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166)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166화(166/357)
166화. 굴이 제철 (6)
토요일 저녁.
나는 채한익의 저택으로 향했다.
채인하는 부모님, 그러니까 회장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채한익은 결혼한 후 독립한 상태였다.
채인하에게 주소를 들은 나는 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용산구 이태원.
빈민층과 부유층이 동시에 존재하는 희한한 동네였다.
큰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데다 바로 건너편에는 빈민층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위쪽 동네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이태원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처음 와봤다.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커다란 담장에 둘러싸인 대저택이 나왔다.
채인하가 사는 태성 본가, 채운재다.
회장 일가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회장 채항필과 그의 부인 백화승, 부회장 채태익 부부, 그리고 채인하가 살고 있었다.
저택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서 있자 안에서 CCTV로 보고 있었는지 경호원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님?”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사복 차림이었다.
나 역시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이다.
“뭐 입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다 갔어요.”
“평범한데요?”
“그렇죠? 평소처럼 입었어요. 특별한 자리긴 하지만 오늘 우리는 태성 백화점의 직원으로서 가는 거잖아요.”
디너 자리다 보니 드레스라도 입고 오는 것 아닌가 했는데, 채인하 나름의 생각을 거친 모양이었다.
“그럼 갈까요?”
나는 채인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에스코트 하듯이.
우리가 친하게 대화하는 것을 본 경호원이 당황한 듯 한 발짝 물러서서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뒤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채한익의 저택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5시 반이 되지 않았는데도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와, 여기 노을 정말 예쁘네요.”
골목이 넓어서인지, 높은 빌딩이 없어서인지 하늘이 시원하게 보였다.
내가 감탄하자 채인하가 신나서 말했다.
“채운재에서 보면 또 분위기가 달라요. 나중에 한번 와보세요.”
친구네 집에 초대하는 가벼운 느낌이었다.
무려 채운재인데 말이다.
채운재.
사계절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이 보인다고 해서 채운재라고 한다.
지금이야 이태원동이 외국 문화의 성지처럼 됐지만 원래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등 뒤에는 남산, 앞에는 한강.
그야말로 채운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우리는 천천히 골목을 걸어 올라갔다.
채한익의 저택은 여기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골목은 커다란 저택들로 이어졌다.
인기척은 없었다.
각 저택의 입구에 달린 CCTV가 서늘하게 우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남의 집에 가는 거다.
뭐라도 준비하려 했다.
가장 무난한 것이 술인데.
내가 뭘 가져가든 그가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애초에 재벌가 아들내미가 일개 직원에게 집들이 선물을 바라진 않을 것 같았다.
“에이, 선물은 무슨 선물이요. 저 같아도 안 받아요.”
채인하도 그런 생각인 듯했다.
우리는 골목을 걸어 올라가 한 저택 앞에 섰다.
이태원동 13X-XX.
채한익의 저택이었다.
커다란 문이 하나, 작은 문이 하나.
커다란 문은 아마 자동차가 드나드는 문이겠지.
우리는 작은 문 옆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머리 위의 CCTV가 붉게 점멸했다.
누구냐는 말도 없었다.
삐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가죠.”
우리는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커다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본관으로 보이는 저택 앞에는 편안한 복장의 남자 하나가 나와 있었다.
“오빠, 오랜만!”
채인하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왔냐.”
채한익이었다.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이야, 이제 좀 직장인다워졌네.”
“그렇지?”
둘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남매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차가 많이 났다.
그 때문인지 둘은 보통의 남매처럼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채한익이 채인하를 꽤 예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그쪽이 채경준 씨겠군요.”
선한 인상의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사장님. 전화로 말씀드린 채경준입니다.”
“어서 와요.”
우리는 채한익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환한 조명이 가득했다.
“오빠, 박종연 대표는? 초대했어?”
“응. 6시 반까지 오라고 했으니 한 시간 후면 올 거야. 다른 3명의 사업가도.”
“어? 지금 5시 반인데?”
채인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직 5시 반이 되기도 전이었다.
“응. 따로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어서.”
채한익이 뒤따라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채경준 씨, 앉아요. 식전주 잠깐 하며 얘기 좀 나눠봅시다.”
그는 나를 거실에 앉혔다.
역시나.
전화에서 원래 6시였던 것을 5시 반으로 수정할 때부터 알아차렸다.
그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나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덜덜 떨 내가 아니었다.
