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108)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108화(108/357)
108화. 궁지에 몬다는 것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충격적이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요.”
“말 그대로야. 너무 궁지에 몰았으니까.”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까?
“여기서도 느꼈을 텐데. 사람은 가진 것을 잃으면 비이성적으로 변한다고.”
“그렇다고 범죄 같은 것도 저지를까요?”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구현수가 흘리듯 말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유혹의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횡령만 해도 그렇다.
횡령은 처음부터 뭐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게 아니다.
내 권한으로 가능할 때.
‘아, 이거 빼돌려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겠는데’ 싶을 때.
손만 뻗으면 되는 때에 손을 뻗게 되는 것이 범죄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횡령은 대부분 그랬다.
구현수가 말을 이었다.
“남혁주가 널 어떻게 해보려고 마음먹었다는 건 아니야. 그런데 회사에 항의하거나 자기 물건을 가지려고 들렀을 때 그 자리에 네가 있다면?”
“참지 못하고 사고를 저지르겠군요.”
“그래. 손을 뻗으면 네가 있어. 그 순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막말로 퇴근길에 벽돌 들고 기다리면?”
나 같아도 날 구렁텅이로 몰아낸 범인을 만나면 눈이 훼까닥할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절 눈에 안 띄게 숨긴 거군요.”
“그래. 그놈 눈에 보여봤자 좋을 게 없어. 그놈을 자극하기만 할 뿐이지.”
“그럼 왜 일주일이라고 기한을 정해두신 겁니까?”
팀장이 내린 명령은 아니었지만 그라면 알 것 같았다.
과연 팀장은 막힘없이 대답해 주었다.
“일주일 정도면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지. 그 이후에 만나면 서로 싸우긴 할지언정 유혈 사태는 안 날 거야.”
“그럼 사장님은 유혈 사태까지 예상했다는 말씀이네요.”
“나 같으면 더한 것도 예상했어.”
“더한 거라뇨?”
“자살.”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것도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팀장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항상 생각해 둬. 네가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는, 그 칼날 끝에 뭐가 있는지. 그 칼로 뭘 할 수 있는지. 휘둘렀을 때 무슨 결과가 발생할지.”
팀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안전할 수 있을지부터 생각해.”
“남혁주의 경우처럼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난감하긴 하다.
길 가다 만나기라도 하면 당장 남혁주가 칼을 뽑고 달려올 텐데.
그렇다고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놈은 당해도 싸다.
내가 너무 몰아붙였을 뿐.
“아니, 남혁주는 널 만나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하는 말이었고. 그런 거 말고 징계, 좌천, 파벌 나가리 같은 거 말이야.”
팀장에게서 파벌 나가리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새로웠다.
그러나 곧 이해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팀장 자신이 바로 그 증거였다.
뭔가의 잘못으로 태성 웰빙까지 날려온 장본인이니 말이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팀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더는 잔소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이왕 온 김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얘기해 봐라. 아, 이런 건 술안주로 들어야 하는데.”
팀장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결국 술병은 꺼내지 않은 채 날 보았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성 백화점에 들어가서부터 오늘 있었던 일까지 전부를.
* * *
채경준이 돌아가고 난 후 구현수 팀장은 약속한 것처럼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젠 익숙해진 아이콘을 꾹 눌렀다.
게임이 실행되자 친구창을 열어 방명록을 보냈다.
상대에게 알림이 가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구현수가 게임으로 대화하는 상대는 자신과 아직도 연락한다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제자이며 옛 부하 직원이었던 사람.
지금은 높은 곳에 가 있는 사람.
때문에 이미 추락해 버린 자신과는 연을 끊은 사람.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구현수는 자신의 제자와 아직도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로는 조언을 받고 때로는 조언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화제가 조금 달랐다.
누군가 하나가 게임으로 호출을 한다는 것은 채경준에 대해 할 말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요즘 둘은 채경준을 키우는 데에 재미가 붙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그 친구가 사고 쳤나요?
말을 꺼내자마자 사고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고 구현수는 피식 웃었다.
제자이자 옛 부하 직원을 키울 때도 그랬었다.
어디서 사고가 터졌다는 말을 듣고 가보면 꼭 부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현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사고야 매일 치지. 시간 되냐? 이야기가 좀 길다.
-20분 정도 시간 납니다.
매일매일이 한가한 구현수와는 달리 상대는 바빴다.
요직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현수는 채경준에게 들은 이야기를 최대한 간결하게 요점만 정리해서 전달했다.
그가 모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긴 이야기를 압축하고 요점을 잡아내는 데에 익숙해 보였다.
구현수가 열심히 채팅을 치는 동안 상대방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친구창에서 온라인을 뜻하는 초록 불빛이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상대가 채팅을 보내왔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핸드폰 자판이라기엔 너무도 빠른 속도였다.
-잘하셨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예리한 면이 있어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면은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어주니 괜찮지만, 그 점이 그 친구를 너무도 날카롭게 만듭니다.
-그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지점이 그겁니다. 선을 그어주는 것.
채경준은 요즘 젊은 친구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생각 없이 행동한다는 게 아니다.
