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444)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44화(444/4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44화
“아주 사탄이 따로 없네.”
김도빈조차 흔치 않은 질린 얼굴로 감탄사도 뺀 채 솔직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둘이 있어서 힘든 곳에 혼자만 있어야 한다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어, 뭐야. 왜 채널 또 끊겼지? 지하층 안 보이는데?
-와… 이렇게 소통을 또 잘라 놓네. 계속 연결해 줬으면 형들이 뭐라고 신호라도 줬을 텐데.
모니터 속 화면에서는 우리 지하실 생중계가 끊겨 당황스러워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비쳤다. 이런 젠장, 소통도 못 하게 만드네.
김도빈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남을게요, 형.”
오우, 무슨 영화 대사인 줄.
김도빈의 머리를 헤집으려다가 땀 때문에 축축해서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뭔 소리야. 내가 남아야지. 네가 내 형이냐?”
삐딱하게 묻자 말없이 눈만 굴리던 김도빈이 드디어 핑계를 찾았다는 얼굴로 냉큼 대꾸했다.
“여기서 제가 형의 형이냐는 소리가 왜 나와요. 저는 그저 장유유서를 실행하고 싶었을 뿐인데요.”
“막내한테 양보할 때는 네가 형이라서 양보했다고 안 했던가? 이 자식, 말 바꾸기 선수네? 너 이래 놓고 양보했으니까 나 보고 너 형이라고 부르라 하려고 그러지.”
“제가 형한테 형이라고 부르라 해도 어차피 형이 안 부르실 거잖아요.”
“왜 부정을 안 해, 인마? 진짜였냐?”
“장유유서에 의한 유교적 정신이라니까요!”
내가 올라가면 김도빈이 말을 바꿔서 자기가 남았으니 나 보고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무조건 내가 남아야 했다. 꼭 이거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고.
“어디 보자…. 우리 층 두 표, 1층 네 표, 2층 세 표, 이렇게 총 아홉 표니까 이건 동점도 안 나오겠네.”
기권표는 존재하지 않으니 일단 서예현과 견하준은 본인들의 표를 각각 두 선택지에 던져서 동점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나 2표, 김도빈 2표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표를 나한테 몰아주면 나 4표, 김도빈 2표.
하지만 여기에서 변수가 존재한다. 바로 홀로 3표를 가지고 있는 류재희다.
만약 표를 분산시킬 수 있다면 나한테 2표, 김도빈에게 1표를 던지든 나한테 1표, 김도빈에게 2표를 던지든 100%의 확률로 내가 당첨되겠지만 만약 분산시킬 수 없다면 50%의 확률로 내가 당첨된다.
김도빈한테 류재희의 3표가 오면 나 4표, 김도빈 5표로 김도빈이 남게 되니 말이다.
후자라면 류재희는 우리 둘 중 한 명을 확실히 남길 수 있는 결정권자나 다름없으니 어떤 선택을 하든 시청자들한테 욕을 들어먹을 수밖에 없다.
“2층에 전화 찬스 쓰자.”
김도빈이 점식 식사 시간에 전화 찬스를 쓰려고 했던 나를 말려서 매우 다행이었다.
김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빈이 싸이클을 밟고 있는 동안 2번을 눌러 류재희가 있는 최상층과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재희야, 혹시 표 분산되냐?”
-아니요. 무조건 한 명한테 세 표 던져야 해요. 제가 방금 해 봤는데 그러더라고요.
“나한테 세 표 다 던져라. 내가 남게.”
이렇게 되면 류재희한테 선택의 길을 제시해 준 건 바로 나니까 류재희가 선택의 대가로 욕을 들어먹을 일도 없지.
전화를 끊지 않고 잠시 침묵하던 류재희가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형, 혹시 층 바꾸는 미션 있으면 무조건 저 선택하세요. 알았죠? 잠잘 때만이라도 편하게 주무셔야죠.
