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407)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07화(407/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07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솔선수범하여 설거지까지 마무리했다. 설거지라기보단 그릇을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게 다였지만.
류재희가 제가 설거지한다고 나섰는데 어떻게 손님한테 시키겠냐고.
엄마는 동생들이 있으니 철든 척한다며 그릇을 애벌 설거지하는 내 등을 웃으며 짝짝 두드려 댔다. 다음에도 데려오라는 말은 덤이었다.
류재희는 몰라도 김도빈은 다음 명절까지 우리 집으로 오면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호적이 파일 텐데.
어쨌건 우리 휴가가 끝나기 전까진 김도빈을 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류재희와 함께 내 침대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는 꼴을 보아하니 쉽사리 오늘 내로는 떠나지 않을 것 같긴 하다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견하준에게 전화를 걸어 한탄하는 것밖에 없었다.
“가서 사과나 하라니까 지금 가면 맞아 죽는다고 죽어도 안 가고 우리 집에서 버티고 있더라니까.”
-말로만 전해 들어도 도빈이의 급발진 때문에 도빈이네 집 분위기가 확실히 망했으리라는 게 아주 잘 느껴지네. 본인도 자기가 잘못한 걸 아니까 지금 집 안 들어간다고 버티고 있는 거지.
견하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뒤로 시끌벅적한 소음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주변이 좀 시끄럽네? 한마디 했다가 견하준 큰이모 댁의 방 수와 11개월 된 오촌 조카의 존재, 견하준 막내 외삼촌이 운전한 시간과 지금 몇 시간 동안 곯아떨어지셨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도빈이 지금은 집 돌아갔어?
“아아니, 결국은 쫓아내는 데에 실패했지. 덕분에 나 내 방 침대도 뺏겼어. 막내 녀석들에게 침대 뺏기고 내 방 방바닥에 이불 깔아서 누워 있다니까, 지금.”
내 투덜거림에 널찍한 내 침대를 차지하고 앉은 막내라인이 신나서 말을 얹어댔다.
“형이 침대에서 주무시라니까 굳이 저희한테 침대 강매해 놓고 그러세요. 하준이 형, 오해하지 마세요. 이든이 형이 강매한 거지 저희가 예의 없게 이든이 형 밀어내고 차지한 게 아니에요.”
“맞아요, 저희는 지금이라도 형한테 침대를 양보해 줄 의향이 넘쳐나여.”
“시꺼, 짜식들아. 내일 아침 일찍 성북동 가야 하니까 거기에서 조용히 자기나 해.”
타박을 날리자 김도빈은 입을 다물기는커녕 또 입 열어서 질문했다.
“어라, 저희도 데려가시는 거예요?”
“막내는 데려가는 거 확정인데 너는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엥, 왜요?”
수화기 너머의 견하준도 김도빈과 거의 동시에 물었다.
-한 명만 데려가기도 좀 그러지 않아?
“내일 도빈이 쟤를 성북동에 데려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창 고민 중이야, 지금. 할아버지한테 세뱃돈 3인분을 뜯고 싶기는 한데…”
말끝을 흐리며 김도빈을 힐긋 돌아보고선 덧붙였다.
“쟤가 못 버티든지 할아버지 혈압이 터지든 둘 중 하나일 것 같거든.”
할아버지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긴 했지만 김도빈은 사람 말문이 막히게 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팔순 넘은 영감님보다는 아직 젊고 팔팔한 놈이 더 승률이 높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내가 김도빈을 데리고 할아버지한테 가는 건 거한 불꽃 효도가 되어 버리는 건데?
이미 팔순잔치에 디스랩 한 번 말아 드리고 콘서트로 어색한 화해를 했는데 여기에서 불효 스탯을 더 얹기는 영 그랬다.
