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lank Slate Regression for the Idol That Lost His Original Mindset RAW novel - Chapter (57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76화(578/579)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576화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여 오던 목소리가 아닌 잔뜩 날이 선 목소리는 제법 낯설었다. 하지만 또 완전히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역시 과거 기억 때문인가.
-그게 왜 궁금하냐고요.
-씨발, 야! 권정준! 폰 안 내놔?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이냐고!
재차 대답을 독촉하는 목소리 뒤로 차연호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우리로 상황을 치환해 보자면 견하준이랑 내가 사이좋게 주먹 한 대씩을 날리고 있던 그때 정이서한테 전화가 온 건가?
내가… 낙하산…? 내가… 포메수인…?
혼자 생각해 놓고 홀로 셀프 타격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푸른색 상태창이 보였다.
[‘기억의 파편(28)’이 주어집니다.]오?
케이제이와의 전화 한 번에 기억의 파편 하나라.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억의 파편이 나온 덕분에 갑자기 취조받는 이 상황에 대한 불쾌감도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래서 내 평소 성격대로 들이받는 대신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부드럽게 되물었다.
“왜 궁금한지는 왜 물어보시는 거죠?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그게 왜 궁금하세요?”
수화기 너머의 케이제이가 침묵했다. 본인도 이유를 모르면서 나한테 물어보려고 해?
“그러고 보니까 같은 신월 소속사라 케이제이 선배님도 잘 아시겠네. 기왕 전화 대신 받으신 김에 대답도 대신해 주시면 되겠다. 그쪽 소속사는 연습생을 작곡 능력만 보고도 뽑아요? 케이제이 선배님이 차연호 선배님보다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잠깐 내가 전화를 건 상대가 아니라 당황하긴 했지만, 기왕이면 그 수혜자가 말하는 게 훨씬 신빙성 있지 않겠는가.
얼굴에 철판 깔고 뻔뻔하게 물은 내 질문에 헛웃음을 친 케이제이가 차연호에게 날카롭게 묻는 게 고스란히 들려왔다.
-맞네. 이래도 아직도 부정하려고?
-하아… 끊어. 일단 끊고 이야기해. 방금 쟤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계속 통화 이어가 봤자 네 성질만 긁힌다니까?
역시 차연호는 많이 당해 본 사람답게 내 패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케이제이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내게 경고를 던졌다.
-그거 궁금해하지 마요. 그쪽이랑 그쪽 소속사 묻는 건 일도 아니니까.
갑자기 협박질? 너 뭐 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이어 눈앞에 뜨는 상태창에 목구멍 너머로 말을 삼켰다.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기억의 파편(28)’이 해금됩니다.]오디 버그를 제외한다면 최단 시간 기억의 파편 해금이었다.
“예예, 충고 감- 사합니다. 열심히 잘 묻어 보쇼.”
뚜-
내가 끊기도 전에 상대측에서 먼저 매정하게 통화를 끊었다.
대답도 듣지 못하고 난데없이 묻어 버린다는 협박질이나 들어 버린 터라 기분이 영 좋지 않을 뻔했건만, 그래도 기억의 파편 하나를 얻어서 봐 주기로 했다.
그것도 제법 많은 일이 일어났던 스물여덟 살 때의 기억의 파편이라니.
그리고 차연호가 굳이 기록이 남는 문자가 아닌 전화로 답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케이제이의 반응도 저렇게 날카로운 걸 보니까 대답은 이미 나온 셈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억의 파편을 막 관람하려고 하는 순간, 차연호한테서 전화가 왔다.
싸움이 한 10분은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금방 전화가 온 것도 의외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차연호는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전화로 상황을 모조리 설명했다.
하와이에서부터 작곡 문제로 계속 부딪혀 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케이제이가 차연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의심의 불씨가 피어오르던 그때, 마침 내 문자를 보는 바람에 나와 차연호가 짜고 본인을 나락으로 보내려 한다는 의심이 더욱 깊어진 것.
