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49)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49화(249/357)
249화. 진입 장벽 (7)
이번의 침묵은 끔찍이도 길고 무거웠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열 수도 없었다.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 몸과 머리가 굳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랬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회로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리는 가운데 별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종업원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한정식 집답게 온갖 반찬들이 그득하게 담긴 한 상이었다.
좌식 식탁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지고 종업원들이 나가는 그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별실 문이 닫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이 놓였다.
가장 먼저 숟가락을 든 이는 초대 손님인 청년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국을 떠먹더니 감탄했다.
“오, 이 집 맛있네요. 제가 아는 식당이 몇 개 없어서요. 좋은 곳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이게 무슨 괴이한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다.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는 거다.
방금 전에 그런 폭탄 발언을 날려놓고 넉살 좋게 식당 얘기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아까의 말은 너무 섬뜩해서 지금의 평온한 분위기에 너무나도 괴리감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부사장이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설계자라는 거.”
“아, 그거요?”
청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나마 국만 떠먹고 밥에는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이것도 계산한 행동이겠지만.
본격적으로 식사를 할 만큼 무르익은 분위기는 아니다.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서 숟가락을 든 것이다.
방금 전까지 도발한 것도 이 순간을 위한 빌드 업이 틀림없었다.
지금껏 사장들은 분노하고 청년을 매도했다.
욕을 하고 자격을 따졌다.
그 말을 기다렸던 것이다.
청년의 자격이 충분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이만한 파급력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리고 청년의 말은 효과가 너무나 좋았다.
이 정도로 먹힐 줄 예상하고 있었을까?
“다들 예상하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이번 일에 저희 태성 건설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업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그 정도는 읽었으니 중요한 자리임을 알고 끼어들었을 테니까.
다만 그 설계자가 이 청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잠깐만요. 그건 본인 주장 아닙니까?”
“뭐가요? 태성 건설이 관여한 거요?”
“아니, 그거 말고.”
질문이 어수선한 것이 아직 다들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사장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질문했다.
“그쪽이 설계자라는 거 말입니다.”
“왜 제가 거짓말을 합니까?”
청년이 오히려 되물었지만 사장은 침착하게 받아쳤다.
“이런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요.”
“아하. 그럴듯한 말이군요.”
청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달 나는 것은 사장들 쪽이었다.
“맞아요, 아니에요? 답답하니까 말을 좀 해요.”
모두가 청년의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청년에게 끌려다니는 셈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청년이 얼른 진실을 밝혀주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 계신 사장님들 전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오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런 효과를 노린 점도 적잖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을 때의 손해가 더욱 크죠.”
청년은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조사해 보면 나올 일이니까요. 게다가 저는 지금 혼자 나왔습니다. 제가 가짜라면 태성 측에서 절 혼자 내보냈을까요? 이런 중요한 자리에?”
그 말 그대로였다.
청년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명이었다.
태성에서 대표자로 보낼 정도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굳이 설계자가 아니라도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굳이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
결국 청년의 말은 진실이 되는 것이다.
믿기지는 않지만.
“말도 안 돼. 그쪽이 이 자리에 나올 만한 인물이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설계자 본인이라는 증거는 안 됩니다. 막말로 우리의 이런 반응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사장의 논리는 이랬다.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설계는 분명 태성이 했을 것이다.
정확히는 태성의 두뇌들이 모인 회의에서였겠지.
일개 팀장 하나의 머리에서 그만한 계획이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놀리는 거예요?”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사장님의 자유입니다만 그것이 오늘 모임에 중요한 주제가 된다면 증명해 드리도록 하죠.”
부사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뭔가 특별한 증거가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청년은 뭘 그리 조급해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대화해 보면 알겠죠. 알고 싶어 하는 건 사장님들 아니십니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
자신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알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내라.
여전히 주도권을 놓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사장들을 시험하는 말이기도 했다.
진짜 능력이 있다면 대화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으니까.
앞으로 짧으면서도 긴 시간 동안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그들 몫이다.
사장들은 자신이 도발당한 걸 알고 발끈했다.
“설계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습니다. 너무나 오만하군요.”
청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부사장은 그걸 보고 속으로 혀를 쯧, 찼다.
괜히 도발할 리가 있겠는가.
건방지게 구는 것도, 사장들을 도발하는 것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인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하지만 화가 날 만도 했다.
사장들은 너무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경받는 것이, 배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과거엔 머리를 숙여가며 열심히 일했을지라도 지금은 반대로 남의 정수리를 보는 입장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가 건방지게 날뛰는데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대현 건설 부사장만 해도 자꾸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느라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식사들 하시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청년이 마치 주최자인 양 식사를 권했다.
