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119)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119화(119/357)
119화. 영업 관리 (6)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결국 박정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둘을 응접실에 앉혀놓은 후에 박정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누굴 불러야 할까 고민했다.
‘최소 부장님 각인데. 신상품은 그렇다 쳐도 재고 60퍼센트 할인이면 부장님도 어렵지 않나?’
박정규는 생각 끝에 이사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며 귀찮은 티를 내던 이사는 태성 백화점의 제안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뭐야. 태성이 미쳤나? 갑자기 신상품에다 60퍼 할인이라고?”
놀라서 왔다기보다는 대체 무슨 미친 제안인가 궁금해서 와본 것 같았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정규는 일단 이사를 응접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는 여전히 담담한 분위기의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이사가 김일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더니 하소연하듯 말했다.
“김일준 매니저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러나 김일준은 옆으로 눈짓할 뿐이었다.
채경준이라고 이름을 밝혔던 청년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뭐지? 담당자인 김일준 매니저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혹시 김일준 매니저 그만두나?’
함께 온 데다 권한까지 맡겼다.
인수인계라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 혹시 이쪽 분께서 일을 이어받으시는 겁니까?”
“아뇨. 이번 일에 한해서 채경준 매니저가 도맡았습니다.”
“네……?”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태성 내부의 일이겠거니 했다.
이사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기에 궁금증은 일단 옆으로 치워냈다.
“귀사에서 내건 제안이 신상품 입고, 재고품 60% 할인 맞습니까?”
“네. 정확합니다.”
이사는 순간 이게 뭔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규 씨, 태성 백화점 측 매출이 얼마나 됩니까?”
그 순간, 채경준의 표정이 굳었다.
이사는 아차했다.
태성 백화점이라면 브랜드의 큰 거래처 중 하나다.
그런 거래처의 매출 상황을 모르고 있다니. 실책이었다.
상대측이 원하는 최종 협상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겠는가.
이사는 눈빛으로 박정규를 재촉했다.
박정규는 슬슬 눈치를 보더니 이사에게 귓속말을 했다.
과연 재고떨이 얘기가 나올 만한 수치였다.
이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매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저희도 귀사도 매출이 많이 나와야 좋은 입장 아닙니까. 매출을 올리기 위해 뭐라도 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몇 개 품목을 원하십니까?”
“신상품 빼고는 모두 다 할인하기를 원합니다.”
이사는 기겁했다.
그건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악성 재고를 털어낼 때 쓰는 방법이다.
이득이 남지 않더라도 일단 창고를 차지하고 있는 악성 재고를 없애기 위해 쓰는 방법 말이다.
매출을 올리려는데 이득이 하나도 안 남으면 그건 주객전도다.
“일단 매출을 올리고 봐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한 가지의 선택이 더 남아 있었다.
“그만큼이나 할인하면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큽니다. 그럴 바에는 귀사에서 저희 매장을 철수하는 게 더 이득일 겁니다.”
이것은 반쯤 협박이기도 했다.
미래와 세계 백화점에 비하면 한참 밀리는 성적표를 들고 있다고는 해도 명색이 3대 백화점이다.
태성에서 매장을 빼면 어딜 가겠는가.
그것도 본점에서.
하지만 한 번쯤 협상 자리에서 내밀어봄직한 카드기도 했다.
“이쪽 매니저님께서도 물론 매출이 중요하지만 결국 이익이 남아야 할 것 아닙니까. 60%는 너무 큰 수치입니다. 저희는 악성 재고를 떨어내려는 게 아니니까요.”
조금 더 튕겨보았다.
청년은 아직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고 경험이 많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구워삶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이사님께서는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네?”
“매장을 빼겠다구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저희 역시 매출이 안 나오는 매장보다는 그 자리에 차라리 다른 브랜드를 넣는 게 이득입니다. 이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익을 좇는다면 그렇게 했을 거라는 얘깁니다.”
오싹했다.
협박 카드를 먼저 내민 건 자신이 맞지만 그걸 이렇게 금방 파악하고 역으로 공격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사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이는 상관없다.
청년은 태성 백화점을 대표하여 나온 대리자인 것이다.
그는 태성 백화점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벌써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냄새가 나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노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임원급들은 능구렁이다.
상대를 이런저런 말로 구워삶고 웃으면서 칼을 내민다.
지금 청년은 ‘내 손에 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니까. 나중엔 얼마나 클지 무서울 지경인데.’
자신이 든 칼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
문득 이사는 궁금해졌다.
청년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말을 이었다.
“아까 60%는 악성 재고 떨이라고 하셨죠? 그 말이 맞습니다. 저희 태성 백화점 입장에서 로렌시아라는 브랜드는 악성 재고입니다. 새로운 브랜드로 채우느냐, 아니면 최후의 방법으로 살려볼 것이냐. 그 선택만이 남았죠. 이사님께 여쭙겠습니다. 어느 방법이 좋으십니까?”
