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68)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68화(268/357)
268화. 정찰 (2)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은 두 남자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어색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침묵이었다.
둘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눈빛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건 눈빛밖에 없는 것처럼 눈에서 불을 내뿜고 있었다.
탁희민은 채경준이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렸으나 채경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원래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파게 되어 있는 법이다.
갖고 있는 패를 한 번에 깔 수는 없으니 채경준은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영악하기는.’
탁희민은 알면서도 져주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뻔한 질문이었다.
채경준 역시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주총꾼이 난동을 피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채경준 역시 주주 총회에 참석해서 주총꾼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판단은 간단했다.
“난동을 피워서 더 큰 거마비를 얻으려고 하거나. 이름값을 높이려고 하거나. 그냥 난장판을 치고 싶었거나.”
이야기를 늘어놓듯 여러 가지 설을 언급한 채경준이 가볍게 말했다.
“누군가가 시켰거나.”
“오, 그래요?”
둘은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둘 다 변함없는 태도였다.
사실 의미 없는 탐색이었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안다.
때문에 웃는 얼굴 이외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간혹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슬쩍 감정을 내비치는 것 역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 정도는 보여줘도 괜찮겠지, 라는 계산하에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둘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탐색도 멈추지 않았다.
서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황을 유지했다.
마치 먼저 본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이해가 안 되네요. 팀장님 말대로 그냥 이유 없이 난장을 쳤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계산된 행동을 보여서요. 목적이 딱 보이더란 말입니다.”
“무슨 목적 말입니까?”
“저를 자꾸 떠보더라구요.”
“흐음.”
탁희민은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살짝 식은 라떼를 마시며 오디오북이라도 듣는 것처럼 채경준의 설명을 들었다.
“처음엔 평범한 주총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임자를 언급하더군요.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요?”
탁희민은 흘려듣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꼬박꼬박 맞장구를 쳤다.
“제가 올라가자 진짜 책임자인지를 확인했고, 그다음으로는 제가 얼마나 대응할 수 있는지를 떠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시험을 해본 거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에.”
“정말 난장판이 목적이었으면 끝까지 덤벼들 만한데 어느 순간에 딱 멈추더군요. 마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그리고 어느 한쪽을 쳐다봤어요.”
탁희민은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채경준이 추궁하는 와중에도 그는 ‘이 집 커피는 거품이 별로 부드럽지 않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경준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거나 흘려듣는 게 아니다.
탁희민이 기대한 대로라면 이 정도 추측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채경준은 주총꾼의 배후에 탁희민이 있다고 단정 지었다.
결과가 맞았으니 과정은 들을 필요도 없다.
어떤 과정을 거쳐 맞혔든 그는 이미 탁희민의 기대를 충족시켰으니까.
“쳐다본 것만으로는 고용주가 저라는 걸 알 수 없을 텐데요.”
그럼에도 탁희민은 꼬박꼬박 채경준에게 대응해 주었다.
채경준이 그 과정을 풀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고용주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탁희민 부사장님이 나타나셨으니까요.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주총꾼을 고용해 절 시험했는데 그 자리에 라이벌 그룹의 후계자분께서 나타나셨다니.”
“흐음.”
탁희민은 대답인지 아닌지 모를 추임새를 넣었다.
채경준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답지를 맞춰보는 시간에 불과하다는 걸 아니까.
“물론 고용주는 탁희민 부사장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죠. 부사장님이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 분명 뭔가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뭘 보고 싶었을까요?”
이젠 탁희민도 대답하지 않았다.
답지가 거의 맞아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태성 건설이겠죠. 그럼 태성 건설에 왜 관심을 가지게 되셨을까? 최근 누군가 태성 건설의 움직임을 이용해 미래 건설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배후가 바로 탁희민 부사장님이죠.”
탁희민은 시라도 듣는 양 느긋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채경준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부사장님은 계획을 세운 장본인을 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절 보러 오신 거죠.”
다시 채경준의 목소리가 밝아지며 싱긋 웃었다.
고개는 창밖으로 돌린 채 시선만 옆으로 돌린 탁희민이 머그잔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정답입니다. 백점 만점이에요.”
“와아. 감사합니다.”
둘은 연기라도 하듯 서로 칭찬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표면적인 모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과장스러움을 덧붙인 것이다.
“그래서? 이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탁희민이 묻자 채경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절 멈춰 세운 건 팀장님이잖아요.”
“아니죠. 제가 알아보기 쉽게 행동하신 건 부사장님이죠.”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다시 웃었다.
물론 속으로는 욕설을 한바가지 퍼붓고 있었다.
‘탁희민, 여우 같은 놈이. 지가 떠보러 와놓고 나한테 턴을 넘기려고 하네?’
‘이거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 놈인데. 어떻게든 주도권 안 놓치려고 애쓰는 거 봐라.’
문득 탁희민은 눈앞의 청년이 자신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계획을 금방 파악한 것도, 마주 보고 앉아 빈틈없이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것도.
둘의 대응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사고방식은 어떨까? 궁금하긴 한데.’
탁희민은 틈을 찾아 주위를 맴도는 하이에나처럼 그를 훑었다.
대치 상태가 길어지고 있다.
이럴 경우 자신이 주로 쓰는 돌파구가 있었다.
과연 상대도 똑같은 방법을 쓸 것인가?
탁희민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러자 채경준이 기다렸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죠. 서로 끝이 없는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끝이 없는 길이라.”
“제가 부사장님을 떠보고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부사장님 역시 절 떠보고 있죠. 서로 알고 있으니 떠보기가 먹힐 리가 있나요.”
서로가 서로를 떠보고 있다.
그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으니 제대로 들어갈 리가 없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알면서도 둘이 견제를 해온 것은 어느 한쪽도 주도권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주도권을 놓을 때다.