그러고서 대현 건설 부사장과 DA의 사장을 바라보기에 부사장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부사장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럽시다. 서로 좋은 의미 가지려고 만든 자리인데 화내봤자 손해 아니겠습니까. 이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좋은 정보를 공유해야죠. 얼른 드시죠.”
화해 분위기까지는 필요 없다.
다들 조금이라도 감정을 가라앉히길 바랄 뿐이었다.
부사장이 나서자 참석자들이 못이긴 척 수저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청년도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제 청년은 더 이상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정보적 우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목마른 사람이 물어서 캐내야 한다.
그가 참석한 이유도, 진짜 설계자인지도.
그리고 그가 가진 정보가 무엇인지까지.
-달그락, 달그락.
답답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들 용케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사장은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계속해서 청년을 관찰했다.
자신을 포함해 여기 있는 사장들은 다들 이런 식사 자리에 익숙하다.
불편하고 답답해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목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자리 말이다.
청년은 나이도 젊으니 꽤 불편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잘 챙겨먹고 있었다.
나물 반찬에 갈비찜까지 야무지게 가져다 먹는 걸 보니 어이가 없어졌다.
정말 겁이 없는 건지 감정을 숨기는 건지.
솔직히 궁금했다.
부사장은 대화의 물꼬를 틀 겸 물었다.
“긴장 안 되시나 봅니다.”
청년은 눈을 깜빡이더니 입 안에 든 음식을 삼키고 난 후 말했다.
“다들 똑같은 입장 아닙니까. 서로 회사 이익을 위해 움직이면서 뭐라도 얻어가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건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뭘 어떻게 해야 회사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면 긴장할 새도 없지요.”
청년의 대답은 너무도 솔직했다.
“그렇게 다 얘기해도 됩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신뢰를 쌓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뭐든 다 말하겠다는 겁니까?”
“다 말하는 것과 진실만 말하는 것은 다르죠. 불리한 질문이면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때요? 이 정도면 물어볼 만하지 않습니까?”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에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청년에게 시선이 쏠렸다.
적대감을 잔뜩 드러내던 아까와는 조금 다르다.
그들 역시 한 회사를 이끌어온 경영자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득을 볼 수 있을지, 좋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생각 중인 게 분명했다.
눈치를 보고 있던 DA산업개발의 사장이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설계자라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관여한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요.”
몇 명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짜입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죠. 어떤 그림이었는지 알려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쭉 제가 관여한 건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요.”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실제로 태성 건설의 계획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 봐야 했다.
여기 있는 채경준을 이용한 태성 그룹 이미지 전략을 비롯해 지금 이 모임 자체가 계획의 일부분일 테니까.
이 자리에 건설업계 사장들이 모여 있고 그 중심에 채경준이 앉아 있는 것까지 고려하면 지금도 관여하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잠깐, 말이 되나?”
사장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관여라는 단어를 썼잖아요. 주도는 아닐 수도 있어요. 여럿이 그림을 그렸을 테니 거기에 참여한 거겠죠.”
“오늘 혼자 나온 걸 보면 어느 정도 발언권이나 결정권이 있는 건 맞는 것 같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진지하게 그의 말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부사장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잖아? 별로 한 건 없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적개심은 남아 있었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건 다들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정부와 사전 공작이 있었던 건 맞죠?”
“네, 맞습니다.”
“내용은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여론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나요?”
“네.”
“여론의 선두에서 움직이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몇 번의 질문이 날아들고 그때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바로 대답이 나왔다.
이미 다들 아는 정보는 깔끔하게 인정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깊게 파고드는 질문은 가차 없이 쳐냈다.
빈틈이 없었다.
‘이 청년이 했던 것처럼 감정적으로 동요라도 시켜야 하나?’
가장 편하면서 확실한 방법이다.
그 사람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
그러나 뭐가 역린인지도 모르는 이상 아직은 섣불렀다.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틈을 찔러볼 생각이었다.
부사장은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 저희가 알아야 할 게 뭡니까? 빈손으로 나오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모임에 참가하고 싶다고 먼저 손을 내민 건 태성 건설이다.
이 정도로 속 깊은 청년이 아무 생각 없이 나왔을 리가 없다.
분명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청년은 갈치조림 한 토막을 집어 앞접시에 가져가더니 차분히 말했다.
“미래 그룹이 들어온다더군요. 여러분의 피와 땀을 거름 삼아서 말입니다.”
이제 겨우 이성을 되찾은 참석자들에게 다시 분노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