이게 바로 효도 받는 부모의 마음인가. 막내한테 효도를 받고 있으니 갑자기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고 싶었다.
“괜찮으니까 거기에 잘 있어. 만약 도빈이 2층으로 올라가면 네가 잘 제어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막내가 바뀐 것 같았다. 이게 막내한테 넷째를 맡기면서 할 대사냐고.
“형, 만약 1층으로 올라가면 형들한테 티비 보지 말라고 할게요. 2층이면 막내랑 같이 가만히 있을게요.”
김도빈의 표정만 보면 이 순간이 지나면 영영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마지막 작별 모습이었다.
“형, 조금만 버텨요! 제가 봤을 때 분명 계속 한 명만 지하층에 남겨 두지는 않을 거 같거든요? 제가 내려오든 다른 사람이 내려오든 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힘내세요!”
그래, 도빈아. 네 촉 틀렸다. 뽑기 운은 좋으면서 왜 찍기 운은 없냐.
[투표가 종료되었습니다.] [투표 결과] [윤이든: 7표] [김도빈: 2표]역시 표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문이 열리고 나가는 순간까지 김도빈은 계속해서 침울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렸다.
나가는 길에 인형이랑 인형 눈이나 옆 싸이클에 올려 달라고 하니 열 개를 딱 맞춰서 올려 주는 모습에 소소하게 감동을 받았다. 드디어 얘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구나. 이전이었으면 그냥 무작정 집히는 대로 올려놨을 텐데.
조금 기다리자 1층을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에 김도빈의 모습이 나타났다.
-형들, 일단 티비 끄세요! 이게 지금 전기 잡아먹는 주범이에요. 이거만 꺼도 지하층에 있는 이든이 형이 싸이클을 덜 빡세게 돌릴 수 있어요.
김도빈은 1층으로 가자마자 TV를 끄게 만듦으로써 자기가 한 말을 충실히 지켰다.
-지하층 환경 너무 안 좋던데. 이든이 괜찮으려나?
-다음 미션에서 바꿀 수 있으면 우리가 내려가야지. 우리는 계속 1층에 있으면서 지하층 체험은 한 번도 안 했으니까. 막내도 처음에 지하 들어갔잖아. 맞지?
1층에서 나누는 대화는 악편 요소 따위는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답지 않게 머리를 너무 많이 썼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텁텁한 지하층 환경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김도빈이 이 지하층을 나갈 때 열린 문으로 잠깐 유입되었던 신선한 공기도 빠르게 오염되어 버렸다.
옆에 있는 싸이클 안장에 인형과 함께 올려놓았던 타블렛의 화면이 다시 켜지더니 내가 기다리던 그 특전이 떴다.
[지하층의 특전으로 탈출 키패드 비밀번호가 주어집니다.] [비밀번호: 4529] [1층과 2층의 탈출 키패드 비밀번호는 동일합니다.]이걸 김도빈한테 맡길 수야 없지. 그래도 김도빈보다는 내가 낫지 않은가. 특히 깽판 실력은 내가 훨씬 위였다.
내게 특전으로 주어진 탈출 키패드 비밀번호만 봐도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는 솔직히 빤히 보였다.
선택받은 사람이 빡쳐서 혼자 탈출하거나 이 비밀번호로 1, 2층을 쥐고 흔드는 그림을 바라는 게 말이다.
‘상황이 뒤집혔을 때의 인간의 본성’ 정도로 포장해서 나오겠지. 그렇게 상황을 몰아가 놓고 욕받이로 만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아오, 이런 류의 예능 섭외는 이제 받지 말라고 소속사에 단단히 말해 놔야지. 회귀 전 관계로 나갔잖아? 이거 촬영하고 다음 날에 레브 해체였어.
회귀 전 예능에도 그랬지만 투표로 지하층에 남아야 한다고 선택된 참가자는 저한테 투표한 나머지 멤버들에게 바짝 약이 올라 1, 2층을 제물로 바치고 자기 혼자 탈출했다.
