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408)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08화(408/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08화
‘악법도 법이고 사이버 대학도 대학이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네, 나는 어째서 할아버지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 파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기준에 순응하기만 했지?
나 혼자 열심히 주장해 봤자 할아버지가 생각을 바꾸긴커녕 씨알도 들어 먹히지 않으리란 걸 잘 아니까? 나도 할아버지의 기준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서?
힙합 정신이 무엇인가.
내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디스와 풍자로 편견과 차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바로 힙합 정신 아니던가.
내가 힙합의 힙자도 모른다고 무시했던 김도빈이 오히려 나보다 힙합 스피릿에 가까웠다니,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말에 할아버지 역시 하늘이 개벽하는 수준의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셨다.
“그래, 도빈아! 너 말 잘했다! 네 말대로 사이버 대학도 대학이지!”
비록 공부에는 뜻이 없고 입영 연기를 위해 등록해 놓은 곳이긴 했어도 일단은 사이버 ‘대학’ 아닌가. 정신 승리도 승리고 사이버 대학도 대학인 법이다.
“할아버지, 시대가 바뀌었는데 쌍팔년도 구닥다리 생각에서 벗어나 오픈 마인드를 가지시고 20만 원 더 쳐 주십쇼! 할아버지의 그 꼰스러운 기준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사이버 대학에 입학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 사람들의 학구열을 깎아 내리는 거라고요!”
“맞아요, 사이버 대학 다니고 성공 시대 시작했다는 광고도 있잖아요.”
“…대체 어디서 저랑 똑같은 놈을 데려왔어?”
할아버지도 지지 않고 내게 정신 공격을 시도했다. 시바, 내가 김도빈이랑 똑같다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아무튼, 안 된다! 내 기준에 사이버 대학은 포함이 안 되니까 그렇게 알아!”
“할아버지가 기준을 바꾸면 될 걸 왜 제게 할아버지의 기준을 뛰어넘으라고 하세요?”
“아니면 인터넷에 투표 올려 볼까여? ‘사이버 대학도 대학이다 vs 아니다’로. 그래서 다수결의 의견을 따르시면….”
“할아버지, 세상이 바뀌고 있어요! 악법도 법이면 사이버 세상도 세상이죠!”
“맞아요, 네티즌도 어쨌든 시티즌이잖아요.”
우리를 향한 시선들과 함께 웃음을 참는 소리들이 들렸다.
내가 또 친척들한테 흥미진진 개꿀잼 콘텐츠를 무료로 선사해 주고 있는 건가. 심지어 이번에는 게스트까지 섭외해서 재미가 두 배!
이쯤 되면 관람비를 5만 원씩 걷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나랑 김도빈의 계속되는 우김에 사이버 대학을 절반의 대학으로 인정한 비용인지 우리를 입 다물게 하는 비용인지로 10만 원씩 더 쳐 줬다.
끝을 모르고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누르며 김도빈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김도빈 데려오길 잘했다!
역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나 혼자의 투쟁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것과 말문 막히게 하는 것으로 단연 톱인 김도빈의 서포트가 더해지니 저 강경한 영감님도 무너뜨릴 줄이야.
류재희는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일행이 아닌 척하고 있었다. 저거 저거, 자기는 50만 원 받았다고 말이야, 어?
세배 올리는 게 끝나고 흩어지자 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 5만 원권 여덟 장을 세어 본 김도빈이 바지 주머니에 돈뭉치를 쑤셔 넣으며 감탄을 터트렸다.
“오, 대박. 집에서 받을 것보다 더 많이 받았다. 절 한 번에 세뱃돈 40만 원이라니. 형 조부님 통이 크시네요.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거겠죠?”
그러게 말이다. 원래였으면 30만 원 달랑 받을 걸 내게 단 한 마디로 깨달음을 일깨우고 시야가 트인 나를 서포트하여 40만 원을 받아 가다니, 저 녀석의 운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김도빈의 정수리를 툭툭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넌 아무래도 오늘이 이 집에 오는 마지막이겠다.”
“왜요? 저 출입 금지예요?”
“넌 저 영감님한테 찍혔어. 나 닮은 놈으로.”
그 말에 김도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이 반응은 뭐지?
“네? 제가 그렇게 효륜아처럼 보였다고요? 저는 그저 형의 논리에 힘을 더해 주었을 뿐인데 왜…?”
“오냐. 너는 나한테도 찍혔다, 인마.”
목 마사지를 빙자한 헤드록을 선사해 주자 김도빈이 패륜이 아닌 효륜이라는 헛소리를 해 댔다. 그거나, 그거나.
“막내, 이리 와 봐.”
김도빈 응징을 마치고 류재희를 향해 손짓하니 류재희가 곧장 내게 다가왔다. 류재희를 이끌고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가자 류재희가 식겁하며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어제 물어보고 싶다고 했잖아.”
어제 잠들기 전에 류재희가 지나가듯 흘렸던 말을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얘가 법적 자문이 좀 필요하대요.”
“형 조부님께 여쭤본다는 소리가 아니었거든요? 형 아버지께 여쭤봐도 괜찮은데요…!”
류재희가 급하게 부정하자 할아버지가 손을 휘저었다.
“말해 보거라. 은퇴했어도 아직 내 기억력 멀쩡하다.”
“제가 할아버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혹시 귀찮으실까봐…”
“손자라고 있는 놈은 속 터지는 소리만 하는데 저 녀석 헛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네 상담을 해주는 게 훨 낫지. 적어도 저 두 녀석처럼 헛소리는 안 할 거 아니냐.”