아니, 놓는 척을 할 때다.
탁희민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아냈다.
“그렇네요. 이대로라면 진행이 안 되겠는데요. 내려놓고 조금 솔직해집시다.”
이것 역시 그런 척에 불과할 뿐이다.
다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팀장님 말대로 궁금했던 건 사실입니다. 덕분에 제 일이 수월해졌거든요.”
“탁재민 전략실장님을 엿 먹인 일 말이죠?”
탁희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상대가 먼저 허물없이 다가왔다.
그것 역시 계산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접근 방식이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친해진 것처럼 유도하고 속을 뒤흔든다.
그리고 정보를 캐낸다.
너무도 잘 아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탐색전을 펼친 것도 이것을 위해서였다.
마음을 연 것처럼 보이기 위해.
“네, 맞아요. 그럼 인정하는 거 맞죠? 팀장님이 시나리오 썼다는 거.”
“어떤 쪽의 시나리오 말씀이십니까?”
채경준이 시치미를 뚝 떼자 탁희민이 달래듯 말했다.
“에이, 아까 본인 입으로 얘기했잖아요. 업계에서 있었던 일, 시나리오 쓴 게 맞다고.”
“네, 뭐 그렇게 말하긴 했죠.”
“그리고 미래 건설 건드린 것도 맞으시고.”
“어휴, 부사장님께는 못 당하겠습니다. 어떻게 다 파악하고 오셨습니까?”
이미 알려진 일이고, 채경준 스스로 까발린 내용이었지만 그는 탁희민을 띄워주었다.
물론 이 정도로 탁희민이 넘어갈 사람은 아니다.
그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솔직하다. 너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
둘은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다음은 어떻게 나올 거냐?’
탁희민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고.
‘온 목적은 알았는데. 그냥 보내긴 그렇고 뭐라도 하나 얻어 볼까.’
채경준은 틈을 찾아 날을 세웠다.
사적인 감정이 있는 만큼 그냥 보내긴 싫었다.
뭐가 예쁘다고 곱게 보내준단 말인가.
‘어차피 상대는 부사장이니까. 내가 져도 잃을 게 없단 말이지.’
비공식적인 자리이고 채경준의 입에서 흘러나갈 중요한 비밀 같은 건 없다.
기껏해야 이번 건설업계에서 있었던 시나리오 정도인데 그걸 탁희민이 모르겠는가.
어떻게 덤비든 채경준이 손해 볼 건 없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일단 물어뜯고 봐야 한다.
채경준은 씨익 웃었다.
“그럼 부사장님이 제게 빚 하나 지신 거네요.”
“오?”
탁희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저렇게 나오다니.
“빚을 지우는 거, 그게 채 팀장님이 원하는 겁니까?”
“아뇨. 이렇게라도 해야 탁희민 부사장님하고 접점이 생길 것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저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건데요.”
“에이, 그거랑은 다르죠. 그건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거고, 이건 부사장님께 부담을 안겨 드리는 거고.”
“하하. 저랑 접점이 생겨서 뭘 어쩌시게요. 저는 상대 그룹인데요.”
채경준이 보란 듯이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크게 배웠거든요. 제 마음대로 판을 굴리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끼어들어서 제 판을 홀라당 빼먹지 뭡니까. 그런 사람은 멀리 두면 안 돼요. 가까이서 관찰해야지.”
건방지네, 탁희민이 순식간에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웠다.
이런 도발 역시 채경준이 원하는 흐름일 것이다.
‘뭘 하든 자신이 얻어가는 게 더 많다, 이거군.’
탁희민은 손에 쥐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넘어가 줄까.
탁희민의 생각과 결정은 빨랐다.
“좋은 말씀이에요. 적은 가까이 둬야 하는 법이죠. 저 역시 이런 좋은 인재와 알게 됐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고.”
“그런 것 치고는 스카우트 해보려는 시도조차 안 하시는데요.”
탁희민은 순간 흠칫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왜 자신은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을까?
머리도 잘 돌아가고 써먹을 만한 놈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을 텐데.
잠시 생각해 보던 탁희민은 아까 잠깐이나마 느꼈던 살기를 떠올렸다.
분명히 자신은 이 청년에게 적대감을 느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아래에 있는 청년을.
왜 그랬을까.
“흠, 그렇네요. 어쩐지 채경준 팀장님은 제 설득에 응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말입니다.”
“사람 잘 보셨네요. 저는 태성을 떠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미래를 꺾어야 하거든요.”
“진심이세요?”
“솔직해지자고 말씀하셨잖아요.”
탁희민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그 순간, 탁희민은 왜 자신이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은은한 적대감 때문이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이 청년은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거둘 수 없다면 이쯤에서 밟아놓는 게 맞긴 한데.’
탁희민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생각을 끝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명함 주세요.”
채경준이 군말 없이 태성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연락처 교환이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 커피값 대신 빚을 하나 갖고 가도록 하죠.”
아까 채경준이 말한 빚 이야기였다.
일방적인 관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탁희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이 빚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꽤 후회할 겁니다.”
채경준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건 내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에 불과하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바로 밟을 거다.
경고의 뜻이었다.
“잘 알아들으신 것 같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도 즐거운 얘기 나누도록 하죠.”
채경준은 서늘하게 대답했다.
“네.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사이니까요.”
“그럼요. 이 업계에서 그 정도면 친구죠, 친구.”
말투는 정겨웠지만 이제 둘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탁희민은 어느새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공손한 인사로 탁희민을 배웅한 채경준 곁으로 채인하가 후다닥 달려왔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채인하가 놀라서 홱 돌아보았다.
보기 드물게 채경준은 화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