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66)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66화(266/357)
266화. 난장판 (6)
아차산 산신령이라 이름을 댄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단상 위를 노려보았다.
이제 함부로 욕설을 할 수는 없다.
말투는 곱게 못하더라도 그 안에 반드시 논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까 저 청년을 시험하기 위해 난동 부린 남자가 끌려 나갔기 때문이고.
이 자리가 주주 총회이기 때문이며.
자신은 책임자를 찾는 주주라는 명분으로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회사 측 인간에 비해 나름 자유롭게 난동을 부릴 수 있는 주총꾼이 우위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논리 대결로 가는 순간 회사 측이 이길 수밖에 없다.
이 자리는 주주 총회이기 때문이다.
‘저 애송이가 그걸 알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총을 여러번 겪어본 직원들이라면 주총꾼들이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는 걸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애송이는 주총이 처음이었다.
이름난 주총꾼들은 매년 최대한 많은 주총에 참가한다.
IR팀원들의 얼굴을 익히다 못해 신입이 오면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다.
저 애송이는 분명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입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참여자들의 연관구도를 파악한다?
웬만큼 머리가 굴러가는 놈이 아니라면 힘들다.
‘저놈이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차라리 명문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라면 더 상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남들보다 긴 사회 경험을 가졌다.
그걸 감안해도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 정도 통찰력이라는 건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대기업 직원 놈들과 다르게 잡초처럼 컸다는 것은 알겠다.
그 과정에서 단련된 눈썰미가 있겠지.
‘그렇다고 한 번에 이 구도를 꿴다고?’
확인해 봐야 한다.
아차산 산신령은 찔러보기로 했다.
“거참, 해명하는 사람이 말도 참 많네. 누가 질문하는 사람인지 잊은 것 같은데. 여긴 주주인 우리가 질문하고 회사가 대답하는 자리요. 그렇게 시건방진 태도를 해서 쓰나?”
몇 주를 가졌든 주주는 주주다.
회사는 절대 투자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 처지를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아차산 산신령은 청년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폈다.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짙은 미소를 피워올렸다.
마침 말 잘했다는 표정이었다.
“물론이죠. 주주 총회의 본질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주주 여러분께 회사의 사업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죠.”
어? 아차산 산신령은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의혹은 있지만 전부 증거가 없는 헛소문들입니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는 얘기죠. 그런 헛소문이 나돈 게 하루 이틀 일이었습니까? 참 새삼스러운 일이네요.”
먼저 청년은 제기된 의혹들은 단번에 헛소문으로 일축했다.
그의 말대로 회사에 불리한 소문이 돈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특히나 오너 경영인 재벌가 특성상 오너 패밀리에 대한 추문이 가장 큰 약점이었다.
세습 경영이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후계자 논란이라든가.
회장의 재혼이라든가.
태성의 주주 총회가 불탄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청년은 일부러 그 일을 끄집어내어 지금 도는 소문도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소액 주주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네. 증거는 하나도 없잖아.”
“지라시야 반은 거짓말이니까.”
“에이, 반은 무슨. 3분의 2는 거짓말에 과장이지.”
“그중에 섞여 있는 진실을 가려내는 게 능력이고.”
“아까 정부와 커넥션 있다는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으니 그게 부풀려진 거 아닌가? 이번에 태성 건설이 이득 본 게 배 아파서 경쟁사가 찌른 걸 수도 있지.”
“그것도 가능성 있는 얘기네. 따지자면 태성 건설은 다른 업체가 보기엔 공공의 적 아닌가?”
곳곳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이것이 순수하게 소액 주주의 대표적인 의견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섞여 앉아 있는 우호 지분 주주들의 바람잡이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바람은 회사 측을 향해 불고 있다.
청년은 일부러 소액 주주들이 떠들 시간을 준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사업 보고 드리겠습니다. 당사는 업계 전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뛰어난 판단력으로 길을 잡아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업계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봤습니다.”
산신령 일파가 일제히 그들의 두목인 아차산 산신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들은 주주로서 참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혹을 제기하든 간에 회사가 이익을 본 건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다.
이 자리는 사업 보고를 하는 자리.
회사가 손해를 봤다면 모르되 이익을 봤으니 주주가 따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그 과정이 불법적이었나 아닌가다.
‘불법이 끼어 있었으면 나중에 회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트집이라도 잡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이 저 청년을 찔러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아차산 산신령은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 주주는 회사의 이익을 바라지만 결과가 좋다고 다는 아니지. 그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나? 만약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나중에 크게 데일 테니까.”
상대가 평범한 젊은이라면 먹힐 만한 협박이었다.
안 먹힌다고 해도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움찔하면 그 틈을 물어뜯으면 되니까.
그러나 청년은 웃는 낯 그대로 변함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해 보여서 믿을 수밖에 없는 얼굴로.
“부끄러운 일이요?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아차산 산신령은 혀를 찼다.
청년이 젊기 때문에 저 말로도 다들 믿을 수밖에 없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누구든 움찔하게 마련이다.
양심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된다.
