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61)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61화(261/357)
261화. 난장판 (1)
누구나 자기 일과 직장에 대한 생각은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지옥으로 느낄 것이고, 어떤 미친놈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애꿎은 부하 직원들을 붙잡는 안락한 장소로 여길 것이다.
권태호에게 있어 회사는, 전장이었다.
눈을 감으면 황무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는 자신이 떠오른다.
앞으로 얼마를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그 황무지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길을 왔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잊었다.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건 앞으로 가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권태호가 단순히 사막이나 황무지가 아니라 전장이라고 말한 이유는 앞을 막아서는 것들 때문이었다.
때로는 사람이기도 했고, 때로는 회사기도 했다.
권태호는 그들을 둘러갈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부쉈다.
잔인하게, 자비없이.
어째서?
그런 시대를 살았으니까.
IMF는 그랬다.
손발을 잘라내 몸통에게 먹이고 그 잘라낸 손발에 가격을 매겨 팔아먹던 시대였다.
일에 감정이 깃들면 견디지 못한다.
구조조정 한 번에 몇 명이 실업자가 되고 몇 개의 가정이 파괴되는지 권태호는 아주 잘 알았다.
알면서도 했다.
이제 와 손속에 사정을 두고 계획에 감정을 넣는다는 건 그가 쌓아온 세월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면 권태호가 밟아온 길은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시체였고 피바다였다.
총과 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결재 한 번, 말 한마디로도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렇기에 권태호는 세력을 만들지 않았다.
권력과 정보, 모두를 가진 권태호가 세력을 만들 경우 태성을 위협할 정도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권태호의 세력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힘을 휘둘러댈 테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사람이 죽는다.
인생을 망친다.
앞길이 막힌다.
너무나도 강한 권력 때문에 권태호는 혼자여야 했다.
“…….”
권태호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책상 너머에 환영처럼 한 청년의 모습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처음으로 들이는 자기 사람이었다.
어째서였을까.
슬슬 세대 교체를 준비할 시기가 되어서?
자신의 후원으로 인생을 바꾼 사람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청년 역시 비틀려 있다.
자신처럼.
권태호는 얇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워낙 날카롭고 날렵한 인상인지라 옅은 미소를 머금은 정도로는 그의 인상을 바꾸긴 어려웠다.
그러나 회장이나 감배섭이 지금의 권태호를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니, 권 사장이 이렇게 기뻐한다고?’
흐뭇했다.
처음에 후원자의 정체를 의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지간히도 비뚤어졌구나, 싶었다.
그런데 기어코 바득바득 기어올라 와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혼자 힘으로.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지금 불러들이면 저연차 때 계열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얻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게다가 권태호가 처음으로 들이는 사람이다.
능구렁이 같은 사장과 임원들이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하겠지.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풀어둬야 한다.
본사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은원에 묶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슬슬 움직여야겠지.’
권태호는 머릿속에 그린 전장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대로 나아가면 무엇이 나타나고 무엇을 죽여야 할지.
그 위에서 쓸 수 있는 말은 무엇인지.
물론 계획이 다 들어맞지는 않는다.
상황은 항상 달라지니 커다란 길만 정했다.
이젠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덜걱.
권태호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밑 작업은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다.
밑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움직였느냐에 따라 과정의 난이도가 달라지니까.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한 권태호는 친구 목록에 있는 유일한 대상을 호출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권태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나는 채인하와 함께 IR팀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IR팀.
투자자와의 소통을 위한 부서였다.
한마디로 주주를 상대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 다 주주이니 회사에 대한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돈을 넣었는데 내가 투자한 회사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IR팀은 재무, 회계, 세법뿐 아니라 기업 구조와 M&A, 프레젠테이션, 사람 다루는 법까지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 IR팀이 가장 바쁜 시즌은 역시 주주 총회였다.
임시 주총 때도 물론 바쁘긴 하지만 그때는 안건이 있기 때문에 열리는 거라 IR팀이 폭격을 맞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정식 주총 때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와 온갖 질문을 퍼붓는다.
작년 매출은 왜 감소했는가, 인건비가 왜 늘었는가, 혹시 물적 분할 할 거냐, 수주 잔고는 왜 이러냐 등등.
사실 나도 주총에는 참가해 본 적이 없다.
IR팀과의 만남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사장이 일부러 가보라고 했을 정도니 다방면에서 실력 있는 인재들이겠지.
“가실까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순간 잘못 찾아왔나 팻말을 봤지만 확실히 IR팀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토방에서 그런 지라시가 돌던데 사실이 아닙니다. 특별한 목적성이 있는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건설 업계 관련 컨소시엄에 참여하다 보니 인사 나누게 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토교통부 차관님과 몇 차례 만난 건 그만큼 우리 회사의 존재감이 크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측면으로요. 예. 아니, 그런 지라시는 사실이 아닙니다.”
“……주가 조작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해요?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엄연히 합법적으로 최선을 다해 경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쪽은 마치 콜센터를 방불케 했다.
전화를 끊으면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오고.
숨을 돌릴 만하면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덕분에 응대하는 직원들은 다른 일을 하나도 못 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아이씨, 아직도 재무제표 안 넘어왔어? 재무팀 대체 뭐 해? 빨리 닦달해!”
