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503)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03화(503/509)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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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말 시상식까지 숨 가쁘게 달린 우리한테는 잠깐이나마 숨 돌릴 만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지만 말이 휴식 시간이지, 나는 중요한 일을 해야만 했다. 바로 LnL 직속 후배 그룹을 위한 데뷔곡 편곡.
LnL을 여기까지 어떻게 키워 놨는데 우리 바로 다음 대에서 망하면 되겠는가. 회귀 전에는 후배들이 망돌 신세는 면했지만 그렇다고 팍 뜬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멤버 구성도 확 바뀌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래도 그룹명은 회귀 전이랑 똑같더라.
후배 걸그룹의 데뷔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데뷔곡 편곡이냐.
이유는 간단했다. 데뷔앨범 수록곡이 타이틀곡보다 좋은 비극이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이게 바로 평행이론인가.
이제 후배 보이그룹까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 이건 LnL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로 굳어지게 생겼군.
이건 대표님의 감을 탓하기도 그런 게, 데뷔곡을 먼저 받아서 연습을 계속하고 데뷔일이 확정되며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록곡을 채워 넣고 녹음하다가 재발견을 한 거라서 약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는 <내 우주로 와>로 타이틀곡 활동을 하고 로 후속곡 활동을 하는 걸로 타협을 봤지만, 후배 그룹은 데뷔 전에 타이틀곡을 바꾸는 걸 강력하게 밀고 나간 거였다.
심지어 후배 그룹의 타이틀 내정곡은 <내 우주로 와>랑은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괜찮은 퀄리티였음에도.
이게 바로 세대 차이인가. 요즘 애들은 참지 않는다니 정말인가 보다.
다소 변명 같기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소속사가 망해서 데뷔도 못 할까 봐 바꾸자는 말을 차마 못 한 것도 있었다.
아니, 우리하고 상의를 하기도 전에 그 부족한 직원 수로도 콘셉트에 의상에 뮤비 스튜디오에 안무에, 아무튼 발도 빠르게 싹 잡아 왔는데 어떻게 그 재정에 엎자고 말을 할 수 있겠냐고. 일단 데뷔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어쨌든 이쪽은 소속사 재정 상태나 규모가 그때와 다르기도 하고 컨포 촬영도 뮤직비디오 촬영도 아직인 터라 그나마 데뷔 전에 갈아엎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새로이 타이틀곡이 된 수록곡의 다이나믹이 약하다는 이유로 결국 편곡을 부탁받게 된 것이다.
사실은 지원이 형한테 부탁해서 떠넘기고 나는 휴가를 즐기려고 했는데 지원이 형이 한발 먼저 하와이로 떠나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도맡게 됐다.
[니텐스_(변경)데뷔곡_데모.mp3] [니텐스_(변경)데뷔곡_Inst.mp3]건네받은 USB에 든 바뀐 타이틀곡 파일을 열어서 먼저 감상 타임을 가졌다. 멜로디는 좋긴 한데 확실히 곡이 클라이맥스 없이 단조로워 인상 깊게 남는 부분이 없었다.
“혹시 원하는 편곡 방향이라도 있어요?”
다섯 명을 돌아보며 질문하자 내 물음에 후배 그룹 리더가 대표로 바로 대답했다.
“말로만 전달드리면 제대로 전달이 안 될까 봐 USB 안에 저희가 저희 데뷔 컨셉이랑 저희가 이 곡에서 바꾸고 싶은 부분, 방향성 등을 PPT로 작성해서 정리를 싹 해 놨습니다.”
일단 내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본인들의 의견을 곡에 녹여 내는 것부터 높게 봐줄 만했다.
똑소리 나는 답변만큼이나 PPT의 구성 역시 똑소리 날 정도로 깔끔했다. 우리가(정확히는 김도빈이) 데뷔 초에 대표님을 설득한다고 만들었던 보노보노 PPT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독성 미쳤네.
편곡 방향 설명 역시 전문 음악 용어를 써서 설명하지는 않았어도 두루뭉술하지 않고 방향성을 정확히 짚어 주는 덕에 이해하기도 편했다.
“원하는 대로 이지리스닝보다 다이나믹하게 가고 싶으면 43초 부분부터 시작하는 브레이크는 유지하는 게 나을 텐데. 브레이크를 빼면 곡이 지루해지니까, 빌드업 쌓고 후반부를 좀 더 리드미컬하게 손보는 게 후배님들이 원하는 방향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네. 아니면 브레이크 부분을 리듬섹션으로 바꿔도 되고.”
“실례가 안 된다면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신 편곡 버전 한 번씩 들을 수 있을까요?”
“말로 열 번 설명 듣는 것보다 노래 한 번 듣는 게 낫죠. 브레이크 뺀 거, 브레이크 유지하고 후반부 손본 거, 리듬섹션으로 바꾼 거, 세 경우 다 들려줄 테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자기들끼리 토론하며 편곡 과정에 참여해 가는 후배들의 훈훈한 모습을 보니 과거의 레브가 생각나 괜히 빡쳤다.
시바, 나는 후속곡 하나 미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회의 한 번 하는 것도 수많은 반발을 거쳐야 했는데.
작사, 작곡, 프로듀싱도 내가 혼자 수면 시간을 바치고 수명까지 깎여 가면서 다 했는데!
나는 시발 이렇게 대신 곡 편곡해 줄 능력자 선배도 없었는데! G1이라는 인맥도 물론 준범 형 도움도 크긴 했지만 내가 내 능력치를 선보이면서 뚫은 건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멤버 놈들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 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시 데뷔 초로 회귀하면 기필코 선(先) 감사 인사를 받아내고야 말겠다.