하필이면, 예전에도 내가 그의 표절 문제를 소속사에 문의한 뒤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전적이 있어 이미 나를 경계하던 상황인데, 그런 상태에서 의심을 증폭시킬 만한 문자를 딱 보고 말았다는 것.
-문자랑 문자 기록이랑 매번 지우면 뭐 해. 타이밍 더럽게 못 맞춰서 보내는 상대방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들키는데. 한 10분만 더 늦게 보내지 그랬어.
“어어, 그렇구나.”
-정준이는 설마 내가 너랑 손잡고 본인을 견제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할 이유가 없잖아.
“어어, 그렇구나.”
-내가 그동안 권정준 그 새끼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그동안 그 새끼 편 들어 준 게 얼마인데.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어어, 그렇구나.”
그래도 계속 케이제이랑 친구하고 케이제이 살리려고 노력하실 거죠?
한탄은 설렁설렁 대꾸하며 대충 흘려넘겼다.
‘어어, 그렇구나’도 금지어로 지정되었던 것 같은데, 초심도가 깎이지 않는 걸 보니 차연호가 내 팬은 아닌 모양이다.
차연호가 내 팬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확인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화를 건 목적을 새까맣게 잊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그쪽 소속사는 연습생을 작곡 능력만 보고도 뽑는다고?”
-우리 소속사가 3대 대형이잖아. 그러다 보니까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뽑지.
이 새끼, 이러려고 전화로 하라고 했군. 네/아니오 딱 한 마디로 끝나는 걸 저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심지어 저 대답의 의미는 ‘아니오’에 가까웠다.
케이제이 뒈지라고 고사 지내는 거야, 진짜 신월이 뒤 구린 짓을 안 하는 거야? 귀찮은 화법에 이를 악물고 거듭 물었다.
“한 가지만 뛰어나도 뽑냐고.”
-글쎄… 그런데 그런 애들은 종종 오더라고.
실질적인 기준이 있다는 걸 암시하면서 작곡 능력만 보고 뽑는다고 공식적으로 인정은 하지 않는, 더럽게 교묘한 대답이었다.
녹음본이 풀려 봤자 신월 엔터에는 딱히 타격이 없는.
-사실 나도 잘은 몰라. 내가 연습생들에게 신경을 얼마나 쓰겠어. 지금 이것도 소속사 관계자한테 물어봤다가 그게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정준이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 참사가 난 거야. 네 문자가 거기에 제대로 불붙였고.
짧은 한숨을 내쉰 차연호가 순순히 털어놓았다.
-모르겠다, 나도… 분명히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모르고 있었던 면이 더 많았나 봐.
그래, 회귀하고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한 번씩은 마주하는 우정의 단계이긴 하지. 그런데 님은 존나 늦으셨어요. 그걸 이제야 알다니.
“어어, 그렇구나. 더 할 말 없으시면 끊습니다.”
자기 연민은 나 말고 느그 멤버나 느그 정준이 붙들고 하세요. 내가 언제 너한테 한탄 털어 놓은 적 있든? 감정 쓰레기통 역할은 사양이었다.
-…어쨌든, 네 전화는 앞으로 받기 힘들 거야.
“그럼 문자는?”
-그것도 하지 마. 정준이 의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 네 번호 차단해 놓을 테니까 굳이 연락하지 마. 차단 풀면 문자 보낼 테니까.
누가 들으면 바람 피우는 거 들켜서 이러는 줄 알겠네. 차연호-나-케이제이의 삼각관계라니,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긴 했다. 으으, 뇌를 씻고 싶은 적은 처음이야.
내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차연호 측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런 면은 친구가 똑 닮았다고 생각하며 시스템창을 열었다.
[‘기억의 파편(28)’을 열람합니다.]* * *
스물여덟 살의 나는 놀랍게도 타투 하나 없이 멀쩡했다.
전화를 받으며 습관처럼 꼬나무는 담배는 있었지만 꽁초가 재떨이에 트리를 이루지도 않았고, 이전 기억에서 본 것처럼 맥주캔이 사방에 나뒹굴고 있지도 않았다.
