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420)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20화(420/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20화
게다가 그 프로그램에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5분 만에 요리를 완성해야 했다.
김도빈의 수능 도시락을 싸 주었던 날, 제육 볶을 때는 5분이 안 걸렸지만 재료 다지고 양념 계량하던 데에만 20분이 넘게 걸린 과거를 회상해 봤을 때 나는 짐이 되면 짐이 됐지 도움은 딱히 안 될 것 같았다.
방송 프로세스는 학생 팀, 주부 팀, 연예인 팀, 직장인 팀 이렇게 총 네 팀이 주어진 요리 주제에 맞추어 스튜디오에 준비된 재료를 활용하여 음식을 15분 동안 만들어 완성하고 평가받는 형식이었다.
일회성으로 출연하는 팀들인 만큼 우승팀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 그래 봤자 DTB 우승 상금만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상금에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나 혼자만 15분 동안 만들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으아아아…! 너 재료 손질은 할 줄 알지?”
“형님, 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아니야, 이것도 맡기기 영 그래! 너는 재료들 다 조져 놓을 거 같아!”
몸부림치며 절망하던 서예현은 갑자기 한순간에 진정했다.
“그래, 하준이 아니면 셋 다 비슷비슷하지, 뭐. 도빈이가 그중에서 그나마 좀 낫고.”
“아니죠, 형님. 왜 도빈이를 무시하십니까. 도빈이가 형님보다 훨씬 낫습니다. 형님은 고칼로리 음식을 못 만드는 데 반해 도빈이는 무려 갈비찜을 성공한 전적이 있단 말입니다. 형님은 갈비찜도 고칼로리라고 못 만드실 거 아닙니까.”
“갈비찜이 아니라 뵈프 부르기뇽인가? 그거 아니었어?”
“그게 프랑스식 갈비찜 아닙니까.”
김도빈의 요리 실력에서 뵈프 부르기뇽과 갈비찜의 상관 관계까지 나아간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건 서예현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다.
“아무튼, 도빈이급 요리 실력은 너한테 바란 적도 없고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부디! 옆에서 서포트만 잘해 줘.”
일단 고개를 대충 끄덕이자 서예현이 당부를 줄줄 늘어놓았다.
“내가 맡기지 않은 재료 다듬지 말고, 괜히 네 식대로 레시피 변형하지 말고, 필수 재료를 다른 걸로 대체하려 들지도 말고, 알았지? 양념 계량 같은 것도 하지 마.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해. 요리할 때의 네가 곧 녹음실에서의 나야. 이해되냐?”
그 정도야 뭐. 내가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그 정도 주의 사항쯤은 잘 지킬 수 있었다.
매니저와 함께 예능 촬영이 진행되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여 PD와 제작진한테 인사를 하고 티비 화면 너머로 꽤 봐서 익숙한 스튜디오를 둘러보았다. 우리 말고도 우리와 오늘 경쟁할 출연진들 역시 스튜디오에 하나둘 도착했다.
그 사이 다른 팀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왔는지 서예현이 매우 침울한 얼굴로 대결 상대 팀 하나인 학생 팀의 스펙을 읊었다.
“우리 망했어. 쟤네 조리 고등학교 1학년 애들이래.”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조리고 학생들이 나오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럽니까, 형님. 미슐랭이나 호텔 셰프나 요식업 20년 차 식당 주인 안 나온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린 그저 저 학생들의 들러리가 되기 위해서 나온 거야. 하준이가 있었으면 비벼 보기라도 했을 텐데 이 조합으로는 저 학생들 결과물 올려치기 비교물밖에 안 된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에 휩싸인 서예현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고등학교 1학년이면 열일곱 살이네. 형님은 올해 스물다섯 살이고. 오우, 저 친구들한테는 형님이 거의 아저씨뻘 아닙니까? 아저씨가 학생들 견제하면 못 씁니다.”
