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47)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47화(47/475)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47화
결국 라면은 한 젓가락밖에 먹지 못하고, 속이 안 좋아졌다는 핑계로 라면을 싹 버린 후 숙소로 돌아왔다.
이 와중에 입 안으로 넣은 면을 안 뱉고 삼켰다고 또 초심도 깎더라.
숙소로 돌아오자 제 방문을 벌컥 연 류재희가 방 안에서 우렁차게 외쳤다.
“형, 매니저 형이 모레 팬사인회 있다고 전해 달래요!”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막내야.”
저 녀석은 그 좋은 성량을 왜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팬사인회라니, 벌써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팬 사인회를 할 때마다 초심을 되찾고는 했다.
이게 뭔 소리냐, 그냥 무슨 멘트를 쳐야 할지 모르겠는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소리다.
습관처럼 내뱉은 ‘아, 진짜요’는 금지어가 되어 버렸으며, 조금만 성의 없는 대답을 하거나 멍 좀 때리면 득달같이 고통을 주며 초심도를 깎아 대는 극악무도한 시스템 때문에 회귀 전처럼 건성건성 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제는 ‘아, 진짜요’의 대체어인 ‘아, 정말요’가 있으니 이번 팬사인회의 나는 무적이다!
실실 웃고 있자 힐끔 나를 돌아본 서예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저 인간이 바로 ‘아, 정말요’의 존재를 말해줌으로써 내가 되지도 않는 유학생 콘셉트를 포기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기에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너는 그 습관성 아진짜요. 좀 어떻게 해 봐. 지난번 팬싸에서 네가 아진짜요 할 때마다 옆에 있던 내 심장이 다 철렁거렸다고. 실시간으로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니까?”
“이번에는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참, 형 팬사인회 자리는 나랑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해 달라고 할게. 수명 줄어들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
나름 사이좋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언제 왔는지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류재희가 우리 들으란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형들은 혹시 하루라도 안 싸우면 입안에 가시가 돋으시나요?”
“우리가 언제 싸웠는데?”
“맞아, 우리 싸운 적 없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거드는 서예현을 상당히 짠한 눈길로 바라보며 류재희가 한탄했다.
“결국 예현이 형이 이든이 형의 저 화법에 적응해 버리셨구나…… 이든이 형, 제가 말했잖아요. 불화설 안 나려면 형이 져 주는 모습 보여야 한다니까요?”
“여기 지금 카메라 켜져 있던가? 그건 방송용 컨셉이고, 내가 카메라 밖에서도 져 줘야 하는 이유가?”
“형, 혹시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 알아요? 습관이란 게 되게 무서운 거거든요.”
한마디도 안 지는 류재희의 말에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문질렀다.
하긴, 팬사인회에서 아진짜요로 대답하는 것도 습관이긴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설렁설렁하게 임했더라.
30명만 와도 많이 채운 망돌 시절의 몇 번 안 되는 팬 사인회에서는 나름 길게 대답해 주면서 팬들과 제법 화기애애한 대화도 나누었다.
아이돌 팬사인회에서 아진짜요는 죄악이라며, 불신지옥을 외치는 광신도처럼 눈을 부릅뜨고 말하는 막내에게 공감하는 대신, 코웃음을 치게 된 건 서예현 직캠으로 역주행하고 처음으로 100명을 꽉 채운 팬사인회를 열었을 때였다.
누가 봐도 서예현만 보러 왔다는 걸 티 내는 이들의 건성 어린 물음에 점점 지쳐서 나 역시 건성으로 대답하던 게 입에 붙어 버렸을 때.
그때는 합리화했지만 내가 성의 없이 내뱉은 아진짜요를 얼마 안 되는 내 팬 역시 들었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다시 강제로 데뷔 초로 돌아와서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붙이는 팬들에게 습관적으로 아진짜요를 붙이다가 초심도를 20점이나 깎인 걸 회상해 보니, 정말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는 류재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이든이 형이 팬싸 불문율인 아진짜요를 계속 입에 올리시길래 이번에는 예행연습 좀 시켜드리려고요.”
그리고 내가 동의하기도 전에 류재희는 대뜸 볼을 손으로 감싸며 팬에 빙의했다.
“저 오늘 이든이 형 보려고 학교도 빼먹고 몰래 왔어요!”
“아, 정말요?”
역시나 몇 번 확인해 본 대로 초심도는 깎이지 않았다.
정말 할 말이 그게 전부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아하하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도 학창 시절에 학교 몇 번 빼먹어서 개근상 못 탔는데 저랑 동지 되시겠네요.”
굉장히 미묘한 표정이 된 류재희가 다음 멘트로 넘어갔다.
“이번 노래도 너무 잘 듣고 있어요. 노래 너무 좋아요.”
“아, 정말요? 취향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우리 레브 노래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무난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묘한 얼굴을 한 류재희가 요구했다.
“애교 한 번만 보여 주세요!”
“아, 정ㅁ…….”
습관이라는 건 참으로 무서운 거였구나.
대답을 요하지 않는 말에도 습관적으로 붙인 아 정말요를 자각하며 말끝을 흐리자 류재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형. 굳이 ‘아, 정말요’를 앞에 꼭 붙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안 하면 뭔가 심심하다 해야 하나.”
“그런데 왜 애교 보여 달라는 요구에도 아 정말요 하고 있어요? 이건 더 이상 심심함의 문제가 아닌데요.”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거더라. 그런데 재희야, 너 지금 나한테 화내냐?”
새파랗게 어린놈이 스물일곱까지 찍고 온 형한테 눈을 시퍼렇게 뜨고선 따박따박 캐묻고 말이야, 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극상에 혀를 차고 있자, 띠링- 이제는 들리면 불안한 소리가 울렸다.