그래야지 다시 해야 하는 그 개고생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다. 분업이 참으로 잘 되는 후배들의 화기애애한 장면을 앞에서 보니까 더더욱.
수정을 원하는 부분을 하나하나씩 짚어 주며 이상과 현실을 잘 조율해 가며 편곡하니 새로운 데뷔곡은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물로 탈바꿈했다.
“와, 그 곡 맞아? 멜로디는 있는데 완전 다른 곡 같아. 대박.”
“유월이가 적극적으로 의견 내자고 해서 다행이다… 원래 데뷔곡에서 몇 단계가 업그레이드된 거야?”
중간 완성본을 듣고 상기된 얼굴로 감상평을 쏟아내는 후배들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왕이면 멋있고 본인들 마음에 들고 성적 잘 나올 만한 데뷔곡으로 데뷔하는 게 낫지. 데뷔곡이 언금이 되는 경험은 우리가 겪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데뷔 활동의 후속곡은 아무래도 데뷔곡보다 감동이 덜하니까.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90도로 허리 숙이는 후배들을 향해 꼭 잘 되라는 덕담 몇 마디 던져 주었다.
이 곡이 잘되면 편곡으로 이름을 올린 나한테도 돈이 들어오니까 잘 되어야지, 암암.
이 모든 작업 과정을 작업실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류재희가 짝짝짝, 박수갈채를 보냈다.
“오랜만에 멋있었어요, 형.”
“오랜만? 그러면 평소에는 안 멋있었다는 소리냐?”
류재희에게 가볍게 헤드록을 선사해 주며 투덜거렸다. 이제는 목 마사지를 빙자하지 않아도 초심도가 깎이지 않았다. 참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도 우리 후배들은 우리보다 나은 환경에서 데뷔하네요. 원래 내정된 데뷔곡도 들어 보니까 나쁘지는 않던데. 진짜 <내 우주로 와> 처음에 들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안 잊히잖아요.”
“이 자식, 은근슬쩍 말 돌리는 거 봐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도 시간을 돌아왔음에도 그날의 기억만큼은 선명한 걸 보면 그게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보다.
“기왕 쉬는 김에 솔로 앨범 컨셉 의견이나 내 봐라. 최대한 맞춰서 곡 짜 줄 테니까.”
내 말에 류재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키워드를 쏟아냈다.
“발라드! 성숙! 청량! 봄 아니면 여름 감성! 계절 감성은 발매되는 날짜 맞춰서!”
아직도 변한 본인의 모습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미련을 놓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본인을 햄스터로 꼬박꼬박 지칭하는 걸 봤을 때는 당연히 큐티 콘셉트를 원할 줄 알았는데 꽤 의외였다.
저 녀석 얼굴을 보면서 큐티 콘셉트의 곡을 쓰다가 인지부조화가 와서 3차 슬럼프가 올까 봐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봄과 여름 감성은 내 기준으로 제법 큰 차이가 있기에 먼저 발매 날짜부터 확정하고 곡 콘셉트를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형도 정규 솔로 앨범 준비한다고 안 했어요?”
“솔로니까 릴레이로 가면 되지. 너 먼저 나왔다가 들어가고 그다음에 바로 바톤 터치 받아서 나 들어가고. 그리고 하반기에 레브 컴백하고. 일정 딱 좋네.”
하반기에 월드투어도 잡혀 있긴 했지만 일단 솔로 활동 두 번과 단체 활동 한 번은 확정이었다. 노인정 들어가기 전에 2천만 명을 채우려면 갈려야지 어쩌겠는가.
“아니 제 말은, 동발이나 겹치는 게 걱정되는 게 아니라 형 솔로 앨범이랑 레브 단체 앨범도 준비하면서 제 것까지 준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고요.”
“정 힘들면 네 솔로 앨범은 타이틀곡만 하지, 뭐. 어차피 내 솔로 앨범은 틈틈이 작업해 놔서 벌써 트랙에 아홉 곡 채워 놨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헐, 그러면 한 곡만 더 채우면 돼요?”
“아니, 네 곡. 총 13곡이거든.”
첫 솔로앨범인 만큼 모든 트랙은 기왕이면 온전히 내 힘으로 채우고 싶었다. 피처링도 굳이 넣지 않았다. 피처링은 2집에 몰아서 넣을 예정이다.
이건 정규 2집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였다. 회귀 전에 상상만 해 놨던, 하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실제로 실행하지는 못했던.
대상에 이어서 회귀 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 하나를 더 이룰 시간이었다.
레브의 곡과 별개로,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고 있던 내 음악이었나. 드디어 세상에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 * *
“다음 달 26일에 해외 스케줄 잡힌 거 있어?”
차연호의 질문에 스케줄을 체크한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브리핑했다.
‘…이번에도 그때랑 그대로 되려나.’
과거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스케줄이었지만 당시 겪었던 사고까지 똑같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원태혁이 당했던 만큼의 부상을 그가 당할지도 미지수였고 말이다.
멤버, 원태혁이 다치지 않길 바라 스케줄이 있어도 무조건 미루고 시간대를 바꾸며 벗어났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는 시간대에 실험이라도 해 볼 걸 그랬다.
똑같은 사고가 일어나는 게 맞는지. 사고를 당하는 멤버가 바뀌면 부상 정도도 달라지는지.
원태혁을 보며 무심하게 사고를 이어 나가던 차연호가 흠칫했다.
‘이건 뭐, 멤버들이 거리 둔다고 이제 원망도 못 하겠네….’
씁쓸한 미소가 잠시간 차연호의 입가에 스쳤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