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510)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10화(510/52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10화
“사실 이번 주 팬사인회를 끝으로 1집 활동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는데…”
투머치한 운을 끌어 쓴 덕분인지 원래보다 음원 순위가 다섯 칸이나 더 오르게 만든 대표님은 꽤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저 입에서 나올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3주 활동으로 가기로 했다.”
저 말도 두 번째 들으니까 그래도 처음보단 충격이 덜 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이 소속사가 미래가 있는 게 맞나 진지하게 고민에 빠질 정도였는데. 과거의 나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듯 심각해진 얼굴의 서예현이 슬쩍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서예현이 먼저 나서다니. 이거 설마 큰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ㄴ]아니란다. 다행이었다.
“대표님, 죄송한데 3주 활동이면 거의 사흘 만에 새 안무 짜고 연습하기에 조금 많이 빠듯한 것 같은데요. 연습 기간 일주일은 활동 기간에 안 넣으신 거죠?”
마지막 말은 최대한 좋게 해석해 보려는 서예현의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그렇구나, 서예현은 아직 대표님을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있구나. 그럴 만도 하지.
“새 안무를 왜 짜? <내 우주로 와> 안무가 마음에 안 들어?”
“설마… 그 3주 활동이…”
“당연히 타이틀곡인 <내 우주로 와>로 해야지. 지금 새 곡 받아오기는 예현이 네 말마따나 시간이 조금 많이 빠듯하잖아?”
대표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그 말이 아니었다고 서예현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김도빈이 나를 돌아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였다. 저건 내 혜안에 감탄한 게 아니라 나를 회귀자로 확정 지을 증거를 하나 더 발견한 눈빛이다.
오타쿠한테 수상하게 보이지 않고 미래 지식 활용하는 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차트인한 곡이 있는데 굳이 주목도 못 받은 곡으로 한 주 더 활동하는 의미가 있나 해서요.”
LnL의 낙하산 견하준이 드디어 나섰다.
“맞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물 빠지고 노 저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류재희 역시 소심하게 말을 거들었다.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잠시간 코끝이 찡했다.
이럴 수 있었는데 왜 그때는 내가 혼자 탱킹하게 내버려둔 거냐, 이 자식들아.
다 같이 후속곡 활동을 밀자 대표님이 진지한 표정이 되어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은 후속곡 활동을 하고 싶다는 소리지? 그런데 지금 여건이…”
“대표님이 그런 고민을 하실 줄 알고 저희가 준비해 왔습니다.”
대표님 사무실에는 빔프로젝터도 스크린도 없었기에 노트북을 펼쳐 우리가 1시간 50분 동안 열심히 만든 PPT를 선보였다.
“여기 이 페이지를 보시면 데뷔곡보다 후속곡이 더 주목받아서 치고 올라갔던 아이돌 그룹들 사례를 보실 수 있거든요. 지금 엄청 뜬 이 그룹도 저희처럼 데뷔곡이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데뷔곡 활동 끝나고 바로 활동 시작한 후속곡이 떠서 다음 앨범도…”
이번에는 좆같은 보노보노 따위는 없었다. 대학 발표 과제 짬밥이 있던 서예현의 주도로 인터넷에서 템플릿을 다운받아 제법 PPT 같은 PPT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보노보노 PPT는 대표님의 미감에 들어맞았을지는 몰라도 내 미감에서는 한창 벗어나 있었기에 지금이 딱 좋았다. 전문성 있어 보이고, 어?
그렇게 완성된 PPT는 우리 직속 후배 그룹이 들고 온 PPT급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SNS에서 그냥 K-POP 팬인 척 무기명 투표로 진행한 건데요, ‘곡 활동이 망하면 빨리 끝내고 더 나은 후속곡으로 돌아오는 게 낫다’가 100%로, ‘컴백한 거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길게 해 줘라’를 압도적으로 이긴 걸 볼 수 있습니다.”
급하게 만들어 팔로워 하나 없는 깡통 계정이라 모집단이 우리를 포함해서 2명인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내 우주로 와> 활동을 2주로 단축하고 후속곡 활동을 일주일 건너서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안무는 저희가 오늘부터 준비해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딱 일주일간 맹연습하고 무대 꾸리기에 충분하죠. 무대 의상은 정장으로 통일하고요.”
“맞아요, 안무는 하루 만에도 만들 수 있어요.”
김도빈이 우리의 후속곡 활동 계획 설명에 힘을 보탰다.
이로써 이제 우리 그룹도 우리 직속 후배 그룹처럼 똑 부러지는 대처를 한 그룹이 되었다. 이런 건 시스템이 덮어쓰기를 할 때 알아서 과거의 개판은 삭제하고 이 똑 부러진 모습을 살려 줄 거라 믿는다.
사실 너무 부러웠다.
“그래, 한번 해 봐라.”
PPT 발표가 끝나자 흔쾌한 긍정의 답이 떨어졌다.
길고 열정적이었던 내부 회의가 무사히 끝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다들 한시름 놓은 듯한 숨을 내쉬었다.
“으아아… 원찬스 두고 내우주로 1주일 더 할까 봐 마음 엄청 졸였네.”
“이게 두 시간 만에 결정된 거라니, 얼떨떨하다. 나 진짜로 일주일 만에 안무 익힐 수 있겠지…? 좀 쉽게 가면 안 될까…?”
