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154)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154화(154/357)
154화. 진로상담
권태호는 본사 전략실에서 올라온 보고를 읽고 있었다.
요즘 들어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매일 읽는 것이기도 했다.
전략실에서는 회사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즉, 전략실의 분석 대상이 된다는 것은 크든 작든 회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주요 인물 중에 최근 새로 합류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태성 백화점 채경준의 금주 동향에 대한 보고서]-여의도 신지점 건설을 눈앞에 두고 시공사 선정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임.
태성 건설에 직접 방문했으나 협상에 불발, 조미현 큰 사모님의 분노로 대한 일보가 태성 백화점을 공격.
이에 따라 태성 백화점의 전무 양희성이 태성 건설을 상대로 큰 건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임.
양 전무와 함께 태성 건설을 방문함. 협상 결과는 알 수 없음.
보고서에는 가장 최근의 일, 그러니까 회장의 지시로 관계자가 한 군데 모인 것은 업데이트되어 있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다른 루트로도 그의 귀는 열려 있었으니까.
-후룩.
오랜만에 마시는 차였다.
그는 항상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이렇게 느긋하게 누군가를 기다려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권태호는 차를 마시며 방금 들은 보고를 떠올렸다.
전략실에서 직접 전화로 올라온 보고였다.
-회장실에 태성 백화점 작은 사모님을 뺀 모두가 모였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중재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전략실에서도 당황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프로젝트를 맡은 1년 차 직원이다.
전략실 보고의 대상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말단 사원이 그룹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그는 명백히 보고의 대상이었다.
그의 움직임으로 태성 건설과 태성 백화점이 부딪혔고, 그 결과에 따라 태성의 주가가 하락할지 결정된다.
회장이 일부러 불러서 중재를 시킬 정도면 그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전략실장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권태호는 다급해 보이는 전략실장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마른 입술을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분명히 미소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지금 뿌듯해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키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라 이거지.’
누구 밑에 있든 배우는 게 빨랐다.
구현수 밑에 있을 때도, 그리고 양 전무 밑에 있을 때도.
물론 둘 다 좋은 스승인 건 맞다.
그들에게 배울 것은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그걸 끌어내 흡수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달린 것이다.
가르쳐 달라고 말로만 한다고 해서 옛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채경준이 가르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이것도 권태호가 의도한 일이긴 했다.
자신이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칠 수 있는 일에는 한도가 있다.
1년 차인 그가 지금 배워야 할 것은 현장과 실무인데, CFO인 자신은 주로 서류에 쓰인 숫자를 보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일을 겪어볼 수 있도록 현장에 던져넣었다.
아무데나 던진 건 아니다.
구현수 팀장과 양 전무 모두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가르침을 쉽게 끌어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채경준이 기특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던져놓기만 했을 뿐이다.
알아서 기어 올라오라고.
그 정도 눈치와 센스는 있어야 자신이 직접 손댈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랬더니 기대 이상의 결과를 발휘해주었다.
마음에 들었다.
-삐익
“사장님, 채경준 씨가 도착했습니다.”
권태호는 찻잔을 들고 일어서서 소파로 다가갔다.
이 소파 역시 오랜만에 앉는 것이었다.
삐익 소리를 내며 울리는 내선 전화를 향해 들어오라고 일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채경준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사무실 책상 쪽을 향했다가 당황한 눈빛을 했다.
그럴 만도 하다.
그가 올 때마다 항상 책상에 붙어 서류를 보고 있던 권태호가 이번에는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와요.”
권태호의 깡마른 얼굴이 채경준을 정면으로 향했다.
당황도 잠시, 채경준은 문을 닫고 들어와 소파 옆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앉아요.”
채경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질문은 없었다.
그것이 편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한다.
태성에, 아니, 자신의 밑에 필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호는 새삼 정부의 고졸 특채 정책에 고마워졌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인재를 놓쳐 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권태호는 일어서서 손수 찻잔을 하나 더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채경준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찻잔을 내온다는 것은 그를 손님으로서 대접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일단 그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러나 티 포트에서 찻잔에 차를 따라 주지는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있던 티 포트를 가리켰다.
“차 마셔요.”
그리고 채경준을 관찰했다.
그는 놀랐지만 당황한 표정은 없었다.
이내 뿌듯한 미소를 품고는 직접 차를 찻잔에 따랐다.
권태호는 차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이해했구나.
차를 대접했으니 시간을 따로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차를 따라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손님이 아니니까.
자신의 사람이니까.
다른 설명 없이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차를 음미했다.
침묵이 흘렀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권태호는 오랜만에 가슴에 차오르는 여유감을 즐겼다.
채경준 역시 가만히 권태호의 말을 기다렸다.
부른 건 권태호니 용무가 있는 것도 그다.
아랫사람으로서 그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권태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번에 그런 말을 했지요. 추상적인 가치에 값을 매겨보자고.”
“네.”
연수원에 있을 적에 처음 그를 찾아왔을 때 한 말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함께 논해보자고.