이런 타이밍에 저 소리가 들리면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금지어에 ‘아, 정말요’가 추가되었습니다.]이런 시발.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급의 내용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인마! 너 때문에……! 네가 팬싸 예행연습만 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대체어까지 금지어가 되어 버리다니! 그러면 생각 없이 하는 대꾸는 이제 뭐로 하라는 건데!
차마 초심도 깎일까 봐 멱살은 쥐지 못하고 류재희의 어깨만 붙들고 흔들어 대자 류재희가 힘없이 짤짤 흔들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사람이 도와줬는데 갑자기 뜬금포로 왜 이러시는…… 형, 울어요?”
“울고 싶다, 이 자식아!”
팬싸 이틀 남았는데 대체어를 또 어떻게 찾냐. 이번에도 초심도 20점 깎이고 다시 회귀하는 거 아니냐고.
* * *
김 모 양은 팬사인회가 열리는 행사장의 관객석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카메라를 세팅하고 포스트잇의 글씨가 혹여 번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필 <내 우주로 와> 활동 때의 팬사인회 이후에 입덕했기에 김 모 양이 레브의 팬사인회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한 장 컷이었다는데.’
이번 팬사인회를 위해 앨범값으로 30만 원을 긁은 김 모 양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오른 팬싸 컷은 우리 애들이 이만큼이나 컸다는 걸 방증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는 곧 아쉬운 감정을 지우고는 뿌듯하게 웃었다.
지난 활동 팬사인회는 50명을 겨우 넘겼다고 했는데, 이번 팬사인회는 인원 100명을 꽉꽉 채웠다.
대포 카메라를 들고 온 홈마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팬사인회 시간이 되자 레브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Dream of me! 안녕하세요, 레브입니다!”
지난주 무대 의상 중에서 제일 호평을 받은 복장을 입은 레브 멤버들이 무대 위에 놓인 테이블 앞에 서서 우렁차게 인사했다.
그에 화답하듯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은발 이든! 야구점퍼 이든이!’
과잠을 연상시키는 야구점퍼 때문일까, 하이틴보다는 풋풋한 대학생에 가까워 보이는 윤이든을 보며 김 모 양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 댔다.
인사를 마치고 멤버들이 착석하기 무섭게 김 모 양은 멤버들이 앉은 순서를 스캔했다.
윤이든-류재희-견하준-김도빈-서예현순이었다. 예현이 첫 번째, 이든이 제일 마지막 순서였다.
인고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녀를 처음 레브에 입덕하게 만든 멤버, 서예현이 살짝 웃으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마치 개안하는 듯한 그 미소에 그녀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했다.
‘……역시 레브 비주얼 겸 입덕요정.’
섬세한 이목구비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또렷해 보였다.
사진이 그의 외모를 다 못 담아낸다는 걸 이렇게 확인할 줄이야.
사진발 아니냐고 깎아내리던 놈들에게 실물 한번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앨범에 사인을 받고 질문이 적힌 포스트잇을 내밀자,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으로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서예현의 말재주는 막 좋다고 할 수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충분히 웃음이 나오고 즐거웠기에, 첫 번째 사인을 마친 그녀는 기분 좋게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아, 안녕하세요.”
제 앞으로 열 명이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김도빈의 얼굴을 보고 김 모 양은 꾹 웃음을 참았다.
주객전도의 모양새였지만 김 모 양은 k-pop 덕질 10년 경력을 살려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제일 친한 건 아무래도 재희죠? 제일 멋있는 멤버는…… 이든이 형!”
“예현이 아니고?”
“외모만 봤을 때는 예현이 형인데 종합 능력치를 따져 보자면 이든이 형이 우세하죠. 스탯을 하나에만 몰빵하냐, 고루 찍냐의 차이인데 역시 그래도 균형을 맞추는 게 능력치에 유리-”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그녀가 내민 포스트잇에 체크를 시원하게 그리며 종알종알 대답하는 김도빈은 낯가림을 끝내고 사람에게 치대는 리트리버 그 자체였다.
“다음번에는 꼭 프로다운 모습 보여드릴게요!”
“그래? 그럼 다음번에도 도빈이 보러 와야겠네.”
“진짜요? 약속!”
도빈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그녀는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견하준이 눈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진짜 배우상이네.’
한 3-4년 차에는 드라마에 캐스팅당하여 연기에 도전한다는 기사를 본다는 것에 그녀는 레브의 데뷔앨범을 걸 수 있었다.
견하준은 말수가 적다는 평을 듣는 멤버답게 차분하고 어조 역시 조곤조곤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하고 계속 웃어 주는 거나, 질문에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는 게 눈에 보이는 점.
포스트잇과 앨범 사인 밑의 p.s를 다른 멤버들의 두 배 분량으로 적어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다음은 유제였다.
바로 다음 순서가 이든이라는 게 김 모 양에게는 중요했지만, 유제가 입을 열자 그 점은 폭풍처럼 휩쓸려 날아갔다.
“안녕하세요!”
해맑게 인사한 유제는 앨범에 사인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 나이, 레브에서 누가 그녀의 최애인지, 이번 앨범에서 어느 노래가 좋았는지까지 눈 깜짝할 새에 털었다.
온갖 깜찍한 애교는 덤이었다.
그야말로 10년 차 프로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다. 7년 차에 접어들었던 그녀의 구 돌들도 이렇게 능숙하지 못했는데 갓 데뷔한 애기가…….
“또 봐요, 누나!”
“그래, 또 보자.”
아이돌의 별 밑에서 태어난 것 같은 유제의 차례까지 마치자 드디어 김 모 양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의 최애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