계획에 선악의 구분이 없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쓸 만하고 유용한 인재다.
그러나 채경준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위험하다.
적을 만들기 딱 좋은 상황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줄게. 근데 제대로 가르치는 건 네가 해야 돼.
구현수는 열심히 꾹꾹 자판을 눌렀다.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야 그놈이 힘을 받을 수 있어.
-적도 생기겠죠. 절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 친구도 싫어하게 될 테니까.
=그럼?
-좀 더 밖으로 돌려야겠습니다. 그래요, 일단 체육대회부터.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곧 가을 체육대회가 다가온다.
매년 치러지는 체육대회지만 연수원 이후로 모든 신입 사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 같은 자리였다.
특히 이번 체육대회는 더 기대가 되었다.
-말이 체육대회지 전략실 쪽에서 뭔가 또 수작을 부리는 것 같더라고요.
=이번엔 또 뭘 하려나. 구경 가고 싶네.
-저는 가는데.
상대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해서 구현수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 부럽다. 부러워! 나도 가고 싶다!
-팀장님은 그 친구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들으셨잖습니까. 이번엔 제 차례지요.
구현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것처럼 해도, 상대는 채경준이 구현수를 찾아간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재밌게 보고 와서 나 좀 알려줘.
-그 친구랑 잘 놀고 오겠습니다.
=에잇, 짜증 나는 놈.
상대의 약 올리는 듯한 말투에 구현수는 자신이 할 말만 남겨둔 채 게임을 확 꺼버렸다.
딱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왕 쉬기로 한 것, 제대로 쉬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TV를 보며 뒹굴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첫 며칠은 어머니도 환영했지만 나중에는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아침에도 자빠져 자더니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방바닥을 굴러다녔어? 잘 하는 짓이다!”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누워 있던 날 보며 하는 소리였다.
결국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목요일은 집을 나섰다.
막상 집을 나오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도서관? 지겹도록 공부한 곳이라 발도 들이고 싶지 않다.
카페? 하루 종일 죽치면 심심하다.
만화방? 시간이 너무 아깝다.
“아, 어디 재밌는 곳 없나.”
남자 혼자 갈 만한 곳이 그렇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집 근처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심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어머니가 퇴근할 시간을 맞춰서 다시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왜 다시 들어왔어?”
“엄마, 오늘은 일 안 나가?”
“오늘 쉬는 날이야.”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울상을 지으며 억지로 발을 옮겼다.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우고 들어가야 했다.
잠깐,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가깝고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울 만한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미래 드림월드다.
미래 드림월드.
서울에 자리한 놀이동산이었다.
놀이동산이 보통 실외에 자리 잡은 걸 생각하면 매우 특이하게도 실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실외 구역도 있었는데, 호수를 끼고 있어 풍경도 굉장히 좋았다.
함께 놀러갈 친구나 이성친구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없는 걸 뭐 어쩌겠는가.
나는 버스를 잡아타고 마음 가는 대로 놀이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왜 하필 놀이공원인가.
사실 시간 때우기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보통 어렸을 때 학교에서 많이 놀러가는 곳이 놀이공원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수학여행이나 소풍에 잘 낄 수가 없었다.
돈 드는 소풍이 결정되면 둘 중 하나였다.
꼬깃꼬깃 접은 돈을 내미는 부모님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돈을 받아 가든가.
소풍에 참가하지 않고 집에서 놀든가.
부모님도 일을 나가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뒹굴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모두들 나만 버리고 간 듯한 기분.
그 기분이 싫어서 어떻게든 함께 소풍을 가려고 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내 돈으로 마음껏 갈 수 있다.
내 월급으로는 이제 자유이용권을 사고 간식거리를 사 먹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놀이공원이 가고 싶어졌다.
옛날엔 가기 힘들었지. 지금은 갈 수 있어. 그래. 가보자.
의식의 흐름이었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나는 먼저 어렸을 때와 많이 달라진 드림월드의 풍광을 구경했다.
호수 바로 옆에는 거대한 빌딩도 들어서 있었다.
호텔과 쇼핑몰이 있다고 했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
우리 태성의 경쟁사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의 상징다운 빌딩이었다.
나는 실외 구역으로 나갔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
여전히 비쌌지만 이젠 당당하게 사먹을 수 있다.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달 여윳돈도 아직 넉넉했다.
왠지 모를 해방감을 만끽하며 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전의 햇살이 강물에 비쳐 눈이 부셨다.
“이런 곳이었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모아둔 돈을 죄스럽게 받아 왔을 때는 그리 즐겁지 않았다.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이라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하늘을 찔렀다.
내가 노는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주위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호수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놀이기구를 타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실내에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 잘 놀았다. 슬슬 집에 가야지.”
저녁은 어머니의 집밥이 먹고 싶었다.
기분 좋게 놀이공원을 빠져나와 1층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미래 빌딩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미래는 태성의 경쟁사였지만 내게는 애환의 회사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우고 쫓아낸 곳이니까.
거기서부터 우리 가족의 괴로움이 시작되었으니까.
미래 빌딩 앞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우르르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양옆으로 쭉 늘어서더니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