채인하가 옆자리에 앉아 소곤거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오빠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야 나이 차이 나는 막냇동생에게는 좋은 사람이겠지.
순진하게 믿으면 안 된다.
그는 태성 면세점의 부사장이다.
사람을 평가하고 다루는 자리다.
그와의 대화가 평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네, 고맙습니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채인하는 내 편이어야 한다.
비록 상대가 가족, 친남매라 할지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했다.
그걸 노리고 오늘 함께 온 것이었으니까.
“식전주니 가볍게 루이 레종으로 하죠.”
채한익이 스파클링 와인과 세 개의 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자, 들어요.”
상큼한 사과 향이 훅 올라왔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탄산의 시원한 맛과 상쾌한 사과 향이 느껴졌다.
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좋은 와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입을 축이고 나자 본격적으로 대화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무슨 이야기부터 나올까.
권태호 사장과는 무슨 관계냐, 어머니인 백화승 사장은 어떠냐.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채한익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둘이 무슨 사이에요?”
“네?”
채한익이 가리킨 것은 나와 채인하였다.
“큽, 커흑.”
와인을 마시던 채인하가 사레들렸는지 쿨럭거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디너 자리에 여성을 동행하다니. 심지어 그게 우리 인하라니.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다른 목적이 있긴 했다.
기업가들 사이에 끼기 위해.
채인하는 입장상 그들과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들과 동격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채인하와 함께 왔다.
말하자면 채인하는 내 입장 티켓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내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친오빠인 채한익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내가 진땀을 흘리고 있자 채한익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야! 오빠, 미쳤어?”
“흐음, 대충 알겠네.”
소리치는 채인하와 가만히 앉아 진땀을 흘리는 날 보던 채한익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야, 오빠.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쪽은 몰라도 넌 그런 것 같은데?”
“오빠!”
채인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채한익이 껄껄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정색한 채한익은 꽤 차가웠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채인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지금 이 자리는 가시방석이다.
남자라면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남자 친구로 오해받아 그 가족과 대면이라니.
반대로 사실을 들켜도 문제다.
자기 동생을 이용하려 들다니.
어느 쪽이든 엄청나게 난감해진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채한익의 압박이 강해졌다.
“대답하세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채경준 씨.”
“오빠.”
“넌 가만히 있어.”
분명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정색하니 꽤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는 끝까지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침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은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끝?”
“끝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명백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채인하 씨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를 입장 티켓으로 여긴 건 맞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상으로 이용해 뭘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또,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은 것도 아니다.
불순한 의도는 없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채한익이 날카로운 눈으로 날 살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그렇군요. 좋은 동료라. 우리 인하를 잘 부탁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동생을 걱정하는 평범한 오빠 같았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하하 웃었다.
그러나 완전히 그의 의심이 풀린 건 아닌 듯했다.
웃음 사이에 스며든 눈빛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우리는 물 밑에서 합의를 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으니까.
손님과 초대한 집주인의 입장이니까.
믿는 척을 하고 서로 더 탐색해 가기로.
“우리 인하는 회사 잘 다니고 있습니까?”
“그럼요. 항상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워낙에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일을 제대로 하려나 모르겠군요.”
“명석하고 흡수가 빨라서 뭐든 빨리 배웁니다. 일을 배우면 금방 응용하기도 하구요.”
형식적인 질문과 형식적인 대답이 몇 차례 오갔다.
워낙에 판에 박힌 대화라서 서로 찔러볼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화였다.
그런데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채인하는 기분이 이상했나 보다.
“어? 이거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학부모 상담에서 이런 거 하지 않았어?”
채한익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네 상사가 될지도 모르는 분 아니니. 우리 동생이 일 잘하는지 평가를 듣고 싶은 건 당연하지.”
채인하가 헷갈리는 표정을 했다.
“상사? 내가 상사가 되는 게 아니고?”
“어허, 아니지. 이번 기수에서 가장 빨리 승진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채경준 씨라던데? 오빠도 나름 조사해 봤단다.”
“앗, 그건 또 언제 알아봤어?”
“일주일이나 있었잖니.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그렇지 않나요, 채경준 씨?”
시험이 왔다.
일주일 동안 조사를 잘 했는지 숙제 검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줬으니 자신이 알려준 3명의 기업가, 그리고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봤는지 떠보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선수를 쳤다.
“부사장님께서는 저에 대해 뭘 알아내셨습니까?”
채한익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