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17)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17화(217/357)
217화. 왕림 (1)
회사의 실질적 주인인 큰 사모님의 방문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사장과 주요 임원 외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기도 하고, 사실 회사에 직함을 가지지도 않은 사람이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보기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큰 사모님은 태성 건설의 지분을 얼마 정도 가진 주주긴 하지만, 오너 경영이 안 좋은 인식을 얻고 있는 시점이다.
여기서 실제 오너 패밀리도 아니고 ‘전’ 오너 패밀리인 큰 사모님이 경영을 좌지우지한다는 걸 동네방네 소문낼 이유가 없었다.
물론 큰 사모님의 존재는 태성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긴 했다.
오늘도 명목상으로는 친한 지인인 김 사장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사장 김흥민은 소수의 임원을 이끌고 내려가 직접 자신의 주인, 조미현을 맞이했다.
그녀는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여러 개의 핀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핀 자체는 화려하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조미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고 있었다.
이젠 노년에 접어든 나이인데도 조미현은 여전히 기품이 넘쳤다.
김흥민 사장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모셔야 할 아가씨이자 사모님이었다.
그렇기에 김흥민은 큰 사모님이라거나 첫째 사모님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모님은 조미현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은데요.”
“물론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조미현이 말했다.
사장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물론 조미현은 경영 전반에 세세하게 끼어드는 성격은 아니다.
그녀는 실질적인 주인이지 경영자가 아니었으니까.
조미현에게 있어 회사란 아랫것들이 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아랫것들이 바치는 과실을 받아먹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장이 일일이 모든 건을 조미현에게 허락받고 진행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 경우는 특수했다.
조미현이 싫어하는 백화승의 딸과 부하 직원이 연관된 일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여러분은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오게 해서 미안하네요.”
조미현은 사장을 따라 마중 나온 몇 명의 임원이 그저 병풍임을 알고 있었다.
사장 혼자만 마중 나가면 썰렁하니 머릿수를 채울 겸 몇 명 부른 것이다.
임원들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들은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사장과 조미현, 둘만이 할 대화가 있는 것이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고마워요.”
조미현은 아직 우아한 가면을 벗지 않았다.
썰물이 빠지듯 임원들이 재빠르게 사라졌다.
둘만 남자마자 조미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여전히 태도는 기품이 있었지만 그 얼굴에 서린 냉기는 살벌했다.
“일단 듣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네, 사모님.”
조미현은 마치 자신의 회사인 양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사장실에 들어가서도 조미현이 당연하게 상석에 앉았다.
사장은 손수 차를 타서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일이라고 해봤자 겨우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짧은 기간 동안 이 회사에는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쳤다는 뜻이다.
태성 건설 전체의 명운을 건 폭풍이 말이다.
사정을 설명하는 사장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미현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태성에 입사한 지 겨우 2년 차인 풋내기에게 회사가 휘둘리다니, 차마 제 입으로 할 수는 없는 말이다.
사장이 설명하는 사이 찻잔은 두 번이나 비었고 그때마다 조미현이 손수 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사장은 차가 식도록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채경준 팀장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말을 마친 사장은 가만히 조미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바로 노성이 터져 나올 줄 알았건만 조미현은 의외로 조용했다.
아니면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방대해서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장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고 찻잔을 들었다.
이미 다 식어 있었기에 한입에 털어 넣을 수 있었다.
사장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차를 새로 따르자마자 조미현이 입을 열었다.
“흥, 생각보다 나쁜 상황은 아니네요.”
사장은 의외라는 눈길로 조미현을 보았다.
대체 뭘 예상했길래 그나마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는 걸까.
“난 또 백 씨 고것이 경영권에 손대려고 하는 줄 알았지.”
백화승에 대한 일에서만큼은 우아함을 뚫고 본성이 나와 버린다.
그나마 욕설이 섞이지 않은 것은 조미현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조미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수족과 딸내미를 앞장세워서 경영권 흔드는 것쯤이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잖아요?”
사장은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채경준과 채인하는 조금도 그런 낌새가 없었다.
하지만 조미현은 그런 최악의 수까지 고려했다는 것 아닌가.
이건 어찌 보면 조미현을 대신해 태성 건설을 지키고 있는 사장으로서는 실태라고도 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조미현이 눈을 흘겼다.
“됐어요.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가능성이 희박했으니까.”
조미현의 말에 사장은 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 두고도 가능성이 희박해서 말하지 않았다니.
조미현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조미현이 다시 힐긋 사장을 보았다.
답답함과 한심함이 섞인 눈빛이었지만 사장을 탓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김흥민이 사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적당히 멍청하고 적당히 눈치가 빠르며 충성심이 높기에.
조미현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상 그녀에게는 쓸데없이 머리 좋은 놈보다는 김흥민 같은 사람이 좋았다.
머리 좋은 놈은 손에 쥐여주는 권한이 클수록 더 많은 것을 하는 법이니까.
예를 들어 조미현을 쳐낸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진심으로 태성 건설을 먹으려 들었으면 채인하가 팀장으로 왔겠죠.”
