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283)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283화(283/357)
283화. 비밀 지시 (1)
권태호는 막간을 이용해 핸드폰 게임을 켰다.
원래는 게임을 잘 못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고렙이 되어 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저 이 게임의 커뮤니티 기능이 잘 되어 있어서 골랐을 뿐이다.
핸드폰 게임이라 언제 어디서든 접속이 가능하다는 점도 한몫 했고.
방명록을 쓰면 친구에게 알림도 간다.
채팅 내용은 게임을 껐다가 켜면 사라진다.
목장 키우기 게임이라 누군가한테 들켜도 이상할 건 없었다.
천하의 권태호가 이런 게임을? 하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긴 하겠지만.
[방명록을 남겼습니다.]권태호는 친구의 방명록에 별 의미 없는 인사말을 남겼다.
그 위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방명록이 하루 단위로 적혀 있었다.
요즘 부쩍 호출이 잦아졌다는 뜻이다.
그럴 만도 했다.
권태호와 게임 친구가 은밀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밑그림 단계지만 완성되기만 한다면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장기적인 계획이라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예단할 수 없었다.
상황은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움직임은 어때?
접속하자 게임 친구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는 고립되어 있는 터라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그의 인맥이 아직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들을 통한 정보는 검증이 필요했다.
권태호만 한 정보원이 어디 있겠는가.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일이 틀어진 거야?
상대의 안달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권태호는 입가를 씰룩이며 느긋하게 타자를 쳤다.
=탁재민과 탁희민 양쪽 다 연결 고리를 만들어놨어요.
-오?
권태호가 미처 타자를 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상대의 채팅이 먼저 날아왔다.
-뭔 소리야 설명 좀
특수문자로 전환할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보낸 게 보였다.
=탁재민하고 탁희민 싸움을 붙여놨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 편을 든 게 아니라 양쪽 모두와 선을 만들어뒀습니다.
-중간에 안 끼고 빠졌다는 소리네?
=네.
상대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ㅋㅋㅋㅋㅋ이야 어째 실력이 더 는 것 같다?
상대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실 둘의 원래 계획은 좀 더 단순했다.
다르게 말하면 기대치가 낮았다.
채경준이 탁희민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미래 그룹과는 언젠가 반드시 부딪히게 되어 있다.
미래를 뛰어넘고 싶어하는 회장의 뜻이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회장의 뜻이 그러하다면 준비하는 것이 권태호의 역할이다.
그 계획에는 채경준도 끼어 있었다.
권태호는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일단 냅다 던지고 본다.
백 마디 말보다 실전에서 한 번 굴러보는 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경준은 실전을 통해 열을 배우는 인물이었다.
그 실력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만 해도 잘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앞으로 싸우려면 상대에 대해 알아놓는 게 좋다.
최소한 성격은 어떤지라도 알면 상대의 선택지를 좁혀볼 수 있다.
때문에 권태호는 양쪽 다 채경준이 겪어보게 해주고 싶었다.
탁재민과 탁희민은 정반대의 성향이다.
좋게 말해 신중하다지만 실상은 의심 많고 조심스러운 탁재민.
계획적이며 거리낌없이 남을 이용해먹는 탁희민.
그야말로 미래 그룹 총수의 아들다운 성격이었다.
그 둘에 대해 설명해 주긴 했지만 역시 겪어보는 게 최고다.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남을 주선했다.
그랬는데 채경준은 생각보다 더 잘해주었다.
=뒤에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요?
혹시나 싶어 권태호가 묻자 게임 친구가 얼른 채팅을 쳤다.
-아냐아냐. 탁재민은 그런 멍청이가 아니잖아.
탁재민이 태성 그룹의 누군가와 손을 잡은 건 내통했다는 의혹을 살 수도 있다.
특히나 탁희민이 알게 되면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겠지.
탁재민이 탁희민에게 밀리고 있다고는 해도 미래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다투고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렇게 신중한 성격의 탁재민이 자기 협력자의 존재를 들킬 리가 없었다.
특히나 그 협력자가 경쟁사의 일원이라면.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뜻인데요.
권태호가 힌트를 준 것도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의 상황 판단만으로 형제 싸움을 부추겼고 그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양쪽 다 친분을 유지했다.
그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물론 머리 좀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상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건 다른 일이다.
생각이야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걸 현실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다.
-우리 의도를 읽은 것 같은 움직임이네.
=그만큼 생각이 많이 따라왔다는 얘기죠.
시야가 더 넓어졌다.
이전보다 상황을 더 파고들고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밖으로 돌린 보람이 있네.
=겪은 만큼 성장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권태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성장이 빨랐다.
작년엔 프로젝트를 맡아서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올해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본 게 건설사 사태였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발전했습니다. 탁재민, 탁희민하고 대화한 것만으로 계산을 끝내고 유도한 거니까요.
잠시 채팅이 멈췄다.
상대가 뭔가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게임 친구가 뭘 생각하는지는 권태호도 알 것 같았다.
-좀 당겨도 될 것 같지?
=네.
둘은 시선을 나누듯 채팅창을 통해 무언의 동의를 했다.
-본격적인 시점은?
=저쪽 일 벌이는 거 따라서요.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내 생각에도 그래.
탁재민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탁희민도 가만 있지는 못하겠지.
둘이 물어뜯고 싸우기 전에 분명 물밑에서 뭔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가 바로 태성도 움직일 때였다.
물론 권태호가 직접 움직이진 않는다.
그는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러니 채경준이 제격이었다.
원래부터 밖으로 돌리고 있었으니 어디에 던져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워낙에 사고 치고 다닌다는 인식이 생겨서 어디에 머리를 들이밀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겸사겸사 채경준에게 경험을 쌓게 해줄 수도 있다.