“홍보팀은 뭐 하는데 홍보 자료 이렇게 오래 걸려? 거기 전화해 봐.”
“사업계획서 작성 끝났어?”
반대쪽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모니터 두 개를 번갈아 보느라 눈이 충혈된 사람, 각 부서에 전화를 돌리며 자료를 재촉하는 사람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한동안 사무실 입구에 서서 그들을 구경했는데 아무도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가만히 서서 그들을 살펴보고 있자 채인하 역시 옆에서 조용히 구경했다.
“이런 데서 일하라고요?”
소매를 말아 올려 꾸깃한 셔츠를 하고 있는 직원들을 보며 채인하가 중얼거렸다.
“이런 부서도 있네요. 와보길 잘했어요.”
“어휴.”
채인하는 복잡한 심경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감탄 반, 걱정 반이다.
“앞으로 할 일이 걱정이세요?”
“네.”
“걱정 마세요. 우리한테 저런 거 안 시킬 테니까. 이렇게 바쁜 때에 초보자 데려다가 처음부터 가르치겠어요? 짐 덩어리일 텐데.”
채인하가 나를 바라보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말했기 때문에 사무실 내의 사람들은 아마 다 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온 걸 모르고 세워둔 것도 아니다.
대응할 시간이 없어서, 귀찮아서 방치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팀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합류하라는 지시 받고 온 특별대책팀 팀장 채경준입니다.”
“팀원 채인하입니다.”
팀장은 피곤에 절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서 오세요. 소식은 이미 사장님한테서 들었습니다.”
재킷은 벗어서 의자에 걸어두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었다.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눈 밑이 거뭇했다.
그는 반쯤 감기는 눈으로 날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생각보다는 똑똑하시네.”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허우대만 멀쩡한 광고탑.”
나는 장난스럽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태성의 얼굴 마담입니다. 이번에도 주주분들한테 얼굴 좀 보여 드리러 왔습니다.”
“흐음.”
팀장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아마 그는 내 실적을 순순히 믿지 않은 모양이다.
누군가가 날 밀어주기 위해 실적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런데 나는 내 역할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얼굴 마담. 말은 이상하게 했지만 지금의 나는 태성의 간판이다.
태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게 바로 나였다.
팀장은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더니 말했다.
“역할을 잘 알고 계시네. 맞습니다. 이번에 주주 총회가 좀 시끌벅적할 것 같아서요.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는 데는 다른 데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 최고죠. 채 팀장님은 그걸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팀장이 피식 웃더니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주목! 여기 우리를 괴롭히는 원흉이 오셨습니다!”
순식간에 수십 쌍의 시선이 모였다.
모두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거기에는 호의보다는 오히려 악의가 많아서 나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채인하가 기겁해서 소곤거렸다.
“아니, 왜들 이러는 거예요? 원수 졌어요?”
나는 소곤거리지 않았다.
“네. 원수 졌죠. 저 때문에 전화가 폭주하고 주주 총회도 폭주하게 생겼잖아요. 일이 늘어났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하, 그렇구나!”
채인하가 왼 손바닥 위에 주먹을 콩 쳤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대화가 안 들렸을 리가 없다.
IR팀의 직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가 사그라졌다.
팀장이 대표하듯 말했다.
“원수 졌다고 말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우리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긴 한데, 그게 채 팀장님 탓은 아니잖아요.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큰 실적을 세운 게 사실이기도 하고.”
기선 제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보다.
팀장은 순순히 우리를 받아들였다.
다른 팀원들도 적의 어린 눈빛을 거두고 각자 일로 돌아갔다.
엄청난 원망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착하다.
나 같으면 이만큼 일거리 안겨준 놈 가만히 안 뒀다.
줘 팼지.
다시 콜센터와 전쟁터로 나뉜 팀을 보며 팀장이 정식으로 소개했다.
“IR팀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오셨죠?”
“대충은 압니다.”
“아까 채 팀장님이 말했듯이 우리 일을 가르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주 총회장에 들어가게 할 수도 없어요. 두 분은 여기서 우리 일을 뜯어보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떤 돌발변수가 있는지 파악하라는 말씀이시죠?”
팀장이 놀란 눈빛을 했다.
“파악이 빠르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 일 지켜보시면서 또 하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설마 이건 못 맞히겠지, 하는 표정이길래 나는 씨익 웃었다.
“저희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 알려달라는 말씀인가요?”
팀장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아니, 맞긴 한데. 어떻게 알았지. 혹시 사장님이 미리 언질 주셨어요?”
“아니요. 주총이 개판될 거란 얘기만 들었습니다. 그 원인이 저니까 제가 한 짓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거짓말이든 둘러치기든 가능하겠죠.”
팀장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합니다. 이거야, 원. 눈썰미가 장난 아닌데.”
팀장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의자를 두 개 끌고 왔다.
“근데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합시다.”
순수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네.”
“설계자가 채 팀장님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뭐, 그렇습니다.”
“미친.”
담담하게 대답하자 담담하지 않은 탄성이 들려왔다.
팀장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나 같은 팀장도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태성의 품이 미래보다 너그럽다는 뜻 아닐까.
팀장이 마치 수기를 받아쓰는 기록자처럼 눈을 빛냈다.
“그럼 무용담 한번 들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