“아저씨… 내가 무슨 아저씨야! 그리고 나 생일 안 지났으니까 만으로는 스물셋이거든? 한 해 지나면 다 같이 한 살 먹는 거 진짜 이상하다고.”
“그래, 동생. 나는 다 같이 한 살 먹는 나이로 센다. 그러면 나는 스물넷이고 너는 스물셋이니까 내가 형 맞지?”
“역시 한국인이라면 한국 나이로 세야지.”
서예현이 급격한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거참, 사람이 이렇게 줏대가 없어서야.
“뭐 하러 지금부터 만 나이로 세? 나는 서른 살부터 만 나이로 셀 건데. 굳이 지금부터 내 나이 깎아 먹을 필요가 있나?”
“하려면 일관성 있게 하든가. 서른부터 하는 목적이 너무 뻔히 보이잖아.”
“어차피 20대라고 우길 수 있는 거 딱 1년밖에 없습니다, 형님. 괜한 억측은 자제해 주십쇼.”
“아니, 그냥 30대 접어들면 나이 한 살 줄여 말해서 조금이라도 더 젊어 보이려고 그러는 게 짜친다고.”
“형님은 안 그러나 어디 한 번 봅시다. 5년 남았네.”
서로에게 딜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방금 전의 대화 주제였던 조리고 학생들이 우리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윤이든 맞죠? DTB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저 파이널 문자 투표도 했어요.”
“오빠, 저 데이드림! 데이드림 2기!”
이 친구는 데이드림 맞네. 저 친구는 DTB만 언급하는 걸 보니 우리 팬은 아닌 모양이고.
“오, 나랑 예현이 형 진짜 운 좋다. 스케줄 왔다가 이렇게 팬미팅도 하고. 우리 팬 견제했던 형님도 사죄의 의미로 싸인 한 장씩 해 주시죠. 아, DTB 재미있게 봤다는 친구는 여기 싸인 필요 없나요?”
서예현을 가까이에 끌고 오자 잠시 서예현의 얼굴을 보며 홀린 듯이 멍 때리던 학생이 쿡, 저를 찌르는 친구의 손길에 후다닥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데이드림 친구도 잠시간 넋을 놓는 걸 내가 봤다.
“아, 아니요!”
서예현과 눈도 못 마주치고 싸인을 받는 걸 보고 있으니 윤정아가 처음 서예현을 대면했을 때가 생각났다.
내가 아무리 DTB에서 그렇게 활약했어도 역시 원조 입덕 요정인가 뭔가는 못 이기는 건가.
“그런데 오빠, 이거 요리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데 왜 하준 오빠 말고 오빠가 나왔어요? 곤약 떡볶이랑 준따뚜이 생일상…”
“데이드림 나올 줄 알고 우승시켜 주려고?”
씩 웃으며 맞받아치자 팬이라던 학생이 입을 틀어막으며 제 친구를 퍽퍽 때려 댔다.
각각 두 장씩 사인을 받은 조리고 학생들이 멀어지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와… 야, 봤어? 실물 미쳤다, 진짜.”
“그니까. 나 순간 말 안 나왔어. 얼굴 미쳤네. 야, 카메라가 진짜 다 못 담는다. 너희 오빠 얼굴 진짜 미친 거 인정.”
DTB도 봤다면서, 나랑 대화도 더 했으면서 서예현 이야기밖에 안 나왔다. 얼굴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
왜 DTB에서 서바 참가한 래퍼들이 그렇게 나를 외모로 디스해 댔는지를 이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희들도 이런 기분이었구나.
서예현이 뿌듯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게 보여서 형진이를 비롯한 그 래퍼들의 심정이 더 와닿았다.
참으로 유감이었다.