“그런 생각을 찔러서 일부러 채경준을 팀장으로 내세운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실질적인 명령은 채인하가 내리고요.”
조미현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정말 그렇게 보이던가요? 채인하가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아요?”
사장은 즉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겨우 한 달이었지만 사장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채인하는 놀랍게도 평범한 직원이다.
회장의 딸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이름조차 뇌리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채경준이 움직인다.
처음엔 사장도 혹시 채인하가 채경준을 방패막이로 쓰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채경준이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어간다.
채경준은 누군가에게서 일일이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를 맡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키운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서 사장은 누군가의 진한 의도를 느꼈다.
채경준이 겨우 2년 차에 TF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것 때문이 틀림없다.
TF팀이라는 것은 특별히 무언가를 정해두고 하는 팀이 아니니까.
뭘 맡기든 뭐든 잘 해내야 하는 팀이다.
그 누군가는 뻔했다.
‘권태호 사장.’
본사에서 손끝 하나 대지 않았던 권태호가 대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른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권태호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을 테니까.
그것보다 채경준이라는 인물 자체가 독특했다.
이미 완성에 가까운 인재였다.
임원들을 눈앞에 두고도 주눅 드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발표하는 내용도 목적이 명확했다.
그것도 명백히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채경준과 사장이 서로 반대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목표가 합치한다.
그것부터가 이미 채경준이 사장의 성향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거절할 수 없도록 판을 짰다는 소리니까.
거기에 더불어 임원들을 설득해 나가는 그 말솜씨.
한두 번 사람을 상대해 본 솜씨가 아니다.
평생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재벌가 막내따님이 저런 놈을 조종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TF팀의 실세는 채경준이라 보는 것이 옳았다.
뭐 그런 채경준이어도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완성에 가까운’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그러했다.
나름 딴에는 속마음을 숨긴다고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지만, 그 눈빛과 미세한 얼굴 표정에서 속마음이 드러났다.
쓸데없이 공격적인 부분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과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위험하다.
칼을 뽑을 줄은 알지만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비로소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아직 나이도 젊거니와 여러 가지 경험으로 커버가 되는 문제였으니까.
사장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왜 그런 인재는 항상 남에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장의 말을 들은 조미현이 어머,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뭐 문제가 되나요?”
“네?”
설마 남의 인재를 빼앗아오라는 말은 아니겠지.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빼앗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채경준은 애초에 백화승의 사람도 아니었다.
사장이 권태호 이상으로 채경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조미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의 인재라고 내가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조미현은 손끝으로 찻잔을 말아 쥐었다.
온기를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오싹함이 느껴졌다.
고생을 모르는 그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뱀의 긴 몸통처럼 느껴졌다.
“권태호 사장은 당분간 본사로 불러들일 생각이 없어요. 그건 확실해요.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 같으니까.”
사장은 조미현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이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네. 어차피 당분간 우리 회사에서 일할 것 아니에요. 그럼 뽑아먹을 수 있는 만큼 뽑아먹어야죠.”
“그럼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어떻게 할까요?”
채경준의 제안으로 회사에서 넘겨받은 재건축 건을 말하는 것이다.
조미현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지원하도록 해요.”
사장으로서는 굉장히 의외의 답변이었다.
어제 조미현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조미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회사에 확실히 이익이 되는 일이잖아요? 그럼 최대한 부려먹읍시다.”
사장은 난감한 기색을 했다.
이미 임원과 팀장급 직원들에게 돕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두었기 때문이다.
조미현은 사장의 분위기를 읽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과한 충성으로 헛짓거리 하는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럼 앞으로 방향성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득이 되면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세요. 채경준은 백화승의 사람이 아니에요. 권태호 사장의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적대하는 건 백화승, 그 여자 하나면 충분해요.”
권태호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장 역시 쭈뼛했다.
지금까지 백화승만 생각했지 권태호가 못마땅해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채경준이 권태호와 연락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백화승의 딸인 채인하와 내내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어쩌면 백화승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
“설마 권태호 사장님이 지금까지 일을 다 알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정확히는 태성 건설에서 채경준에게 압박을 준 것을 들킬까 봐 겁낸 것이다.
조미현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그 정도로 권태호 사장이 화낼 위인인가요? 오히려 시련을 안겨줬다고 좋아할 텐데. 우리는 권 사장 입장에서 숫돌 역할일 뿐이에요.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만 보고 판단하세요.”
회사의 이득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의 이득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조미현에게 있어서 이득이 되느냐 아니냐의 기준일 것이다.
사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명확한 지령이 떨어졌으니 이제 채경준을 대하는 데 애매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알겠습니다.”
역시 자신이 모시는 분은 영리하다.
태성 그룹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야 하는 사람은 바로 조미현이다.
사장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 얼굴을 안 보고 가면 서운하겠죠? 얼굴 도장이나 찍어봅시다.”
“……네?”
“채경준을 불러와요. 채인하는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하고.”
사장은 죽상을 했다.
채경준이면 몰라도 채인하까지 부르라니.
조미현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