그런데 청년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번 일은 큰 건이었어. 업계 전체가 흔들리는데 유일하게 태성 건설만 막대한 이익을 봤다고. 분명히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뒷공작이 많이 들어갔을 거야.’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회사 일이 무조건 깨끗할 수는 없다.
작정하고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더라도 분명 그레이 존을 밟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청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의 반응을 숨기는 건 노련한 능구렁이들이나 하는 일이다.
서른도 안 된 고졸 팀장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지. 그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뭐야?’
아차산 산신령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껏 많은 주총을 다녔고 그만큼 많은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눈썹 하나 꿈쩍 안 하고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석상 같은 놈은 뭐란 말인가.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참석자들의 속성을 읽어내고 목적을 알아채고 그걸 이용한다.
중요한 순간에는 감정을 숨기고 대응한다.
물론 항상 감정을 숨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그 집중력은 인정할 만했다.
청년은 더없이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 때문에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주주 여러분들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차산 산신령은 혀를 찼다.
이번에는 머리 좀 돌아가는 놈이라면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절대 깨끗하게 회사를 경영할 수는 없다.
분명 중간에 모략과 결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잘 처리했으니 회사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잘 마무리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애송이 주제에.’
솔직히 말해서 주주들은 주가만 오르면 장땡이다.
말이 좋아 투자지 결국 차익을 남기고 싶어서 주식을 산 사람들 아닌가.
청년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꼬집은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지금 태성 건설의 주가가 오르고 있지 않은가.
“저희 회사를 믿고 투자해 주신 주주 여러분께 더 큰 보답으로 돌려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만족스러운 표정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주가를 올려준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특히나 저 청년은 지금 한창 태성에서 밀어주고 있는 광고탑이다.
앞으로 저 얼굴로 얼마나 많은 이미지 상승을 가져올지를 생각하면 박수가 절로 나왔다.
“이야, 태성이 이번에 사람을 잘 뽑았네.”
“작년에 뽑은 거지.”
“아, 하여튼 간에 저런 직원이 있으면 믿을 만하지.”
“태성 물산 주식도 좀 사둬야겠는데.”
소액 주주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차산 산신령은 입을 다물었다.
청년이 단상 위에서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까?’
아차산 산신령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청년이 주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상으로 질문 답변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 없었다.
박수와 함께 청년이 단상을 내려왔다.
아차산 산신령은 그 모습을 일별하고는 어느 한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나이가 한참 어린 애송이에게 말싸움으로 진 것치고는 꽤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가 난리 칠까 봐 잔뜩 긴장하며 대기하던 경비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산 산신령은 저 멀리 있을 누군가에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됐지? 나는 할 만큼 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 *
주주 총회가 끝났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직원들이 주주들을 배웅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일렬로 서서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 사이에는 채경준도 있었다.
지나가면서 주주들이 흘끔 쳐다보며 웃거나 아는 체를 했다.
“수고해요!”
“활약 기대합니다.”
“그 친구 일 참 잘하게 생겼네!”
회장을 빠져나가는 무리 중에는 아차산 산신령을 포함한 주총꾼 일파도 있었다.
그들은 의외로 난동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회장을 빠져나갔다.
거마비도 요구하지 않았다.
특이한 일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IR팀장이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저렇게 얌전하지?”
채경준 옆에 서 있던 채인하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싸움에 져서 얌전해진 거 아니에요?”
IR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주총꾼이 괜히 주총꾼이겠습니까. 난동 피우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개중에는 자기 영향력을 키워서 돈을 더 뜯어내려는 목적도 있어요. 난동을 크게 부릴수록 입막음비도 커지니까요. 그런데 말싸움 한 번 졌다고 저렇게 조용히 나간다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데.”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채경준 역시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뭔가 다른 목적을 갖고 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다른 목적이요? 그건 더 섬뜩한데. 주총꾼이 뭘 위해서 그런 짓을 해요?”
“아니면 목적이 있는 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죠.”
“예?”
IR팀장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채경준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서운 얘기 하지 마세요. 채 팀장님 말대로라면 누군가 주총꾼을 고용해서 일부러 난동 부리게 시켰다는 소리 아닙니까.”
“뭐,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니까 너무 진지하게 듣진 마세요.”
“그렇죠? 설마 여기에 뭔가 더 엮여 있진 않겠죠. 그럼 너무 무서운데.”
“아닐 겁니다.”
채경준은 IR팀장을 달래면서도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팀장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실이 엮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주총에 참석해 본 건 아니지만 저런 사람은 많이 봤다.
진상은 괜히 진상이 아니다.
말싸움에 졌다고 얌전히 물러간다?
그럴 거면 진상을 왜 부리겠는가.
‘아, 뭐지? 진짜 뭐지?’
그때 회장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주주가 그 앞을 지나갔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딱 봐도 고가의 정장에 명품을 두르고 있었다.
어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젊은 사업가의 표본 그대로였다.
남자는 잠시 채경준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채경준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남자가 뚜벅뚜벅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채경준은 홀린 듯 한 발짝 나섰다.
주위의 직원들은 뒷마무리를 위해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채경준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를 불러보았다.
“……탁희민 부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