어느새 내 방으로 들어온 포도를 안아 들어 침대에 올린 김도빈이 간식을 앞에 둔 개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저 세뱃돈 안 받아도 되니까 따라가면 안 돼요? 저 계속 빅 이벤트 놓친다고요. 팔순 잔치 효륜 디스랩도 놓치고, 영통 세배도 놓치고, 콘서트 초대표 쟁탈전이랑 효륜 디스 편지 증정식도 놓치고.”
“이러는데 데리고 가는 게 정말 맞나?”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견하준이 대안을 제시했다.
-그냥 도빈이가 입을 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준아, 도빈이가 몇 시간 동안 입을 안 열고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음, 그건 그러네.
중대 발표를 외치는 견하준 누나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자 내게 ‘잠시만’이라는 짤막한 말로 양해를 구한 견하준이 다급히 ‘잠깐만!’을 외쳤다.
하지만 견하준이 막지 못한 누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수화기를 뚫고 내게까지 선명히 와닿았다.
-울 막둥이 드라마 나온대요! 심지어 엑스트라도 아니고 주조연으로!
-그러면 아이돌 하면서 배우도 하는 거야? 어유, 바쁘겠다.
-너희 둘째 외삼촌 꿈이 배우였잖아. 그거 하준이가 대신 이뤄 줬네. 나중에 인터뷰 할 일 있으면 꼭 말해라. 조카가 외삼촌 꿈을 이뤄 드렸습니다, 어? 얼마나 감동적인 서사야.
-어머니 살아 계셨으면 하준이 나오는 드라마 꼬박꼬박 챙겨 보셨을 텐데. 손주 티비 나오는 거 보지도 못하고 가셨어.
한 마디씩 얹는 견하준 친척들의 목소리도 시끌시끌하게 생중계되었다.
-아, 누나! 말하지 말라니까…!
견하준이 자기 누나에게 투정 같은 원망을 토로했다.
-지금 촬영 중인 거야, 그럼? 드라마 작가는 누구야? 배우는 누구누구 나오고?
-주연 배우들은? 혹시 남주 강우경이야?
-그래서 그거 방영은 언제데? 채널은 몇 번에서 하고?
-그래, 얼른 말 좀 해줘. 그래야지 챙겨 보지. 주변에 자랑도 하고. 공중파야?
-촬영 중이긴 한데 그건 대외비라 말 못하고요… 정확한 일정 나오면 말씀드릴게요, 나오면…
수화기 너머의 견하준이 제게 쏟아지는 질문에 넋 나간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견하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쏟아지는 관심을 피해 도피하는 것에 성공했는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이 확 줄어들었다. 퍽 지친 목소리로 견하준이 한탄했다.
-가족들한테도 괜히 말했나 봐. 엄마도 아니고 누나가 이렇게 자랑할 줄은 몰랐지. 방영 끝날 때까지 말하지 말걸.
“촬영이 아니고?”
-응, 방영. 그러면 굳이 다시 보기로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못 보고 넘어갈 거 아니야.
“드라마가 대박 나서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장난스럽게 말한 천기누설 예언에 견하준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네가 골라 준 거라지만 그게 그 정도 수준으로 초 히트를 칠 것 같진 않은데.
더럽게 단호하구나, 친구야. 나중에 드라마 대박 나면 나한테 복채나 줘라.
어차피 견하준이 가족들에게 숨겼어도 드라마가 대박 터지고 입소문을 타면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견하준을 견하준의 친척 어른들이 보았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면 왜 말을 안 했냐고 시달리게 됐겠지. 그러므로 가족들에게 드라마 캐스팅이 되었다 말을 한 견하준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네가 도빈이를 컨트롤할 수 있다면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네. 재희만 데려가고 도빈이만 두기는 좀 그렇잖아.
-하준아! 막둥아! 얼른 나와서 디저트 먹어! 작은이모가 너 먹으라고 사 오셨대!
“그래, 알았다. 충고 고맙고, 얼른 디저트 먹으러 가라, 막둥아..”
-여긴 진짜 프라이버시가 없어…
힘없이 중얼거린 견하준이 전화를 끊었다.