남은 사람들은 밤새 탈출을 위해 잠들지도 못하고 머리 빠개지도록 굴리면서 미션으로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탈출했고 말이다.
심지어 그 멤버는 하필 계속 지하층에만 있었던 멤버였다. 투표에 이어 두 번째로 불화설 및 팬덤 싸움판 유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지.
“전화 찬스를 방금 써 버렸으니 위층에 있는 멤버들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건 불가능하겠네.”
아마 이번에도 내가 탈출하기 위해서는 1, 2층을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미션을 몰아갈 거니까.
하지만 나는 온전히 내 선택이기에 1, 2층에 있는 멤버들한테 화날 것도 없었다. 제작진들이 그 어떤 그림을 그리든 그걸 다 파괴해 줄 자신도 있었다. 깽판은 내 전문이었으니까.
이런 거 바라고 우리 섭외한 거 아니었어?
“일단 환기부터 하자.”
싸이클에서 내려와 이번 아이템 쟁탈전에서 딴 아이템인 환기 찬스권을 키오스크에서 터치하자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더니 공기청정기가 들어왔다.
차암 고맙게도 환기 명목으로 빈 그릇도 수거해 가 주고, 문도 10분은 열어 두었다. 물론 10분이 지나자 칼같이 닫혔지만 말이다.
텁텁한 음식 냄새와 꿉꿉한 땀 냄새가 가시니까 조금 살 것 같았다.
2층과 마찬가지로 지하층도 문 안쪽에 키패드가 있었다.
싸이클에서 내려 그 키패드에 특전으로 받은 비밀번호를 찍어 보았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내려보아도 무엇에 막힌 양 덜컥거릴 뿐이었다.
내 탈출을 유도하는 다음 미션에서 내가 탈출을 포기하면서 우애 좋은 그룹과 희생적인 리더 연출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혼자서 기다리긴 영 심심했다. 애초에 그룹 하나 구설수에 시달리게 하려고 작정한 것 같은 제작진이 원하는 어떤 그림도 만들어 주고 싶지 않고 말이다.
키패드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배터리나 건전지를 교체하는 곳이 따로 없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혹시 건전지가 아니라 외부 전원인가? 보통은 방전되면 설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건전지를 갈기 편하게 이쪽 부근에 건전지를 넣는 곳이 있을 만도 한데.
밑부분을 손가락으로 쓱 훑어보아도 걸리는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거 멈추면 여기 조명이 꺼지더라고요?’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싸이클을 넘기며 김도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한 번 실험해 볼 만하네. 만약 이게 내부 배터리로 작동되는 거라 시도가 실패하면 정석 방법인 플랜 B로 넘어가면 되는 거고.
실패든 성공이든 내게 해가 될 만한 건 없으니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싸이클로 돌아가지 않고 문고리를 계속해서 잡고 문 앞에 서 있으니 곧 조명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1층과 2층의 모습을 보여주던 모니터가 제일 먼저 픽- 꺼졌다.
그다음으로 조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팍, 꺼졌다. 온통 어둠으로 물들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 눈이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다시 키패드로 시선을 돌리자 키패드 가장 상단에 작게 들어와 있던, 잠김을 알리는 빨간불이 꺼져 있었다.
지하층의 정전으로 키패드 역시 꺼진 것이다. 아마 패스워드도 자동 해지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시험 삼아 문고리를 살짝 내려보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역시 살면서 가끔은 지름길도 필요한 법이다.
방송이라 중지를 올릴 수는 없었기에 문 손잡이를 잡고 씩 웃으며 한때 줄줄 외우고 다녔던 영화 명대사를 내뱉었다.
이 상황에 제일 걸맞는 그 영화의 대사를.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걸리는 것 없이 문고리가 부드럽게 내려가며 문이 활짝 열렸다. 미션도 건너뛴 지하층 최단 시간 탈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