이 시기의 나는 아직 타투 덕지덕지 박고 술과 담배에 찌든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었다는 소리다.
탁상 달력의 달이 12월인 걸 보니 대충 견하준과의 완전한 절연 이후의 시기인 것 같다. 그때는 봄인가 여름인가 그랬으니까.
담배 연기를 내뱉은 나는 통화 상대를 향해 잔뜩 빈정거렸다.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전화를 다 하셨대? 이제 와서 그거 다 거짓이라고 해명 기사라도 내 달라고 싹싹 빌려고 전화한 거야?”
-의미 있어? 곧 그렇게 될 건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케이제이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이 기억은… 케이제이가 아직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내 말 꼬라지를 보니까 내가 신월 연습생 자살 건을 폭로한 이후의 시점 같고.
“오우, 싹싹 빌지는 못할망정 협박질을?”
잔뜩 비꼬는 내 말에도 케이제이의 목소리는 한결같은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로 업보라는 게 있나 봐.
퍽 생뚱맞은 대꾸였다.
-똑같았거든, 예전에도. 나랑 같이 연습생이었던 그 형 죽고, 나는 눈 감는 대가로 데뷔를 보장받고. 그리고 데뷔해서 내가 폭로하지 못하도록 똑같이 착취하게 만들어서 약점으로 틀어쥐고.
“…뭐?”
신월 엔터의 검은 과거가 케이제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필 아이폰이라 통화 녹음이 안 된다는 게 한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분명 연습생 곡 착취는 개인이 아닌 소속사 주도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은데도 언론이 전부 나 혼자만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이 사태가?
그러고 보니 언론은 연습생 착취에 가담한 신월 엔터는 쏙 빼놓고 연습생을 착취해서 자살로 몰아간 케이제이한테만 집중해서 기사를 내고 있었다. 그래, 오롯이 케이제이 혼자의 일탈이자 잘못인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방패막이 겸 꼬리 자르기로 버려진 거야. 이게 그때 입 다물었던 업보인가 보지.
케이제이가 자조했다.
-뭐, 이번에는 그렇게 묻히게 놔두지는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산 사람의 말보다 죽은 사람의 말을 더 들어주거든. 참 아이러니하지.
“야, 야! 씨발, 이상한 생각하지 마! 업보든 죗값이든 갚으려면 살아서 갚아, 염병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 네 탓이라고 써 놓지는 않을 테니까. 말마따나, 내 업보잖아.
“누가 그거 무서워서 말리는 줄 알아!”
-나참…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놈한테 이걸 털어놓을 줄은 몰랐네. 그래도 믿을 만한 게 신월이랑 척진 너밖에 없어서. 지금은 연호도 못 믿겠거든.
다급한 내 말에도 케이제이의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라고. 내가 봤을 때, 나 다음은 너야.
“…….”
-내 꼴 나지 마.
마지막 충고를 남긴 케이제이가 통화를 끊었다. 계속해서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저쪽에서 내 번호를 차단했는지 계속해서 통화가 신호 한 번 울리지 않고 종료될 뿐이었다.
* * *
기억의 파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얽혀 있던 진실이 생각보다 더 무거워서.
케이제이의 유서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른 살까지 선배 자살시킨 놈이라는 누명을 쓴 채로 살고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유서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 유서가 공개되었으면 화살은 똑같은 굴레를 반복하여 피해자를 더 양산한 신월을 향했을 테니까.
일단, 차연호한테 유서의 존재를 알고 있느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이 자식이 진짜로 내 번호를 차단해 놔서 연락이 안 됐다. 직접 만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단 소리다.
“대표님! 올해 알테어 컴백 일자 못 알아와요? 산업 스파이 이런 거라도 꽂아서…!”
“이든아, 산업 스파이는 불법이란다.”
허허 웃는 얼굴을 보며 가슴을 콱콱 두드렸다. 왜 대표님은 이상한 세계관이랑 컨셉에만 융통성이 넘쳐나고 이런 거에는 융통성이 없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