“하준이 형이 뭐래요? 저 두고 가래요?”
“아니, 데려가란다. 우리집 영감님이 꼰- 짓 좀 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고, 굳이 대답을 하지 마. 그냥 웃어. 웃음으로 얼버무려.”
“혹시 거기 형 친가가 아니라 던전이에요?”
“그래, 인마. 보스몹에게 절 올리면 세뱃돈 30만 원 아이템 나오는 던전이다.”
내일 정말로 별일 없겠지…? 꼭 이렇게 생각하면 별일이 생기더라?
* * *
설날 당일 아침, 성북동.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도빈과 류재희도 이 집 손주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자연스레 세배를 올렸다. 다른 사촌들이 새해 덕담과 함께 차례로 세뱃돈 봉투를 모두 받고 나자 이제 우리 셋만 남았다.
이전에 나를 보던 눈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마주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존나게 어색했다.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자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방송에서 1등 했다면서? 이헌이가 추석에 그러더만.”
설마 DTB 이야기인가. DTB 콘서트 초대권도 달라고 하더니만, 할아버지한테도 말했냐고. 힐긋, 이헌이 형을 돌아보자 형이 내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네, 힙합 서바 나가서 우승했어요.”
“잘했다. 기왕 할 거면 본인 분야에서 1위를 해야지.”
공부가 아닌 음악으로 칭찬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할아버지한테 평생 칭찬 들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셋 중 최연장자인 내게 제일 먼저 돈 봉투를 준 할아버지가 그다음으로 구면인 류재희한테 돈 봉투를 건넸다.
“네가 대학생이었지? 공부는 열심히 하고?”
흠, 내 건 두께로 보아하니 어김없이 30만 원이군. DTB 우승 기념으로 50만 원 받나 싶었더니, 저 고집불통 꼰대 영감탱이 그럼 그렇지.
그나저나 류재희 몫 세뱃돈 봉투를 미리 준비해 놓은 걸 보니 아버지가 미리 할아버지한테 귀띔을 해 줬나? 할아버지가 류재희를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 것 아닌가.
류재희에게 나이 들고 나서의 길까지 생각해 보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긴 잔소리 같은 덕담을 선사한 할아버지가 드디어 멀뚱하게 서 있는 김도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레 합류한 김도빈 몫의 돈 봉투는 준비를 못 했는지 5만 원 다발을 지갑에서 꺼낸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래, 너는 대학은 갔고?”
“네!”
내가 제지하기도 전에 김도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빈아, 미쳤냐? 전직 판사였던 저 영감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고!
“이든이 저놈만 빼고 춤추고 노래하면서도 다들 대학 잘만 가는구먼. 너는 그때 말했었고, 그쪽은 어느 대학 진학했는가?”
“경화…”
“경화대?”
단편적인 정보만 듣고 제멋대로 판단을 내린 할아버지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도빈아! 내가 김도빈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보다 김도빈이 입을 열어 마저 내뱉는 게 한 발짝 더 빨랐다.
“경화 사이버 대학이요.”
5만 원권 열 장째를 세던 할아버지의 손이 삐끗했다. 할아버지가 무어라 하기 전에 선수 쳤다.
“도빈아, 저 영감님은 사이버 대학은 대학으로 안 쳐 준다.”
한창 커리어하이 때 21개월의 공백기를 가진 군필돌이 되지 않기 위해 사이버 대학을 진학했던 내가 대학생임을 주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뱃돈 30만 원을 받는 이유가 다 있었다.
저 영감님 머릿속에 한국 입시의 눈물 나는 노오력을 거치지 않고 진학한 사이버 대학교는 대학이 아니었다. 누가 꼰대 아니랄까 봐 사이버 세계의 대학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바세계의 대학만 쳐 줬다.
그리고 내 말에 김도빈은.
“왜요? 악법도 법인데 사이버 대학도 대학이죠.”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