이사는 할 말이 없었다.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이 졌다.
괜히 손에 쥐고 쥐락펴락해 보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꼴이었다.
이사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
“매장 철수는 이른 결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60%는 이익이 날 수 있는 마지노선입니다. 50%는 어떠십니까? 저희도 이익을 최소화하고 잡은 겁니다.”
이익을 최소화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할인율을 이 이상 높이게 되면 정말 남는 게 없어진다.
이사는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안에 넣고 쥐락펴락하려는 생각은 버렸다.
지금은 정말 이익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50%로 하죠. 대신에 신상품 있는 대로 다 꺼내주세요. 아낌없이.”
“신상품을요?”
“이번엔 단순히 할인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귀사에만 할인을 제안한 게 아니라는 뜻이죠. 3층의 모든 매장이 동시에 최소 50%의 할인을 할 겁니다. 그 시너지로 신상품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이사는 감탄했다.
어린 청년에게서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하고 시야가 트인 시도였다.
보통 저 나이대의 매니저들은 겁이 나서, 또는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이런 할인전을 계획하지 못한다.
이사는 김일준을 쳐다보았다.
혹시 당신이 언질을 했냐는 뜻이다.
김일준은 팔짱을 끼고는 모르쇠를 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소개만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청년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냈다는 뜻인데.
이사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사 이인철이라고 합니다. 매니저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청년의 이름을 알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지금껏 소개를 미뤄왔다.
그저 한 명의 매니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이름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차 많이 듣게 될 이름 같았기 때문이다.
“채경준이라고 합니다, 이사님.”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은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옆에서 김일준이 귀띔을 해줬다.
“의외로 많이 못 볼지도 모릅니다. 저희 영업관리부에는 잠깐 있는 거거든요. 사장님 직속입니다.”
역시 그랬다!
이인철은 입속으로 채경준의 이름을 되뇌었다.
채경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었다.
* * *
3층은 바빠졌다.
나는 가을맞이 행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모든 매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최소 50%를 할인하고 신상품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이른바 3층 모두가 합심한 할인전이다.
“맨 앞에 신상품 코너라고 따로 써 붙여주세요. 그래야 손님이 오며가며 보시지. 아니, 50% 할인은 거기에 붙일 필요 없어요. 제가 따로 팻말 제작해 놨어요.”
아닌 게 아니라 3층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가슴 높이까지 오는 팻말이 서 있었다.
[신발, 잡화 할인점]할인 최소 50%부터 시작.
(신상품의 경우 할인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민원을 차단하기 위해 괄호 안의 내용을 써 붙여둔 건 덤이었다.
신상품은 이번 행사의 주 이익을 담당할 예정이다.
이른바 재고 상품을 모조리 미끼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전이다.
물론 평소라면 쉽게 할 수 없는 방법이긴 했다.
이건 오로지 3층의 매출이 백화점 최저라서 가능한 것이다.
“어머, 50% 할인이 정말이에요?”
“네, 고객님. 신상품을 제외한 전 품목 50% 할인입니다.”
시장이나 마트가 아니라 백화점이니만큼 호객행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객이 물으면 반드시 반값이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판매 직원들도 사활을 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재고 상품 전부 50%요? 그럼 사야겠네.”
지나가던 손님도 솔깃해서 매장에 발걸음을 했다.
하나둘 3층 매장이 북적이기 시작하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손님들도 내려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부른다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야, 이게 이렇게 되네.”
옆에서 김일준이 탄성을 발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기 매니저님이시죠?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영업관리부 사무실에서 몇 번 봤던 사람이 김일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는 내게 흘긋 눈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표시다.
나는 김일준과 시선을 나눴다.
올 게 왔다.
사실 우리는 미리 나눴던 말이 있었다.
“근데 우리만 이렇게 앞서 나가도 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영업 관리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권한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할인율이나 제품 입고 같은 매장 전반적인 관리는 영업 관리자 권한이에요. 그러니까 상관은 없는데…….”
“제가 염려하는 건 다른 영업 관리자들입니다. 물론 백화점 차원에서 가을맞이 신상품을 들여놓고 할인을 하지만 그건 20%만이잖아요. 다른 층에서 불만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나오죠.”
그 당연히 나오는 것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앞서가는 영업 관리자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이미 여러 명의 영업 관리자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에게 매대를 빌려줬던 식품 매장 매니저도 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매대까지 빌려준 사람이 우리를 몰아세우려고 함께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인지 구경하다 남은 것 같았다.
“김일준 매니저님. 아무리 매출이 저조하셔도 그렇지. 다른 층에 한마디 말도 없이 3층만 혼자서 반값 세일하면 어떻게 합니까. 덕분에 다른 매장은 파리만 날리잖아요.”
예상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일준이 발끈해서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앞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건 최 매니저님이 이러쿵저러쿵 할 말은 아니죠.”
우리에게 매대를 양보한 식품 매장 매니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