간에 자기 마이크를 뺏었다고 멱살잡이와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와중에, 자기는 탈락하지 않겠다고 제삼자가 마이크를 스틸해서 랩을 하는 어부지리의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게 어떻게 시청률 보장이 안 되겠는가.
솔직히 랩을 아예 중간에 끊어 버리면서 마이크를 뺏는 것도 예의가 아니긴 했다. 그걸 멱살잡이와 라이트 훅으로 돌려줘서 문제지.
아무튼, 그 싸움 때문에 마지막에 시간이 부족해 랩을 하지 못한 탈락자가 발생했다.
그걸로 인해서 욕이란 욕은 전부 처먹고 다음 시즌부터 룰을 바꿨던가.
‘그래, 싸움 자체를 막자!’
회귀 전 시청률 떡상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쌈박질을 말리면 덥넷 놈들이 원하던 자극적인 전개가 사라질 것 아닌가.
나는 아직 패자부활전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번 싸이퍼는 덥넷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가 주마.
“이번에는 촬영 텀이 꽤 짧네요?”
게릴라 미션인 싸이퍼 촬영 일정을 확인하는 내 옆에서 날짜를 구경하던 류재희가 말했다. 싸이퍼 촬영일은 당장 사흘 앞이었다.
“내가 패자부활전을 거친 것도 있고, 싸이퍼는 끊지 않고 원테이크로 찍는 거니까.”
3차 예선과 패자부활전을 거쳐 걸러진 TOP 30. 이 서른 명의 래퍼가 랩 싸이퍼를 선보여야 한다.
제한 시간은 10분.
가사를 절어도 탈락, 최소 시간인 15초 이상을 채우지 못해도 탈락, 시간 내에 랩을 하지 못해도 탈락.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실수하지 않고 시간 내로 랩을 15초 이상만 프리스타일로 할 수만 있다면 탈락할 일은 없다는 소리다.
프로듀서 앞에서 심사받는 1, 2차 예선과 무조건 한 명은 떨어져야 하는 3차 예선의 1대1 매치보다 훨씬 부담은 덜했다.
“어차피 한 사람당 길어 봤자 20초라 부담도 없고.”
“그런데 시즌 3까지는 이런 거 없었지 않아요? 아예 완전 새로운 미션인데. 형, 괜찮겠어요?”
아마 류재희는 3차 예선까지는 이전 시즌과 같은 포맷이라 내가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회귀 전의 기억으로 인해 포맷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것도 내가 긴장하지 않는 것에 한몫했지만, 그 기억이 없었어도 상관없었다.
“얌마, 나 윤이든이야.”
실력으로 바르면 되니까.
그러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싸이퍼 의상 고민이나 도우라고 류재희의 머리를 가볍게 헤집었다.
원래는 이제 패션쇼를 잠시 그만두고 얌전하게 스트릿 룩으로 입고 가려고 했으나, 래퍼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 상황이라 스트릿 룩은 쉽게 묻혀 버릴 게 분명했다.
“노출은 이만하면 됐어. 여기에서 더하면 뇌절만 된다. 그러니까 노출 없는 의상으로 아이디어 좀 내 봐.”
“노출 없이 그 힙스터 룩 사이에서 확 튀려면 역시 이거죠.”
류재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제 휴대폰 화면에 띄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오케이, 합격.”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바로 산뜻하게 오케이를 외쳤다. 딱 좋네.
게릴라 미션 싸이퍼 당일.
드디어 Top 30으로 좁혀진 래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언더 시절 알던 래퍼들도 몇 보였고, 나랑 아예 연이 없었던 이들도 많았다.
친한 척 친분을 과시하기보다는 견제를 택한 건지 그쪽에서 먼저 내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 역시 먼저 다가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짧은 눈인사만 하고 시선을 거뒀다.
‘어디 보자. Top 30은 대충 회귀 전이랑 비슷한가?’
나를 도약의 발판으로 썼던 유피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주변을 둘러보자, 준우승자였던 스코언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상대방 멱살을 잡았던 래퍼가 누구였더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뭔가 낯익어 보이는 두 얼굴을 발견하고 그 사이로 다가갔다.
둘 중 누가 멱살을 잡힌 놈인지 잡은 놈인지는 헷갈리지만, 아무튼 이 사이에 있으면 싸움을 무사히 말릴 수 있을 거라는 사실.
“싸이퍼는 총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비트에 마이크를 잡고 15초 이상 랩을 하시면 됩니다. 마이크를 먼저 잡는 사람에게 해당 비트에 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가사를 절면 탈락, 최소 시간인 15초 이상을 채우지 못하면 탈락, 시간 내에 랩을 하지 못해도 탈락입니다.”
무대 중앙에 놓인 마이크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맹수 그 자체였다.
‘시바, 굳이 여기에 안 있어도 됐겠구나.’
마이크의 움직임을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인파를 느끼며 내 선택을 후회했다. 왜 하필 제일 잘 휘말리는 자리에 서서.
10분이라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랩을 아직 하지 못한 이들은 조급해져서 눈에 불을 켜고 마이크 쟁탈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야 피날레를 노리고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었지만.
드디어 시청률 떡상의 원인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탈락 조건에 랩 15초 이상이라는 조건이 있다. 10초 만에 마이크를 뺏으려는 옆 래퍼의 행태를 보자 왜 멱살잡이가 일어났는지 단번에 납득했다.
이건 나 같아도 멱살 잡지. 애초에 마이크를 뺏기지도 않았겠지만.
눈을 빛내며 마이크를 뺏기 위해 그 옆으로 다가가려는 다른 떡상의 원인을 온몸으로 막았다.
놈이 나를 노려봤지만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정색하며 내려다보자, 역으로 움찔했다.
내가 저를 지켜 줬다는 걸 눈치챈 떡상의 원인 1이 감사의 표시로 내게 마이크를 넘겼지만 내 손길보다 먼저 마이크를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형진이었다.
1분도 남지 않은 시간에, 랩을 아직도 하지 못한 이는 나랑 내 옆의 다른 래퍼 하나.
그리고 룰에는 오버타임의 규제가 없다.
딱 보니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오버타임 랩도 충분히 강행할 만한 최형진의 어깨에 팔을 턱 두르고 남은 시간을 셌다.
12, 13, 14, 15초. 오케이, 끝.
마무리할 시간은 충분히 줬으니 마이크를 꾹 잡고 힘으로 쟁탈했다. 놈이 허망한 눈으로 제 손에서 떠난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를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인 래퍼한테 넘겼다.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아 든 래퍼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치고 랩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30초.
딱 15초를 채우고 공손히 건네받은 마이크에 대고 싸이퍼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프리스타일로 힙합의 올바른 정신인 respect의 태도를 말하고 있으니 오늘 의상인 쓰리피스 정장이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딱 15초를 채움과 동시에 싸이퍼의 비트와 마이크가 뚝 끊겼다.
무사히 PASS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