그때는 분위기가 엄청 험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크루 형들한테 털어놨다가 내 잘못이라는 잔소리만 한 바가지 듣고 술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었지, 아마.
안무를 쉽게 가면 안 되냐는 서예현의 말도 요령 부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 줄이야. 오디 때문에 그런가, 서예현한테 퍽 관대해진 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의문 하나가 들었다.
기억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미래가 바뀌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런데 어째서 멤버들도 기억을 가지고 함께 회귀했던 그때의 기억들은 돌려주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시도할 생각도 못 하고 실패만 거듭 이어갔던 첫 번째의 기억만을 가진 채로만 헤쳐 나가게 한 거지?
두 명이 과거의 기억을 가진 시간선이라 1회차의 기억보다는 훨씬 쓸모 있었을 텐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게 득보다 실이 더 많았나?
이제는 시스템이 내게 못 할 짓을 하는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그런데 안무는 형이 이틀 만에 다 짤 수가 있어?”
우리의 미래가 달린 만큼, 걱정 어린 류재희의 물음에 김도빈이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이든이 형이 많이 도와줄 거야. 그렇죠, 형?”
“내가 왜?”
김도빈의 저 굳은 회귀 믿음을 깨부숴 줄 아주 절호의 기회다. 옛날 수준의 싸가지까지 가감 없이 보여주자 눈을 깜빡이던 김도빈이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야 형은… 원찬스 안무 다 아는 거 아니었어요?”
“이든이가 두 시간 만에 안무를 어떻게 짜겠어. 전문 분야가 다른데.”
김도빈이 나한테 다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견하준이 한소리 했다. 내가 회귀했다는 김도빈의 굳은 믿음을 모르니 견하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혹시 안무가 달라지는 것도 큰 흐름의 변화냐?’
[ㄴ]아니란다. 더욱 마음 놓고 김도빈에게 미룰 수 있었다.
눈을 굴리다가 멤버들을 한 번 돌아보고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김도빈이 나를 향해 마구 손짓했다.
단둘이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김도빈이 나를 재촉했다.
“형, 원찬스 안무 다 알죠? 그렇죠? 맞죠?”
“내가 아는 원찬스 안무가 어디 있어, 인마. 지금부터 만들어야지.”
“단 둘뿐이니까 마음 놓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형. 안무 다 알고 계시죠? 그래서 하루 하고도 반 만에 안무 짜자고 한 거죠?”
안무를 모를 때도 너는 하루 하고도 반 만에 안무를 다 짰단다, 도빈아. 그러니까 남의 미래 지식에 기대어 꿀 빨 생각 그만하고 일을 해라, 인마.
“너 진짜로 그 헛소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냐? 헛소리 좀 제발 그만 해라, 이 오타쿠 자식아! 뭔 놈의 회귀는 회귀야! 내가 웹툰인가 웹소인가 아무튼 그런 것 좀 작작 보랬지!”
선택지 1을 뒤늦게나마 김도빈한테 선보여 줄 수 있어 매우 기꺼울 따름이었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김도빈이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래 지식에만 의존하면 능력치를 쌓지 못하니까 이럴 때 빡세게 능력치를 쌓으라는 형의 큰 그림이구나! 오케이, 제가 최대한 메인으로 짜 볼게요.”
아니, 그냥 회귀 의심 피하려고 너한테 다 미루는 건데.
대체 무슨 소설을 읽으면 사고방식이 저렇게 흘러 가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1차 시도, 실패.
* * *
사고가 난 지 며칠이 지났을까. 몇 달, 몇 년을 거치는 기억 속 세상에선 시간 감각이 없었다.
그의 트리거, 권정준의 장례식, 미쳐 살던 과거의 기억.
무의식 속, 차연호가 천천히 밟고 있는 길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살한 연습생의 신상은 알 길이 없었다. 알려고 하지 않고 기어코 눈을 돌렸던 자가 치러야 하는 뼈저린 대가였다.
과거를 보고 있다는 건 시스템을 떨쳐 내려 했던 마지막 시도도 실패했다는 건가.
그가 세운 가설이었다. 시스템은 무의식에 빠져 있을 때는 그를 조종하지 못한다. 그러니 시스템을 양도하고 깊은 무의식에 빠지면 돌아올 숙주를 잃은 시스템은 소멸할 것이다.
어차피 윤이든은 제가 양도한 시스템을 몇 번이고 막아내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그가 알 수 없었던 건 사고 당시의 상황이었다. 원태혁의 혼수상태가 제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던 권정준을 온몸으로 막은 결과일 줄은 차연호 그마저도 몰랐다.
시스템의 양도와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의 모습을 눈에 담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몸을 던짐과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암전. 어제 있었던 일마냥 지독히도 선명하게 재현되는 과거의 기억.
죽은 권정준이 아니라 죽음을 목전에 둔 권정준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친구의 자살 시도를 눈앞에서 목격한 차연호의 트리거였다.
키워드와 더불어 기억을 되찾는 트리거.
아마 윤이든의 트리거는 그의 사인을 따라 수면제 과다 섭취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알코올과 함께 수면제 과다 복용이려나.
어느덧 짙은 향 냄새가 다시 또 코를 스쳤다.
생각하자마자 귀신같이 재현되는 기억이라니.
영정 사진 속의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차연호는 메마른 비소를 내뱉었다. 그 당시에도 느낀 거지만 정말로 흰 국화꽃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