그 후로도 몇 번 만났지만 천천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용무만 마치고 채경준이 물러나곤 했다.
이제는 일부러 일정을 비웠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저는 이렇게 합니다. 비용을 달아요.”
권태호는 다 마신 빈 찻잔에 차를 쪼륵 따랐다.
깔끔하고 시원한 향기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가 좋아하는 페퍼민트였다.
명쾌하고 강렬한 맛과 향을 그는 좋아했다.
“저것을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 되는가. 그걸 보면 명쾌합니다.”
“알 것 같습니다.”
채경준의 대답에 권태호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정말 알 것 같냐는 뜻이었다.
눈으로 채근하자 채경준이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집은 가난했습니다.”
동정을 사려는 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사실만 전달하는 말투였다.
“때문에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데 애를 먹었죠.”
공부에도 돈이 들어간다.
단순히 학원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의 생활비, 그리고 일을 했다면 벌었을 돈.
즉 기회비용까지가 모두 공부에 필요한 비용이었다.
“저는 그래도 자격증을 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자격증을 따는 데 내가 들일 수 있는 비용이 얼마일까?”
천만 원? 일억 원? 십억 원?
사람마다 자격증에 매기는 돈은 다르지만 채경준은 그렇게 계산하지 않았다.
세무사라는 자격증을 얻기 위해 자신이 들일 수 있는 비용. 그것을 저울에 달았다.
1년간 하다못해 사무직으로 취직하면 2,600은 번다.
거기에 1년간 공부하는 비용이 대충 천만 원이다.
1년간 들어가는 비용이 도합 3,600만 원.
2년이면 7,200만 원, 3년이면 1억800만 원이다.
자신에게 1억은 큰돈이다.
2년까지는 가능하지만 3년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공부에 최대 2년을 잡았다.
그 안에 못 붙으면 포기하기로.
“제가 생각하기에 2년은 들일 가치가 있는 자격증이었습니다. 하지만 3년 이상은 아니었어요. 그 정도 가치는 없습니다.”
채경준의 설명은 자세한 내용이 잘려 있었지만 권태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앞뒤 맥락을 파악했다.
그리고 놀랐다.
그의 사고방식은 놀랍도록 자신과 닮아 있었다.
단순히 1, 2년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해야지, 가 아니다.
시간을 가치로 환산해 계산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제가 맞는 겁니까?”
“개인적인 사고방식에 맞다 틀리다는 없죠. 다만 회사의 살림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권태호의 얇은 입술이 흐뭇하게 호를 그렸다.
숫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권태호가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채경준 역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차를 마셨다.
“시간이 남으니 좀 더 얘기를 해보죠. 태성 건설로 가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채경준은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태성 건설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양 전무와 백화승 사장뿐이었다.
대체 권태호의 인맥은 어디까지 뻗쳐 있는 걸까.
“궁금한 것 같으니 말해주겠습니다. 백화승 사장님이 회장님께 전달하셨고, 회장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과정이었구나, 그렇다면 자신이 그동안 했던 행동과 말 모두 회장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채경준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화승이 이렇게 자세하게 회사 일을 회장에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회장이 자신을 오늘 중재 자리에 부른 것은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곧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했고.
“자신감을 가져도 될까요?”
역시나 앞뒤 맥락을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권태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고 싶은 곳을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태성 전자와 태성 증권도 상관없어요. 아니면 본사로 오겠습니까?”
본사로 오라는 말은 권태호가 직접 거두겠다는 말도 된다.
채경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다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정말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채경준은 욕심을 억눌렀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아직 사장님께 가기엔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권태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군요.”
그 말인 즉슨 아직 본사로 오기엔 이르다는 말도 된다.
채경준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직접 가르쳐도 됩니다. 하지만 제게 오면 지금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놓칠 겁니다. 현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해했죠?”
“네.”
현장을 알아야 비로소 서류 위의 숫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채경준은 양 전무에게서 그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무조건 상위직으로 갈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1년 차다.
아직 수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미 승진 속도는 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여기서 더 조급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뛰어가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럼 왜 태성 건설을 선택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태성 건설 사장님과 면담했을 때 태성 건설에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채경준 씨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권태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태성 건설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낸다는 것은 매우 오만한 말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채경준은 그렇게 앞뒤 상황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생각으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가 궁금했다.
“제가 그걸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어두운 부분입니다. 회사에는 밝은 부분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직접 겪어봐야 이용할 수도 있고 걷어낼 수도 있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하나, 태성 백화점의 프로젝트는 제가 처음 아이디어를 내고 진행 중인 건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권태호는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말없이 차를 후룩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좋은 자리를 준비해 두죠.”
“좋은 자리요? 그렇게까지는 욕심을 부리지 않…….”
“욕심이 아닙니다. 다른 동기들도 승진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채경준은 권태호의 말을 금방 파악했다.
동기 수석인 그가 가장 먼저 승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승진을 못 하면 다른 친구들도 전부 승진을 못 하게 된다.
동기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올라가야 했다.
채경준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감사히 자리를 받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채경준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