내가 이 일을 DTB 시즌 4 촬영하기 전에 겪었다면 한 쌓인 만큼 내 빛나는 외모 디스 마음껏 하라고 파이트머니 디스전에서 복면 쓰고 나올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촬영 전에 다른 출연진들과 심사위원을 맡은 고정 패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손을 깨끗이 씻고 안전 준수 사항을 들은 후,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하는 건 재료 선택 순서 뽑기였다. 당연히 빨리 재료를 선택할수록 선택지가 넓어졌기에 좋았다.
내게 떠밀려서 공을 뽑고 온 서예현은 3번을 뽑았다. 어차피 요리는 서예현이 다 할 거라 세 번째라는 순서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순서를 모두 뽑고 나서 주제가 공개되었다.
【주제: 분식】
그래도 저번 주 주제를 피해서 다행이다. 저번 주는 중식이었거든.
볶음밥이랑 짜장면을 비롯한 요리 과정에서 기름을 한 국자 넣는 걸 보면서 서예현이 미쳤다고 기겁을 해 대던데, 나랑 서예현이 기름 넣는 양으로 싸우는 모습이 방송 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스튜디오 한쪽을 막고 있던 흰색 천이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천 뒤에 있던 재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번을 뽑은 학생 팀부터 재료 선택을 시작했다.
“분식하면 역시 떡볶이지. 형, 떡볶이 만들 줄 알아?”
방송이라 잠시 형님체를 집어치웠다. 서예현이 해탈한 얼굴로 내 말에 힘없이 대꾸했다.
“나는 그런 고칼로리 음식은 자신 없어. 한 번도 안 만들어 봤다고.”
그럴 것 같았다. 재료 본연의 맛만 나는 음식만 만드는 서예현이 속세의 맛을 구현해 낼 수 있을 리가.
이렇게 못 하는 음식이 많고 많으면서 서예현은 왜 자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까. 정말 이해가 안 갔다.
“형이 자신 있어도 못 하게 생겼다. 지금 떡 다 나갔어.”
우리 차례가 오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낸 가래떡 그릇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 팀과 직장인 팀도 경연 메뉴로 떡볶이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야, 윤이든. 분식이 떡볶이 말고 뭐가 있지?”
“하긴, 다이어트 음식만 평생 달고 살아온 형이 분식을 알겠어? 김밥, 튀김, 라면, 만두. 그리고, 음… 핫도그? 닭강정? 떡꼬치? 나도 기억나는 게 이 정도.”
다 나열해 봤자 라면 빼고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주제가 분식인 이상 서예현이 나보다 나은 건 불 조절뿐이었다. 튀김도 제로 기름으로 하겠다고 우길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튀김이 아니라 구이 아니냐고.
“라면만 끓여서 제출하면 우승은 물 건너가는 거겠지?”
사실 지금도 우승은 물 건너갔다.
다이어트 저칼로리가 주제라면 몰라도 지금 고칼로리만 있는 분식이 주제인데 나랑 서예현 조합으로 그걸 어떻게 만들어.
나는 서예현 보조(ex. 재료 건네주기, 필요한 조리 도구 건네주기, 버너 불 켜기, 타이머 남은 시간 알려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보조할 것도 없지 않은가.
“김밥 할까? 그런데 너 김밥 재료 보여? 나한테만 안 보이는 거야?”
“떡볶이 떡처럼 재료 다 털린 듯. 솔직히 떡볶이랑 김밥이 제일 무난한 분식이긴 하지. 라면만 끓이는 게 제일 최단 시간이긴 한데 그건 너무 성의 없으니까.”
점점 우리의 재료 선택 차례가 다가와 남은 재료를 쭉 훑었다. 재료를 가져가는 것도 제한 시간이 있어서 시간을 고민 따위에 지체하면 안 됐다.
떡볶이 양념에 정확히 뭐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춧가루와 고추장은 충분해 보였다. 양배추도 아직 남아 있었고. 어묵이야 뭐, 필수까지는 아니지.
그때, 눈에 들어온 재료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툭, 서예현을 쳐 집중을 모으고 혹여라도 아이디어를 스틸 당할까 염려되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