=슬슬 올 시간 됐네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끔 나한테도 인사 좀 하러 오라고 그래. 요즘 너무 안 와.
=바쁘잖아요.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그럼 갑니다. ㅃ2
-???
게임 친구의 다급한 물음표를 뒤로 하고 권태호는 게임을 껐다.
핸드폰을 내려두고 잠시 눈을 감고 있자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이제는 익숙한 청년이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 *
요즘 들어 권태호를 자주 보는 것 같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권태호를 보며 쓸데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엔 내가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다.
권태호 쪽에서의 호출이었다.
아마 탁재민과 탁희민을 만난 것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함이겠지.
권태호 귀에 들어갔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다.
몰래 만난 것도 아니고 꿀릴 것도 없으니.
다만 권태호가 무슨 충고를 해줄지가 궁금했다.
일전에 불렀을 땐 미래 그룹의 두 형제에 대한 설명을 해줬고 그 후에 직접 둘을 만나 겪어보았다.
일부러 불렀다면 내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는 건가?
나는 가만히 서서 권태호의 말을 기다렸다.
“훌륭하게 노량진 재개발 건을 따냈다고 들었습니다.”
시작은 가벼웠다.
겸손하게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권태호 앞에서 쓸데없는 가식은 의미없을 것 같아서 관뒀다.
“솔직히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탁재민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더군요.”
권태호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짧은 시간 치고받았을텐데 뭘 느꼈습니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상사 앞에서 내뱉을 만한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표현하는 데 이것보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권태호의 재촉하는 듯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내뱉고 말았다.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찌질이입니다.”
“그래요.”
빈약한 어휘력이었지만 권태호는 수긍했다.
그가 파악한 탁재민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탁재민과 탁희민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안 해본 건 아니다.
당연히 위험하지.
“하지만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익과 손실이 명확하면 계산은 쉽습니다.”
권태호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손을 잡았을 때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다.
확실한 아군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확실한 적은 생기는 법이니까.
물론 양쪽 다 선을 유지했을 때의 손실도 있다.
자칫하면 양쪽 다 적으로 돌릴 수도 있으니까.
“제가 채경준 씨의 결정을 지지하는 이유는 확실하게 손익을 따져보고 계산한 결과기 때문입니다. 두 선택지 다 리스크는 있어요. 하지만 채경준 씨는 감정으로 선택한 게 아니죠?”
“네. 엄연히 더 이득이 되는 쪽을 골랐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득이라고 봤습니까?”
“한쪽을 적으로 돌리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형제 싸움에 끼어듭니다. 하지만 남의 집안싸움에 우리가 끼어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미래는 태성의 적입니다. 한마디로 탁재민과 탁희민 모두 밟아야 할 상대라는 뜻이죠. 둘이 알아서 싸우고 우리는 팝콘이나 뜯는 게 최선입니다.”
“물론 뜻이 맞다면 힘을 합칠 수도 있겠죠?”
“그런 여지를 주는 게 중요했죠.”
양쪽에게 손잡을 기회를 열어놨으니 둘 다 나를 섣불리 적으로 돌리지 못한다.
한마디로 중립 외교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지만 자신은 있었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태성맨이고 내 뒤엔 권태호가 있다.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는 이미 몇 번이고 느꼈다.
권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했습니다.”
나는 히죽 웃었다.
롤모델 앞에서는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도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롤모델에게 받는 칭찬은 몇 번이어도 기분이 좋다.
“오늘 부른 건 채경준 씨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입니다. 요즘 분위기요.”
기다리던 내용이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도는 게 지라시입니다. 오너 리스크도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이상 그들은 온갖 가십거리를 다 다뤄요. 모 재벌 3세가 마약파티를 했다거나 누가 직원을 때렸다거나 하는 신변잡기도 빠짐없이 돌죠.”
권태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왔다.
지라시가 떴구나.
“채경준 씨가 판을 깔아준 덕분에 둘은 싸워야 하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등을 떠밀어준 거죠. 조만간 충돌할 겁니다.”
“그 사이에서 얻을 이익이 있을까요?”
권태호라면 이 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제멋대로 깔긴 했지만 기회임은 틀림없으니까.
“그 전에, 채온익이 먼저 움직일 겁니다.”
여기서 채온익이 대체 왜 나온단 말인가.
잠시 생각하던 나는 권태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설마 채온익 상무님이 채태익 부회장님을 치려는 겁니까?”
“그보다 더 합니다.”
그보다 더 하다면 대체 뭐가…….
“아.”
나는 설마 싶은 기분으로 물어보았다.
“혹시 채온익 상무님이 저쪽하고 손잡은 건 아니겠죠?”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권태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탁재민일까, 탁희민일까.
경쟁사와 손잡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손잡을 만큼 후계자 자리가 탐이 난 걸까?
그럼 채온익은 대체 어떻게 움직인다는 거지.
내가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권태호가 말했다.
“알아야 할 건 이겁니다. 조만간 채온익이 움직일 거고 그때 대처를 위해 채경준 씨를 파견할 겁니다.”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채경준 씨 생각대로 하세요.”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채온익을 돕든, 그를 막든 내 결정에 맡기겠다는 뜻인가?
아니, 그때쯤이면 또다시 손익을 저울에 달게 될 것이다.
채온익이 채태익보다 뛰어나다면 채태익이 밀려날 수도 있는 거다.
그게 회사 입장에서 이득이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그때 가장 최전선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건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일차적으로 내 판단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권태호가 톡, 하고 책상을 두드렸다.
다시 나는 그에게 집중했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상기시켜 줄 게 있습니다.”
권태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태성 건설을 무너뜨리라는 건 어떻게 되고 있죠?”
그가 언급한 건 회장의 비밀 지시였다.