김도빈은 확실히 헛소리하는 놈으로 할아버지 눈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헛소리가 아니라 힙합의 근본 스피릿인 저항 정신이건만.
류재희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가족이랑 절연을 했거든요.”
만약 할아버지가 가족 간의 정 따위의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여 류재희에게 상처를 준다면 효륜디스 프리스타일랩 3탄으로 거한 깽판 한 번 치고 가겠다는 각오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없느니만도 못한 가족도 있는 법이지.”
의외로 할아버지는 쿨하게 류재희의 말을 받아들였다. 판사 하시면서 그런 사례를 많이 봐서 그런가? 아무튼 이쪽으로는 열린 꼰대였다.
“혹시 만약에 부모님이 빚을 지면 제가 책임져야 하나요?”
“심리상으로는 몰라도 법률상으로는 부모와 자식 간의 절연이 성사되지 않고, 부모가 진 빚에 관한 책임은 부모가 돌아가셨는가, 살아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채무도 재산상의 의무에 속하는 터라 상속의 대상이니까.”
“살아계실 때는요?”
“국법상으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한단다. 그러니 살아있는 부모의 빚을 자식이 대신 갚아야 하는 법적 의무는 없다. 법이 강요하지 않으니 책임질 의무는 사실상 없는 셈이지.”
제법 진지하게 류재희의 질문에 답변을 해 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눈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고 휴대폰에서 찾고 있던 비트 샘플링 목록에서 뒤로가기를 눌렀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사채업자들이 부모 빚을 자식한테 갚으라고 하기도 하던데….”
“채무를 자식한테 받아내려 하는 것도 채권추심 시 불법 행위를 수반한 경우지. 이런 경우는 대부업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답지 않게 친절하게 류재희한테 설명해 준 할아버지는 못마땅해하는 목소리로 혀를 차며 덧붙였다.
“하여간 대본을 써도 법적 자문을 받아서 쓰거나 불법 행위라고 밑에 박아놓기라도 할 것이지, 불법을 그렇게 테레비에 전시를 하니까 이렇게 그게 합법인 줄 아는 사람이 생기는 거 아니야, 쯧.”
손으로 입을 가린 류재희가 잠깐 고개를 숙이며 내 쪽으로 돌렸다. 어깨가 짧게 떨리는 꼴을 보니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저 말이 웃겨?
큼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쓱 들며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류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만약 부모님이 제 명의로 빚을 지면요? 친족상도례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원한다면 그것과는 상관 없이 고소 및 법적 처벌이 가능하나요?”
“이게 참… 친족상도례라는 게 개인의 재산권 보호와 행복추구권에 정면으로 위배가 되어도 여전히 법은 가정의 문지방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고지식한 관념으로 인해 이어지고 있단다. 그래도 언젠간 헌법불합치를 받을 날이 올 거다.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은 없느니만도 못한 법이야.”
이건 할아버지와 생각이 일치했다. 내 말이, 사기꾼과 도둑놈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혹여 법적 자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이 늙은이한테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그 정도야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지.”
할아버지가 따스한 눈빛으로 류재희를 올려다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눈가가 발개진 채 입술을 깨문 류재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내가 아니라 저쪽이 친손자였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온 류재희의 등을 두드려 주다가 문득 든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대화하다가 웃음은 왜 참은 거냐? 그 말이 그렇게 웃겼어?”
고개를 짧게 저은 류재희가 생각하니 또 웃음이 터지는지 키득거리며 제가 웃은 이유를 밝혔다.
“아니, 조부님 말씀하시는 게 형이랑 진짜 똑 닮아서요.”
“너는 무슨 그런 심한 말을 하냐. 내가 꼰-이랑 말하는 게 뭐가 닮아.”
투덜거리며 류재희의 머리를 가볍게 헤집었다. 슬쩍 낀 김도빈이 내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형, 저도 형 조부님께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너도 할아버지 앞으로 데려가 줘?”
“아니요. 직접 물어볼 만한 건 아니라서요. 형이 대신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대체 뭔데?”
“세뱃돈 액수가 대학 안 가면 30만 원이고 대학 가면 50만 원이잖아요. 그러면 대학원 가면 세뱃돈 70만 원이에요?”
할아버지한테 안 데려가길 잘했다. 데려가서 질문해 보라고 했다가 나까지 한 소리 들을 뻔했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네 말 들으니까 궁금하긴 하네. 아오, 너는 왜 쓸데없이 나한테까지 궁금증을 심고 난리야.”
“그러니까 한 번 물어보자고요. 형도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물어봤다가 류재희처럼 쓸데 있는 질문 좀 하라는 역정만 들었다.
그 후로는 뭐, 적당히 어른들 말에 대답해 주다가 사촌들끼리 시선을 공유하며 슬그머니 류재희와 김도빈까지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텔레비전이나 시청했다.
원래 명절에 큰집 모이면 다 이러는 거지. 집을 뛰어다니면서 노는 건 어렸을 때 졸업하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어렸을 때도 뛰어다니면서 노는 놈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할아버지 눈치 보느라 얌전히 앉아서 티비만 보거나 책을 읽거나 방학 숙제 혹은 학습지 과제를 하더라.
이러는데 내가 정을 붙일 수나 있겠냐고.
많고 많은 설 특집 영화와 방송을 두고 나와 사촌 형들의 공통 인생작으로 꼽히는 야인시대 연속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윤정아가 들어왔다.
“나 아체대 봐야 해! 아체대! 이든 오빠, TV 좀 사수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